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28화 (28/260)

EP.28 028─만월(滿月)이 지는 밤

“당신…… 수업 조교로 일을 하라고?”

2시쯤에 일어나, 같이 점심 식사를 하며 내뱉은 말에 유페미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어차피 할 게 없지 않나. 시간을 축 낼 거라면 이쪽이 나을 텐데. 돈도 나온다. 내 것이 아닌 오직 네 것인 재화가 생기는 거지.”

다음 주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행정 조교가 착실히 일을 한다면, 그 때쯤 일체형 책걸상을 맛본 학생들 사이로 유페미아를 향한 악의가 충분히 퍼졌을 터.

‘추가적 관건은……’

일을 못한다고 면박을 줘서 자존감을 떨어트리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녀가 실수한 일로 인해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 생겨 심리적 부채감을 안겨주는 게 나을까.

어찌 되었든 유페미아의 정신을 한층 더 꺾어 나갈 수 있는 선택지는 다양했다.

자신이 쓸모없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걸 자각할수록, 현실에 보다 편히 순응하고 다른 생각은 하지 않겠지.

“뭐를…… 하면 되는데?”

“내 업무의 보조 밖에 없다. 어려운 걸 시키지는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일부러 많이 시키지 않을 거라는 점은 빼먹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를 말해줘.”

“심부름. 출석체크. 사전 준비가 필요한 강의라면 미리 가서 준비를 해두기. 행정 조교에게 추가적인 일정의 전달. 수업 보조.”

“……”

많은 것 같아 보여도, 큰 어려움은 없어 보이기 때문일까?

유페미아는 고민 끝에, 나를 살짝 흘겨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덫이 없는 건 확인했지만, 정작 손에 넣은 먹이가 상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하는 순진함에 옅은 웃음이 나온다.

“다 먹었나.”

“응……”

“그러면 나갈 준비를 하지.”

“나간다니……? 어디로……?”

“수도 구경, 제대로 한 적은 없을 텐데.”

오랜만에 찾아온 평온한 시간이다.

신혼 분위기를 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

나와 함께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하기는 하겠지만, 무료함과 지루함이 슬슬 한계에 봉착했으리라 본다.

“……”

“이 침묵은 긍정으로 받아들이마. 위에 뭐라도 간단히 걸치도록. 밤이 되면 쌀쌀 할 테니.”

“이제 오후 3시가 되어갈 뿐이잖아.”

“수도를 즐기는 것이 고작 한두 시간 만에 끝날 것 같나.”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에 서있는 시녀들에게 가볍게 턱짓을 하고는 등을 돌렸다.

“정문에서 기다리마.”

추억에 명확한 정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1년을 되새겼을 때 명확히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면 그게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1년 365일 중 대부분의 시간을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보내는 게 인간이고, 그러한 시간은 뇌리에 기억으로조차 남겨지지 않으니까.

작년의 n월 n일을 기억해라고 묻는다면, 다수가 고개를 젓겠지.

하지만 그 중에서 명확히 되새길 수 있는 날이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추억이 되는 것이다.

형태가 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로 갈릴 뿐.

또각.

또각.

꽤 오랜 상념에 잠겨 있다, 들려오는 구두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노란색 원피스 위로 새하얀 로브를 걸친 유페미아가 보인다.

로브라고는 해도, 현대의 가디건에 가까운 형태.

“왜……?”

남자가 말없이 여인을 바라볼 때, 그 이유가 별 다른 게 있을까.

“가지.”

유페미아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

그에 그녀는 머뭇머뭇 거리며, 내 손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조심스레 자신의 손을 얹혀왔다.

어차피 거부한다 해도, 내가 억지로 마주 잡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좋은 학습 효과다.

“손, 안 뺄 테니까 힘 좀 풀어……”

깍지를 끼듯 마주 잡은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서 그런지 유페미아가 아픈 기색으로 내 팔뚝을 툭툭 때린다.

“미안하군.”

