EP.46 046─3주
저벅.
“……”
로에르는 문득 걸음을 내딛다,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페르젠이 말했던 대로, 그 동안 악착같이 달려오며 일구어낸 것은 상당히 많았다.
황실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고, 알프레드 가문의 장녀와 결혼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에 비하면, 제법 찬란한 영광이라 할 수 있을 법한 걸 손에 넣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로에르는 한 번도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숨이 턱하니 막혀왔다.
브뤼테인이라는 산을 오르며, 저 아래 있을 때에는 알지 못했던 그 위엄과 압박이……
온 몸을 짓누른다.
이 고산병을 견뎌내고, 더 높이 올라가야만 하는데.
어렴풋하게, 정상이라는 끝자락이 보이는데.
남아있는 그 간격이, 너무나도 버겁게 느껴진다.
오늘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작금의 황실이 고개를 숙였다.
정치적인 이익이 개입된 결과라 하더라도, 에르네스 제국 내에서 브뤼테인의 입지란 그런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다시금 걸음을 옮겨, 상세한 진술이 담긴 내용을 제출하고 로에르는 벤치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전공(戰功)이…… 필요하다.’
기어 올라가는 것으로 버겁다면, 날아가면 되지 않겠나.
그럴 수 있는 날개가 지금의 클로디아 가문에게는 필요했다.
그리고 그 기회의 무대는, 머지 않아 다가오리라.
* * * * *
소란스러운 아침을 맞이한 건 기숙사의 학생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라우라는 자신을 잠깐 보자고 찾아왔던 페르젠 때문에, 기숙사의 옥상으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 시신에, 손상은 없겠지……’
어젯밤, 강림한 명계의 괴이가 어떤 식으로 날뛰었으며.
또, 어떤 식으로 제압 되었는지.
그 일련의 과정을, A 기숙사의 학생들은 전부 지켜보았다.
당연히 라우라도 그 중 한명이었고, 그녀는 전생의 자신을 사역하며 깔끔히 마무리를 짓는 페르젠의 모습에 조금은 감탄을 토해냈다.
유클리드 등급 내에서, 마력으로 형질 변환 시킨 전류를 내뿜어 자연적인 번개와 동일한 화력을 자아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페르젠은, 자연적인 번개의 발생을 유도한 게 아닐까.
동일한 마법사 간의 싸움이나, 오러 나이트가 대상이었다면 준비 시간이 너무 길어서 의미가 없었으리라.
하지만 상황에 따라 유도리있게 방식을 바꾸는 건, 원소 마법사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센스였다.
끼익!
어느 새 도달한 옥상의 문을 열고, 라우라는 걸음을 내딛었다.
“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깔끔한 정장 차림의 사내가 연초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두 팔이 망가져 있는 상태라 전생의 자신을 사역하며 도움을 받고 있다는 점일까.
“아, 안녕…… 하, 하세요.”
“그래.”
연초를 꺼트리고, 몸을 돌린 페르젠이 자신을 내려다본다.
“라우라.”
“네……”
“만월의 주기는 대략 29일이지. 그러면 4월 6일이나 7일 즈음에 다시 네 괴벽이 발작할 것이다.”
“……”
“그 때는 경황이 없었기에 너를 데리고 여관의 방으로 들어섰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가 없다. 때문에 자그마한 집 한 채를 매수할 예정이니 때가 되면 거기에서 만나도록 하자꾸나.”
“아, 그……”
아닌 걸 알고는 있지만, 페르젠은 유부남이었기에……
자연스레 불륜을 저지르자는 속삭임으로 들려왔다.
“쓸데없이 얼굴은 왜 붉히나. 내가 너를 정부(情婦)로 삼을 것 같기라도 한가?”
“아, 아니요……”
“그 때도 말했지만 네 몸에는 흥미가 없다.”
“……”
“매수할 예정이라고는 했지만, 매수가 실패할 가능성은 없으니 미리 그 주소를 네게 넘겨주마.”
