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 027─만월(滿月)이 지는 밤
부스럭.
아침을 맞이한 당직실에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고작 잠자리가 바뀌었을 뿐인데도 무척이나 피곤하다.
“……”
엘리자베스 황녀 전하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시각은 오전 7시 40분.
어차피 당직 근무는 7시 까지니 이상할 것도 없다.
더군다나 해가 떠오르면 흉내쟁이의 능력에 다시 패널티가 생기니 굳이 내 곁에 있으려 하지 않으리라.
‘정리는 좀 해놓고 가지.’
소소한 복수인가.
널브러진 이불보를 반듯이 정리하고는 당직실을 나왔다.
“안녕하세요!”
“그래.”
일찍 일어나 돌아다니는 학생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기숙사를 나온 나는 본관 뒤쪽에 자리 잡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저택으로 가지 말고, 먼저 마도 학회로 가지.”
“알겠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대기 중인 부지런한 마부를 바라보며, 나는 마차에 올라타 편히 등을 기댔다.
마도 학회.
사실 학회라고는 해도, 정확히 따지자면 회원제 유료 도서관이라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논문을 등록하면, 다른 이가 값을 지불하고 그것을 열람했을 때 수익이 들어가는 구조니까.
당연히 해당 논문의 지식은 원작자의 동의 없이 외부로 발설하는 게 불가능하다.
명망 있는 마법사를 초청해 개인 교습을 받는 비용이 비싼 건 이 학회의 유무 때문이기도 했다.
“어서 오세요!”
서기의 인사말과 함께 살짝 퀴퀴하지만, 또 싫지만은 않은……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그윽이 풍겨온다.
집중하기 좋은, 고요하고 침착한 분위기.
“……”
“허허…… 요놈 보게.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뻣뻣이 고개를 들고 또렷이 쳐다보고 있어.”
그러나 그 분위기를 즐길 여유조차 없이, 나는 고개를 숙였다.
“강녕하셨습니까……”
“엎드려 절 받기가 따로 없어. 안 그래?”
황실의 궁정 마법사이자, 로즈웰 공작가의 어르신이며, 아폴리온 등급의 원소 마법사인…… 테오르 엘 빈하임 로즈웰.
“심술은 그만 부리시지요.”
로즈웰 공작가와는 어릴 때부터 교류가 잦았고, 페르젠은 그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자주 발로차서 넘어트리고는 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중증 강박 장애 때문.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쥔 채 걸음을 내딛은 만큼, 왼손으로도 지팡이를 쥐고 똑같이 걸음을 내딛어야 하는데 일반인이 그럴 리가 없으니 페르젠 입장에서는 어떠했겠는가.
“애송아. 이게 심술로 보이면 너는 글러 먹은 거다.”
“……”
“그 때 네가 뽑아버린 수염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
“그러게 작작 좀 얼굴에 문대시지 그랬습니까.”
지팡이가 아니라 수염 때문이었나.
“제가 원소 마법사가 아니었다는 걸 감사히 여기십시오. 만약 그랬다면 뽑는 게 아니라 태워먹었을 테니.”
어린 아이의 피부 위로, 거칠게 쓸어내려지는 수염의 촉감이란 괴로운 걸 넘어서서 고문이 따로 없는 셈.
처음으로 페르젠의 과거에 극히 공감하게 된다.
“자식을 보기도 전에 사별한 터라…… 아이들이 그걸 싫어하는 줄 모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
“치사하게 이러시깁니까?”
새로 산 옷을 입고 나온 친구에게, 정말 못 샀다고 말을 했더니 어머니가 사준 거라고 대답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
“끌끌. 그래서 네 놈이 학회에는 무슨 볼일이 있어서 왔더냐.”
“……논문 등록입니다.”
“네가?”
“안 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뭐…… 하지만 네 논문은 묻힐 게다. 때마침 나도 논문 등록을 하러 학회에 들렸으니까.”
