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4 034─강연
예상도 못했던, 의외의 수확이다.
머지 않아 황실에서는 커다란 연회를 개최할 터.
그 연회는 곧 왕위의 교체가 일어날 두 왕국을 두고서 에르네스 제국이 엘마르크 제국과 힘겨루기를 한다는 걸 본격적으로 알리는 신호탄임과 동시에……
황위 찬탈전의 개막식이 되겠지.
연회의 초청장이 명목상 내 앞으로 오기는 할 테지만, 연회의 참석자들은 내가 참가할거라는 걸 조금도 기대하고 있지 않으리라.
24년의 세월 간, 단 한 번도 그런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까.
‘시작부터 로젠베르크라는 패를 쥐어들고 임할 수 있는 건, 적지 않은 메리트라 볼 수 있겠지.’
라우라가 자신의 아버지인, 현 로젠베르크의 가주를 설득시키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러면 해당 진실을 들고, 압박을 넣으면 되는 일이니.
라우라를 교두보 삼은 건, 말 그대로 최소한의 양보일 뿐이다.
내 목숨의 안위가 달린 일인데,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그 이상 편의를 봐줄 수가 있겠는가.
“아…… 도련님, 어서 오십시오.”
저택으로 들어서니, 청소를 하던 시녀가 꾸벅 허리를 숙여온다.
“유페미아는 자고 있나?”
“네. 마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런가.”
시각은 이제 7시가 되려하는 시점이었기에, 나는 목욕부터 하고서 걸음을 옮겨 옷장을 열었다.
사실 옷장이라고는 해도, 외출복에 한해서는 아젤리아의 단색 정장들이 삼색(三色)별로 놓여 있을 뿐이다.
‘……’
보기만 해도 숨이 턱하니 막혀오는 광경이지만, 마음만큼은 잔잔한 호수처럼 편안해진다.
며칠 전, 리지 때문에 검은색 정장 한 벌을 처분했었는데……
사실은 적색과 청색의 정장도 추가적으로 한 벌씩 버렸었다.
각 색깔의 정장은 4벌씩 마련되어져 있었던 지라, 그런 식으로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추후 리지가 정장을 배상하게 된 다면 나는 다시 한 번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젤리아에 들려 적색과 청색의 정장을 한 벌씩 주문해야 하는 비효율적 낭비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브뤼테인의 적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필시 길거리 바닥에 앉아 동냥이나 하고 있었을 운명.
어쩌면 그 동냥조차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적선으로 던져주는 동화가 3개라면, 오히려 역정을 낼 테니.
그리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는 상상에 헛웃음을 지으며 옷을 갈아입은 다음 시계를 보니 짧은 여유가 남아 있었기에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제 잠드는 게 늦었나……’
8시가 다되어 가는데,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여전히 잠들어 있는 유페미아의 머리맡에 앉아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아기처럼 몸을 웅크리고 새우잠을 자고 있는 터라, 등 뒤에 밀착해서 누운 뒤 가슴을 주무르기 제일 적당한 형태다.
……시엘.
“……”
그에 슬며시 상체를 기울이려는 순간, 잠꼬대로 중얼 거리는 유페미아의 자그마한 목소리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시엘, 그 이름을 어찌 내가 모를 수 있겠는가.
유페미아는 지금 꿈속에서, 나름의 도피처를 찾아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있는 중일까.
그것이 몹시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기에, 나는 유페미아의 목 부근을 더듬으며 반사적으로 한 마디를 읊조렸다.
“……혼나야겠구나. 유페미아.”
일종의 반발작용으로 인한, 본능에 가까운 말이었을 뿐인데.
“으응……”
유페미아는 갑작스레 악몽이라도 꾸는 듯이 인상을 서서히 찌푸리더니, 몸을 반듯이 피고서 두 손을 가슴 위로 다소곳하게 모았다.
“하……”
그 모습에, 나는 자연스레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불쾌감이 단박에 해소되는 상쾌함.
이미 유페미아의 무의식 속에는, 내가 길들였던 트리거가 선명히 각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스륵.
새액새액 내뱉는 숨소리를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는 배 부근에 손을 얹히고 살짝 힘을 주어 짓누른다.
“흑, 으응……”
그러자 가느다란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려왔다.
“힉……”
검지를 굽혀 배꼽을 살짝 눌렀을 때는, 놀란 듯한 신음 소리를 옅게 내뱉기도 했다.
그야 말로, 내 손길에 따라 연주 되는 사랑스러운 악기.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희롱을 하고 싶었으나……
이제는 시간이 없었다.
“다녀오마.”
오뚝한 콧잔등에 부드럽게 키스를 한 뒤, 몸을 일으켜 침실을 나와 정원에 대기 중인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유페미아의 가임기였던가.