전생의 자신, 이사벨의 시신이 곱게 접힌 종이를 내민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든 라우라는, 잠시 머뭇머뭇 거리다 페르젠에게 꾸벅 허리를 숙인 뒤 걸음을……
“라우라.”
“네?”
“여유가 없어 저번 주에는 확인을 하지 못했지.”
“무, 무슨…… 마, 말씀을 하, 하시는 건지……”
“음악실에서의 일을 벌써 잊어버렸나.”
“아……”
“그러면 읊어보도록 하지.”
“……”
정말 지독한 남자이지 않을까.
고작 피아노 연주를 한 번 부탁했었을 뿐인데.
그래도 그 당시 페르젠이 내건 조건을 받아들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라우라는 한참을 우물쭈물 거리다 입을 열었다.
“멍…… 멍…… 이는……”
“그리 느리게 말해서는 더듬지 않는다는 의미가 없지 않나.”
“……”
“라우라.”
“머, 머, 멍, 멍이는……”
“되었다. 아직 멀었군.”
“……”
눈앞에는 한 때 아폴리온 등급의 원소 마법사였던 전생의 자신이 서있었기에, 작금의 대비되는 상황 자체가 평소보다 몇 배는 짙은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선사했다.
“이, 이거…… 아, 안하면 아, 안돼요?”
“……”
“이, 이런…… 다, 다고…… 고, 고쳐질 것 가, 같지는……”
“그건 해봐야 아는 것이겠지. 그리고 나는 당시의 조건을 정당하게 요구하고 있을 뿐이니, 비겁하게 응석 부리지 말도록.”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자연스레 볼을 부풀리는 라우라가 페르젠을 슬며시 노려보다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숙인다.
“다, 다음에…… 뵈, 뵙겠습니다.”
“그래.”
등을 돌린 라우라가 옥상을 내려가고, 잠시 뒤 페르젠도 기숙사를 나와 마차를 타고 유페미아가 기다리고 있을 저택으로 복귀했다.
* * * * *
“당신, 팔이……”
“금이 갔다. 깔끔히 나으려면 아무리 빨라도 2주는 걸리겠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네가 알 필요는 없다.”
“……”
“방으로 올라가있도록. 오늘은 침실에서 같이 아침을 들지.”
페르젠의 말은 불친절하기 그지없었지만, 유페미아는 무어라 자그마한 항변조차 하지 못하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침실로 돌아왔다.
그래도 명목상 아내인데, 남편이 다친 일에 대한 경위 정도는 알려 해도 괜찮은 게 아닌가.
아니면 아이를 낳기만 하면 되는 씨받이에게는, 그런 것조차 주제가 넘었다고 선을 긋는 건지……
하기야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줄곧 취급이 그래왔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두 팔이 저리 되었는데, 관계를 가지려 하지는 않겠지.
나으려면 아무리 빨라도 2주라고 했으니, 평균적으로는 3주 정도가 걸린다는 뜻이리라.
그러면 다음번 가임기에는 무사히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번 달거리가 오는지 안 오는지를 봐야겠지만……
“하………”
한숨을 내쉬며, 유페미아는 자신의 아랫배에 손을 얹혔다.
만약 그 남자를 똑 닮은 아이가 태어나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며 아장아장 걸어온다면, 솔직하게 말해서 사랑해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무슨 죄가 있을까.
그리고 1년 가까이 배에 품고 있다 보면, 싫어도 아이를 향한 모성애가 생겨나지 않을까 싶어 유페미아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심지어 남자 아이가 아니라 여자 아이라면, 그 남자에게 제대로 사랑 받지도 못하고 외면 받기만 할 텐데……
벌컥!
생각이 점점 깊어지려 할 때, 페르젠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옆에는 그가 사역하는 시신이 뒤를 따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미 죽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시체였다.
“유페미아, 다음 주부터는 나와 함께 아카데미로 출근하면 된다. 해야 할 일은 그 때 그 때 즉석에서 지시를 내려주마. 일정이 변경될 여지는 있으니 알아두도록 하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유페미아는 답변을 대신했다.