“……”
“그래서 분류는 어느 쪽이냐?”
오늘 내일 하실 나이이기 때문인가.
물을 게 참 많으시다.
때문에 나는 그를 지나쳐, 서기 앞으로 걸어가 어젯밤 늦게까지 정리를 마쳤던 문서와 사본을 내밀었다.
마도 학회는 수도 말고도, 제국에 다섯 군데가 더 있다.
때문에 논문을 제출할 때는, 네 장의 사본도 지참해야 한다.
“분류는 구성식의 인식 쪽으로, 열람 여부는 한 달간 무료 공개로 하지. 또한…… 공개 시기는 다음 주 목요일로 정하겠다. 시각은 오후 2시쯤이 좋을 것 같군.”
“아, 알겠습니다!”
말을 더듬으며, 서기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내가 건네준 문서들을 조심스레 받아 든다.
오직 정확히 증명이 완료된 것만 논문으로 등록이 가능하며, 그 진실 여부의 파악을 위해 학회 내부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처음 등록을 할 때, 그러한 마력 서약을 맺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심장 부근에는, 날카로운 갈고리가 달린 쇠사슬 형태의 마력이 달라붙어 있다.
이 서약을 어길시, 해당 갈고리가 내 심장을 꿰뚫어 버리겠지.
때문에 눈앞의 서기가 침을 꼴깍 삼키며 손을 떠는 것이다.
증명이 완료된, 구성식의 인식과 관련된 논문.
그 값어치가 어떠하겠는가.
“뭐? 구성식의 인식이라고?”
“단, 다음 주 수요일. 아카데미의 A 교육관의 강당. 아침 9시부터 시행할 공개 강의에 참석할 수 있다면 하루 정도는 빠르게 논문의 내용을 원작자의 입에서 해설로 들을 수 있겠지.”
“그 말씀은……”
“6일 남았나. 이 6일의 시간 동안 수도에 도착할 수 있는 마법사 모두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각자의 거주지는 서기인 그대가 더 잘 알고 있겠지.”
얼마나 모일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분류가 분류이다 보니 상당수가 모이지 않을까.
보통 학회에 가입한 마법사들은, 어떤 마법사가 자신이 등록한 논문에 대해 자세한 해설을 위한 강연을 연다고 하면 거의 참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학회 내부와 다르게, 외부에서는 얼마든지 부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과장된 홍보로 자신의 논문을 돈 주고 읽게 만든 뒤, 짭짤한 수입을 거두어 가려는 짓은 과거에 상당히 많이 성행 했고……
지금에 이른 현재에서는, 자신의 논문 내용의 주제에 관해서만 간략히 적어 서신을 돌리는 게 보편적이다.
“그러면 수고 하도록.”
“네, 네……! 맡겨 주십시오!”
“야. 야……! 페르젠 꼬맹아! 구성식의 인식이라고 했느냐? 도대체 어떤 개념으로? 제발 할아비에게 말 좀 해봐라! 뻣뻣하게 그러지 말고! 이 거시기도 반듯할 놈아!”
“많이 추해지셨습니다……”
“흥. 언제 뒤질지 모르는데 격식이 알바냐?”
“굳이 축약하자면, 도형입니다.”
“도형? 그건 이미 실패한 개념 아닌가?”
그랬다.
이 세계에서도, 마법의 구성식을 인식하기 위한 개념으로 도형을 연구했던 적이 없는 건 아니다.
그 만큼 직관적인 것도 없었고, 기하학도 엄연히 수학의 한 종류였으니까.
하지만 도형이 가지는 길이 → 넓이 → 부피의 개념은 위계라기 보다는 마력의 용적량을 빗댈 수 있는 항목──한 마디로 측도일 뿐이다.
“거짓말이었으면 서약으로 고정된 심장 부근의 마력이, 제 목숨을 진작 명계로 인도했을 겁니다.”