주기는 계속 계산하고 있었기에, 틀릴 일이 없을 것이다.
‘원치 않게 밤을 새고, 강연도 있는 날이니 몸이 평소보다 짙은 피로를 호소 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이 시점을 하루라도 빼먹는 건 곤란했다.
유페미아가 나의 아이를 배는 시점이야말로, 완전히 종속되는 순간일 테니까.
‘헌데……’
나중에 태어난 아이에게 유페미아가 모유를 먹일 때, 자연스레 가슴 한쪽이 비게 될 터.
나는 과연, 그 광경을 보고도 참을 수가 있을까.
어쩌면 견디지 못하고 아이와 함께 유페미아의 무릎에 누워 단란히 가슴을 쪽쪽 빨지도 모를 일이다.
‘……’
아니다.
어차피 모유가 나오는 유모를 구하면 끝일 테니, 그런 식으로 체면을 구길 일은 없겠지.
쓸데없는 상념을 집어치우고서, 나는 편히 등을 기댔다.
햇살이 무척이나 따사로운 아침이었다.
* * * * *
‘아파라……’
아카데미의 본관, 4층에 위치한 자신의 교수실에 앉아 유리엘은 어깨 부근을 천천히 두드리다 가슴의 밑동을 손으로 부드럽게 주물럭거렸다.
오늘부터 생리──달거리를 시작했던 터라 그로인한 신체의 변화가 가져다주는 불편함이 달갑지가 않은 상태였다.
생리통은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이지만, 이상하게 이 기간에는 가슴이 부쩍 커져서 어깨가 심하게 걸리고 젖몸살도 크게 앓았다.
심지어 원래의 체형에 맞추어져 있던 복장은, 숨이 막힐 만큼 타이트하게 달라 붙어와 걸을 때 마다 적나라하게 출렁거리는 것이 신경이 쓰일 만큼 티가 난다.
조금만 작았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요원한 바람이겠지.
‘많이도 왔네……’
창밖의 주차장에는, 입학식에 비견될 만큼 수많은 마차들이 빼곡히 늘어서있었다.
특히, 황실의 마도 병단은……
궁정 마법사인 로즈웰 가(家)의 어르신과 함께 단체로 A 교육관의 강당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인다.
그에 유리엘은 감탄을 토해내면서도, 저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가 페르젠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페르젠, 그 재수 없는 남자가 정말로 마법의 구성식의 이해와 관련된 논문을 학회에 성공적으로 등록시켰다니.
심지어 도형이다.
아무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점에서, 길이를 가지는 선, 이후 넓이를 가지는 면, 부피를 가지는 입체……
이 상관관계만으로는 위계질서가 인정 되지 않아, 진작 폐기 되었던 개념이 아니었던가.
물론, 그것을 떠나 해당 개념의 논문을 한 달간 무료로 공개한다는 선택지 자체도 놀라웠다.
굳이 무료로 공개하지 않는 다 해도, 앞 다투어 돈을 지불하고 논문의 내용을 읽으려 들 텐데.
하기야 제국에 유통 되는 광물의 60%를 담당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가문이니, 그런 것쯤이야 푼돈으로 느껴지리라.
더군다나, 보통 이 정도로 완성된 마도 지식은 어떠한 형태로든 공유를 하지 않고 가문 내에서만 전수를 하는 비전(祕傳)으로 남겨두는 게 일반적인데 그러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심이 크다고 봐야 하는 건지.
‘브뤼테인은, 브뤼테인이라 이건가……’
인성에 모난 점은 있더라도, 그릇 만큼은 진짜인 것이다.
“하아……”
브뤼테인을 제외하면, 당신에게 남는 것이 뭐가 있냐고.
문득, 며칠 전에 했던 말이 뇌리에 떠올라 유리엘은 한숨을 푹 내쉬며 챙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정작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면, 더욱 초라해지는 게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으니까.
‘그 놈의 꺾이지 않을 법한, 오만한 자존심은 여전하네……’
언제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할지 모르는 늑대들이 주변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그 늑대들의 이빨이 더 날카로이 벼려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다는 듯……
외려 북돋아 주는 꼴이라니.
강풍 앞에서 굴하는 갈대처럼 살아갈 바에야, 견디지 못하고 꺾여버리는 나무처럼 살아가겠다……
아니, 애초에 그런 강풍에도 꺾이질 않을 거대한 고목이 되겠다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그 남자는.
“잘 났어……”
아무튼, 곧 9시가 되기에 유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참석하고 싶지 않으나, 마법사──그것도 원소 마도학의 길을 걷는 자로써 이 지식을 어찌 포기할 수 있겠나.