그에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페르젠은, 옆의 침상에 걸터앉아 무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분 상했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은 거라면 확실히 연기를 해라. 생일 날 원하는 선물을 받지 못한 아이처럼 그러지 말고. 달래주기라도 바라는 건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했어? 유추한 걸 정답이라는 듯 결론내리지마. 많이 불쾌해.”
“……”
유리엘도 그러더니 두 팔을 쓸 수 없는 자신을 보며 한없이 작아졌던 자아가 다시 커지기라도 한 걸까?
또박또박 말대꾸를 해온다.
아니, 말대꾸를 하는 건 상관이 없으나……
“미, 미안해…… 말, 실수했어.”
“……”
말을 하고 난 이후, 달라진 분위기를 어렴풋하게 느꼈는지 유페미아가 페르젠의 눈치를 살피며 사과를 건네 왔다.
“알려 줄법한 사실이기도 했는데 알려주지 않은 것에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해버렸어. 게다가 후사를 위해 아이를 낳기만 하면 되는 씨받이 처지라는 게 새삼스레 자각이 되어서…… 아무튼, 그래.”
“네 말에는 커다란 어폐가 있다, 유페미아.”
“……”
“너는 그것에 불쾌함을 느껴서는 안 돼. 아니 불쾌함을 느끼더라도 그 감정을 담은 행동을 내 앞에서 드러내면 안 되지.”
“나도, 사람이야……”
“너는 진정 사람이 모두 대등하다고 믿나. 부부관계로 얽혀 있더라도 우리 둘 사이의 상하(上下)를 잊어서는 곤란해. 불합리 하다 느끼더라도 이로 인해 네가 가지는 이득이 얼마나 되지?”
“……”
“너도 참으로 피곤한 여자구나. 쓸데없는 자존심 같은 건 버리면 편할 텐데. 얌전히 주어진 상황 속에서 행복을 찾아라. 나는 이런 결과를 바라고 최근 들어 네게 살갑게 대해준 게 아니야.”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그녀의 목에 채워진 목줄이 느슨해질 필요는 없지 않겠나.
시작부터 꼬인 관계이고, 이제 와서 애틋한 로맨스 같은 게 생겨나기는 글러 먹은 시점이니 철저히 길들여야만 했다.
“가축처럼 키워지고 다뤄지는 게 불만이라면, 무언가 해내고 있다는 그런 성취감을 가지고 싶은 거라면…… 그래. 지금 루에르그에 투자했던 모든 것들을 거두어들이지.”
“그, 그건……”
“그리고 네가 하는 것에 따라 조금씩 돌려주겠다. 그래, 가임기가 아닐 때 나를 유혹하는데 성공하여 씨를 받아낸다는 조건은 어떠한가? 이러면 루에르그를 위해 희생한다는 체감이 피부로 느껴지겠지. 성녀 행세라도 하고 싶은 게 아니었나.”
“……”
“지금 당장 전라가 되어서 바닥에 엎드린 다음, 엉덩이를 치켜들고 창녀처럼 졸라보지 그러나.”
유페미아가 맥없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연다.
“잘못, 했어요……”
“나는 말로만 하는 사과를 가르친 적이 없을 텐데.”
삐걱……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는 유페미아가, 페르젠을 마주보며 스스로 치맛단을 끌어 올리더니 자신의 새하얀 배를 앞으로 드러냈다.
두 사람 사이의 약속된, 철저한 복종의 자세.
그 모습을 보며, 페르젠은 이사벨의 시신을 사역해 앞으로 걸어오게 만든 후 유페미아의 아랫배를 꾸욱 누르게끔 조작했다.
“흑……!”
부패하지만 않았을 뿐, 사후 경직은 와있는 상태라 이사벨의 손마디는 무척이나 차갑고 딱딱하여 마치 돌을 얹히고 문지르는 느낌이 들었다.
똑똑.
그리고 그 때, 밖에서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옅은 침음을 흘리며, 유페미아가 페르젠을 바라보지만……
“들어와라.”