“뭐……?”

“왜 그리 놀라지?”

해바라기와 같은 유페미아의 금빛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당신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니까……”

“그런가……”

유페미아와 다르게, 나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은 채 편히 걸음을 내딛었다.

“마차, 타지 않아?”

“그래.”

“……”

내 단답에, 유페미아도 더는 말을 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조용히 내 걸음에 맞추어 올 뿐이다.

“여기는……”

그리 오랜 걸음이 멈추어 서는, 수도의 거대한 극장.

화려한 외관의 낯선 장소에, 유페미아는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조심히 구경을 나섰다.

그에 나는 구경 중인 유페미아를 내버려두고 표를 두 개 구매한 다음, 장난스레 극장 안으로 홀로 들어섰다.

“가, 같이…… 가!”

그러자 구두굽이 부러지지 않게, 나름 호다닥 뛰어오는 유페미아가 내 곁에 와서 스스로 손을 마주 잡아 온다.

괜스레 주눅이 드는 장소니, 긴장이 되어 이러는 거겠지.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가 이따금 벤치에 앉아 있는 엄마를 확인하는 것과 동일한 이치가 아닐까.

어찌되었든 밖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 좋든 싫든 내가 그녀의 등대인 것이리라.

“극장은 처음인가.”

“극을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야……”

“그래. 그러면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일반석이라면 미리 예약을 해놔야겠지만, 특별석은 값이 비싸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곧 시작하려는 모양이군.”

은은히 무대를 밝히던 야광석의 조명이 꺼진 상태.

빼곡히 들어찬 아래의 일반석과는 다르게, 특별석은 지나치게 널찍했던 터라 나와 유페미아는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단순 연극이 아니라, 뮤지컬에 가까운 건가?’

무대를 가려주던 커튼이 열리며, 듣기 좋은 음악 소리에 맞추어진 배우의 화성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는 유페미아와 다르게, 나는 편히 눈을 감고 귀만 기울였다.

무대의 구성 장치나 배경 같은 소품들이 괜스레 대칭이 어긋나 거슬리면 곤란했으니까.

‘퀼리티는, 제법 상당한데……’

무대 구성은 확인을 하지 않았지만, 귓가로 들려오는 배우들의 대사가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상황에 따라, 각자 확실한 감정 이입을 하고 있고 그것이 전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주제는 흔하디흔한 사랑이야기……

“저, 나쁜 새끼……”

“……”

여주인공이 악역에게 억지로 시집을 간 뒤, 그에게 학대를 받는 광경을 보며 유페미아가 낮게 읊조린다.

“다, 당신에게 한 말 아니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 다고.”

나는, 학대 같은 걸 한 적이 없을 텐데.

게다가 보는 이의 감정 이입을 돋기 위해, 악역 배우는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뚱뚱한 몸과 기름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일순간 나를 저 배우와 동일 선상에 놓았을 게 확실한 유페미아를 생각하니, 눈썹이 꿈틀 거리지만 억지로 인내했다.

그녀가 재미있게 보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니까.

그리고 그러한 유페미아의 반응을 보며, 나는 잠시 다른 상념에 깊게 잠겼다.

이곳에서 연극이란, 꽤 값어치 있는──정확히 말하자면 확실히 인기 있는 문화다.

그러면 여타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의 각본을 제공해 적잖은 수입을 거두어들일 수 있을까?

굳이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더라도, 햄릿과 맥베스 같은……

희곡을 잘 모르기는 해도, 다양한 문화 매체로 탈바꿈해 사랑 받은 작품들은 이서진의 기억 속에도 선명히 자리 잡고 있었다.

‘일단은 생각만 해둘까……’

나중에 가주인 제레미아에게 정말 크게 빚지는 일이 생긴다면 그 때 가서야,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한 번 시도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 눈을 감고, 잠시 흘려들었던 연극에 집중 한다.