“아야……”
그리 교수실을 나와 걸음을 내딛다, 다시금 아려오는 젖몸살에 유리엘은 울상을 지으며 가슴을 문질렀다.
* * * * *
A 교육관에 위치한 거대한 강당.
흑마도학 강의를 듣는, 병결인 라우라를 제외한 13명의 학생들은 앞줄에 다소 곤히 앉아 있었지만……
뒤쪽에 자리 잡은 인사(人士)들 때문에 숨이 턱 하니 막혀오는 것만 같았다.
황실의 마도 병단 전체를 비롯해, 그들을 이끄는 로즈웰 가문의 어르신은 물론이거니와 나름대로 명성이 있는 수도 근처의 마법사들이 모두 이 자리에 모여 아직 주인공이 도착하지 않은 강단의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리지는……
‘아니야……’
신비주의와, 브뤼테인의 적자라는 것만으로 페르젠을 판단해 그를 향한 찬사를 쏟아내는 주변의 숙덕거림이 너무나 괴로웠다.
이번에 마도 학회에 제출한 논문, 그것만으로 그를 평가한다고 하면 모르겠으나……
‘도대체, 당신들이 그 사람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강의를 듣기 위한 자리가 아닌, 그의 거짓된 진가를 보기 위해 앉아 있는 극장의 관객이 된 것만 같아 리지는 버티지 못하고 휠체어를 붙들고 있는 시신을 사역해 강당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강당의 정문에서부터 이어지는 기다란 복도.
그곳을 지나면서도, 리지는 끊임없이……
페르젠을 향한 찬사를 입에 담아 올리는 타인들의 말을 귓가로 전해 들어야만 했다.
그럴 때 마다, 리지는 마음 같아서는 일일이 그들을 붙잡고 반박이라도 하듯 큰 소리로 말해 주고 싶었다.
그 남자는, 당신들이 아는 것과 다르게.
품격 있지도, 고결하지도 않은……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오물덩어리 일 뿐이라고.
‘못해……’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아니, 할 수야 있겠지.
다만, 뒷감당이 두려울 뿐이다.
공개적 자리에서 명예를 실추하고, 훼손시킨다는 건……
증명을 하지 못했을 때, 영지전을 걸어도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좋은 빌미──최고의 명분감이 되니까.
끼릭.
끼릭.
하지만 당장이라도 이 감정을 토해내지 못한다면, 정말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만 같았기에 리지는 A 교육관의 옥상으로 다급히 올라와 가로 막은 철문을 열었다.
“……”
화악 불어오는 따스한 봄바람이, 조금이나마 머릿결을 쓸어 넘기며 질식사 할 것만 같았던 숨통을 트이게 해준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마치 가면을 쓰고 무도회를 즐기는 것만 같았던 광경……
그 인위적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이라도 치듯 도착한 조용한 테라스는, 리지의 마음을 잔잔한 호수처럼 치유해주는 일종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하, 읍……”
그에 숨을 한 번 몰아 내쉰 뒤, 리지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발악이라도 하듯 크게 소리쳤다.
──그 쓰레기 같은 남자에 대해서, 당신들이 무얼 안다고 그딴 찬사를 쏟아 내는 거야!
울분으로 점칠 된, 한이 맺힌 속마음.
오늘 따라 그 남자가 짓밟았던 오른발이 아련하게 아파오는 것은 결코 환각통 따위가 아니겠지.
──그럴싸하게 위장된 겉만 보고, 속은 제대로 꿰뚫어 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저질스럽고 추악한…… 이면 속에 숨은 그 더러움을 당신들이 알기는 하는 거냐고!
극도로 흥분한 몸을 따라, 가녀린 어깨가 거칠게 들썩인다.
“알기는…… 하느냐, 말이야……”
하지만 이리 감정을 쏟아내는 것조차, 약해진 목은 감당하기가 버거웠는지 따끔따끔 거리며 아파왔다.
그에 리지는 괜스레 죄 없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억세게 움켜쥐고서, 화를 삭이기라도 하듯 숨을 가쁘게 몰아 내쉴 뿐이었다.
“누구……!”
그러나 그 순간, 코로 스며들어오는 은은한 연초 냄새에.
리지는 심장이 철렁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없다.
분명 아무도 보이지 않지만……
저쪽 반대쪽 모퉁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꺾여 날아드는 새하얀 연기가 희미하게 보인다.
“리지.”
그리고 동시에 들려오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한 남자의 목소리에……
“히, 끅!”
리지는 딸꾹질을 토해내며, 일순간 저릿해오는 아랫배의 움찔거림에 반사적으로 다리를 꼬옥 오므리고서는 사색이 되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연참을 하고 싶었는데……
못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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