“……”
“궁금하시면 다음 주 수요일, 제 강연을 들으러 오십시오. 질문을 하실 때는 반드시 거수를 하셔야 합니다. 어르신이더라도 예외는 없으니까.”
가만히 서있는 테오르에게 짧은 목례를 취하고서, 나는 학회를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저택으로 돌아가지.”
“예!”
피곤하다.
얼른 돌아가서 잠을 자고 싶었다.
유페미아의 온기가 그리워진다.
* * * * *
정원의 화단, 그곳의 의자에 앉아 있는 유페미아는 저택으로 도착한 꽤 많은 양의 서신을 뜯어 읽었다.
죄다 자신을 다과회에 초청하고 싶다는 내용.
‘가서 뭐하겠어……’
의미 없으리라.
자신은 페르젠의 부인도 아니고, 그저 씨받이일 뿐.
참석해서 망신살이 뻗치지 않으면 다행일 터.
여인이기에, 보이지 않는 비수를 언어 속에 감춰 상대방을 얼마나 잔혹이 찔러댈 수 있는지 유페미아는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그는 브뤼테인의 차남.
그런 그를 남편으로 둔 자신을, 상당히 시기하고 질투할 여인들은 많이 있을 것이다.
같이 지내보면, 그럴 수가 없다는 걸 알겠지만……
“주인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아……”
정문을 통과해 들어서는 마차를 보며, 곁에 있는 시녀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 알려준다.
얼른 일어나서 맞이하러 가라는, 무언의 압박과 함께.
“흥……”
하지만 유페미아는 꼿꼿이 제자리를 고수했다.
곧 이어 마차에서 내린 페르젠이 저벅저벅 정원을 걷다 자신을 발견하고는 방향을 튼다.
“……”
괜히 고개를 숙이면 지는 것 같아, 다가오는 그를 또렷이 응시했지만 결국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유페미아는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시선을 밑으로 떨구고 말았다.
“다녀왔다.”
“어서…… 와.”
“다과회 초청인가? 참석하지 그러나.”
“됐어. 가봤자 좋은 꼴은 못 볼 텐데.”
“마음에 안 들면 뒤집어엎어도 된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충분히 뒷감당을 할 수 있으니.”
“됐어. 나를 미친년으로 만들 생각이야?”
“할 게 없으면 그만 일어나라. 침실로 가지.”
“싫, 은데……”
“끌려가는 것 보다는 제 발로 걷는 게 낫지 않나.”
“……”
자신의 의견 따위는 어차피 들어주지 않는 시녀들이지만, 그래도 그녀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기는 싫었기에 유페미아는 얌전히 몸을 일으켜 페르젠의 곁에 섰다.
따사로운 봄 날씨에 어울리는 노란색 원피스.
그 때문일까, 페르젠은 자신을 쫄래쫄래 따라오는 유페미아가 문득 병아리 같다고 생각했다.
“뭐……”
“아니다. 들어가지.”
“앗……”
침실로 들어선 페르젠은, 멀뚱멀뚱 서있는 유페미아의 등을 밀어 곧장 침대로 눕히고서는 옷을 갈아 입지도 않은 채 곁에 달라 붙어왔다.
“자고, 온 거 아니었어?”
“일하는 곳에서 자봤자, 얼마나 편히 잠을 자겠나.”
피로함이 잔뜩 내려 깔린 목소리.
뒷머리를 들추어낸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고른 숨소리를 내뱉기만 하는 그가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한다.
언제나처럼 굵은 팔뚝이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커다란 손은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고 있다.
“……”
어젯밤은 분명, 공허할 정도로 넓기 만한 공간이었는데.
그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비좁게 느껴진다.
그의 존재감이 큰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존재감이 유독 작은 것일까.
자그마한 촛불을 집어 삼키는 거대한 화마처럼, 그는 자신을 품속으로 가두듯 끌어안은 채 억지로 온기를 전해주었다.
따스하기는 했다.
지독하리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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