이후……

‘결말은, 작은 반전조차 없는 깔끔한 해피엔딩이군……’

커튼콜이 내려앉는 무대 위로 쏟아지는 박수갈채.

“가지.”

환하게 웃고 있는 유페미아의 몸을 일으켜 극장을 나온다.

작품성 따위는 찾아보기 힘든, 흔히 말하는 B급 영화의 감성이라 해도 좋을 자극성만 가득한 연극이지만……

저런 것이 돈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 수도의 극장에 올랐겠지.

돈이 되지 않는 연극을 무대 위로 올릴 만큼, 극장의 관계자가 바보는 아닐 테니까.

“재밌었나.”

유페미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아쉬운 건, 그…… 귀족으로 설정했으면 더 편했을 텐데 굳지 그러지 않았다는 게 눈에 보였다는 점?”

“극단은 무대 위로 가능하면 귀족을 등장시키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한다. 의도치 않더라도 누군가의 풍자화가 되는 순간 그 극단의 미래는 곤두박질 칠 테니.”

희극 각본의 제공을 보류한건, 이 때문이기도 했다.

귀족의 권위란, 그 만큼 절대적인 것이었기에.

“……다행이네.”

살살 나를 긁는 건가.

방금 전의 무대에서 악역이 귀족이었다면, 혹여나 내가 그 극단을 엎어 버렸을까하는……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

됐다.

그런 것을 일일이 파고드는 너무 추한 게 아닌가 싶어 걸음을 돌리자 유페미아가 쫄래쫄래 따라온다.

“……어디가?”

처음과 다르게, 약간의 기대감이 묻어나있다.

현재 시각은 오후 5시 20분.

“저녁 식사나 하러 가지.”

“……”

원래는 티스베강의 나룻배에 올라 천천히 지는 노을을 구경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연극의 시간이 길었다.

“식사를 마치고 들릴 곳이 한 군데 더 있기는 하다. 그러니 그리 시무룩한 티를 내지마라. 애초에 그리 수도를 구경하고 싶었다면 시녀들을 대동하고 혼자 돌아다녔어도 충분하지 않았나.”

“내 돈이, 아니잖아……”

“네가 내 돈을 쓴다고 해서, 차후에 갚으라고 하지는 않는다.”

“당신…… 74년 전에 브뤼테인의 가주가 우리에게 지원해주었던 돈을 당장 갚아내라는 명목으로 영지전을 걸었단 사실을 잊었어?”

“……”

놀랍게도 잊고 있었다.

서로의 자아가 뒤섞이는 과정에서, 보잘 것 없는 기억들은 무의식 아래로 가라앉았으니까.

‘최소한의 명분만을 가지고 루에르그에 영지전을 걸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설마 그게……’

74년 전의 장부를 뒤져, 지원이라는 형태로 흘러 들어간 돈을 억지로 갚아 내라고 했던 것이었을 줄이야.

“저기가 좋겠군.”

“당신도 그런 식으로 말 돌리는 경우가 있네.”

조금 집요하다 싶은 유페미아의 말에 짜증이 났으나, 뭐라 내뱉을 구실이 없어서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처, 천천히…… 가! 구, 굽이 높아서 그리 빨리 걸으면……!”

손을 마주 잡고 있는 상태이기에, 나에게 딸려오듯 걸음을 내딛는 유페미아가 넘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으며 애걸복걸한다.

“……”

그제야 나는 걸음 속도를 늦춘 뒤, 유페미아와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가 편하게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의 시간은 오후 7시.

와인 한 병을 따서 서로 가벼운 음주를 즐겼더니,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식당 안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들릴 곳이 어디야.”

밤이 되니 공기가 쌀쌀해지기는 했으나, 와인 덕에 달아오른 체온이 그 추위를 적절히 몰아낸다.

“가보면 안다.”

어차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기에.

유페미아의 손을 붙잡고, 야광석이 담긴 가로등이 밝게 빛나며 어둠을 몰아내는 수도의 거리를 단란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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