듣지도, 보지도 못한 척을 하며 페르젠은 시녀들이 들어오는 걸 곧장 허락해버렸다.
벌컥!
“앗……”
아침 식사를 가지고 들어온 시녀들이, 현재 유페미아의 모습을 보며 당황을 금치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그, 그러면 다 드시고 불러 주십시오……”
타악!
시녀들이 머무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이 유페미아에게 있어서는 억겁의 세월 같았다.
“흐, 끕……!”
기어코 자신도 모르게 복받치는 감정에, 순간적으로 울음이 터져 나오려던 유페미아였지만 간신히 참아낸다.
스윽.
“이리 오지.”
이만 하면 충분하겠거니 싶어, 사역하고 있는 이사벨의 시신을 멀찍이 떨어트려두고 넌지시 유페미아를 부르는 페르젠.
그에 유페미아는 치맛단을 붙들고 있던 손을 내리고, 천천히 페르젠 곁으로 다가가 눈짓하는 그의 무릎 위로 조심스레 주저앉았다.
쪽.
“흑……”
눈물이 흐르기 일보직전인 눈가와, 오뚝한 콧잔등 위로 고개를 숙인 페르젠이 부드럽게 입맞춤을 해온다.
그것이 조금 전의 상황과는 너무나도 대비되어, 유페미아는 일순간 안도감을 느끼며 간신히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렸다.
“흐아아앙……!”
서러움도 이런 서러움이 없다는 듯, 페르젠의 품안에서 목 놓아 우는 유페미아.
그럴 때 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핥으며 페르젠은 유페미아를 달래듯 상냥하고 부드러운 키스를 연신 전해왔다.
병 주고 약주는 꼴이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유페미아에게 먹혀들었다.
“끅! 흐윽……”
“다 울었으면, 식기 전에 아침을 먹도록 하지.”
이사벨의 시신을 사역해, 고기의 살점을 발라낸 페르젠이 유페미아의 입 안으로 넣어 주었다.
“끄, 흑!”
목이 터져라 울었던 여운으로 딸꾹질을 하면서도, 아기새처럼 우물우물 잘 받아먹기는 한다.
그리고 그런 유페미아를 내려다보며, 페르젠은 간간히 뺨과 이마에 계속해서 부드러운 키스를 건네주었다.
“흐, 응……”
그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잠시 뒤 유페미아는 딸꾹질조차 멈춘 채 연신 입가에 가져다주는 음식을 받아먹기만 할 뿐이었다.
“나, 나……”
“왜 그러지.”
“……실.”
“잘 들리지 않는다.”
“화장, 실……”
“……”
“쉬, 마려워……”
오줌이나 소변 같은 직설적인 단어는 언급하기 그랬기에, 유페미아는 최대한 순화해서 말했다.
“그런 것 까지 일일이 허락 받을 필요는 없다. 갔다 와라.”
잠시 기강을 잡은 게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는지, 생리현상의 해결까지 허락을 받으려는 유페미아의 모습에 페르젠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보내주었다.
“으응……”
몸을 일으킨 유페미아가 눈가를 스윽 닦으며, 간간히 훌쩍임을 내뱉다 방을 나선다.
그리고 페르젠은 유페미아의 그런 모습이, 상당히 귀엽게 보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할말이 없습니다.
어제 올리지 못한 건, 그냥 능력 부족 입니다.
연참해서 월요일날 뵙고 싶었지만, 쓰고 있는 47화도 잘 풀리지가 않네요.
무덤덤하게, 아무 감정 없이, 쓰고 있는 나 조차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그런 글은 도저히 업로드 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46화는 5번 정도 갈아 엎었을 겁니다.
실력은 없는 주제에 바라는 이상은 높은 미련한 놈이라, 이런 식으로 굴리고 갈아서 그나마 스스로가 만족할만한 퀄리티를 뽑아 내지 않으면 납득이 되지가 않네요.
하루가 48시간 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죄송합니다 ㅜㅜ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