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 026─당직
“으음……”
오후 7시 40분.
기숙사에 배정된 자신의 방에서 목욕을 한 뒤, 가벼운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은 라우라는 책상에 앉아 페르젠이 내주었던 과제를 성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전생도, 현생도 여인이었던지라.
여성들이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겪어볼 일을 목록에 나열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남자……
‘아니, 남자뿐만이 아니지.’
귀족이 아닐 때, 한 마디로 평민 여성들이기에 공통적으로 한번쯤은 겪어 볼 일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남자도 같을 터.
때문에 라우라는 나중에 수도에 있는 용병 협회에 들려 의뢰를 넣을 예정이었다.
전쟁이나, 영지전이 발발했을 때 징집되어 나서게 되는 건 대부분 평민들일 테니까.
‘그리고 직업 또한 세분화 시키면……’
아마 해당 과제에 대해 만점을 받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우라의 현 목표는, 다시금 페르젠과 승부를 벌여 자신의 전생의 육체를 되찾아 오는 것.
“후……”
잠시 뻐근해진 어깨를 매만져주며 기지개를 펴는 라우라는 문득 눈에 들어오는 달력을 확인하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생일, 온전히 17세가 되는 날.
그 날이 머지않았다.
‘나는, 더 이상 제노바의 피를 잇고 있지 않아.’
그 점을 되새기며, 한 번 더 집중을 하려던 찰나……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들린다.
딱히, 친분을 쌓아둔 사람은 없을 텐데.
이 시각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의아함을 품고 몸을 일으킨 라우라는 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 네……”
낯설지만, 처음 보는 건 아니다.
교양 강의, 문화 예술의 이해──피아노포르테를 함께 듣는 영애들이었기에.
“무, 무슨…… 일로?”
“저희에게 피, 피아노를 가르쳐 주시지 않겠어요?”
“네?”
“마, 말 그대로에요……”
로젠베르크, 예술과 문화의 성지.
미술, 음악, 조각을 비롯한 모든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꿈을 키워 내며 그들을 동경하는 이들이 이끌려 모이는 곳.
당연히 그런 로젠베르크의 영애인 라우라도.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특히 음악적 쪽으로 성취가 높았다.
“……”
때문에 이들의 부탁이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다.
현대면 모르겠으나, 이 시점에서 피아노는 역사가 짧은 악기.
하지만 역사가 짧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인기를 가지는 악기.
그래서 다른 악기들에 비해, 피아노의 값어치는 무척이나 높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가르칠 수 있는 사람도 적다는 뜻이다.
평민들이 알뜰살뜰 돈을 모아, 적당한 품질로 구매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에.
이것은 귀족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귀족이라고 꼭 돈이 많은 건 아니었으니까.
피아노를 구매하여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을 초빙해 교습을 받는 다는 건, 적지 않은 사치.
그런 점 때문에, 문화 예술의 이해──피아노포르테는 교양 과목 중에서도 압도적인 경쟁비율을 자랑했다.
수강 인원 30명에게 교육 시간 마다 마음대로 칠 수 있는 피아노가 마련되는 건 물론이거니와, 해당 30명은 기숙사의 음악실에 배치된 피아노를 언제든지 연습용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
학과 사무실의 행정 조교가, 그 날 자살하지 않은 게 용할 지경.
“좋…… 아요.”
“정말요?”
“네.”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그것도 단순히 기초만 올바르게 잡아주는 것뿐이라면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될 테니 라우라는 거부하지 않고 승낙했다.
“잠시…… 만요. 거, 걸칠 것을 조, 조금……”
“네! 기다릴게요.”
“얼른 다녀오세요!”
꺄아, 꺄아 거리는.
소녀틱한 기쁨의 비명을 뒤로하고, 라우라는 가벼운 외투를 걸친 뒤 그녀들과 함께 A 기숙사에 있는 음악실로 올라갔다.
“일단…… 하, 한 번 각자 쳐, 쳐보시…… 겠어요?”
최대한 느리게, 말을 더듬지 않도록.
나근나근 말하는 라우라.
그리고 세 명의 영애들은, 라우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피아노의 건반을 건드렸다.
“아, 안 돼요. 어, 엄지는 꼭……”
아무런 지식 없이, 피아노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으로 건반을 치려 한다.
왜냐하면 엄지까지 이용하는 게, 너무 낯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습관이 굳어지면 자체적으로 스스로에게 패널티를 부여하는 꼴이 되며, 남성에 비해 체력이 적은 여성은 한 곡을 완주하는 것만으로도 더욱 지치리라.
때문에 라우라는 그녀들을 차근차근 교정해주며, 시간을 보냈고.
어느덧 10시에 가까워지던 때……
“연주는 거기까지 하도록.”
학생들을 각자의 방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페르젠이 나타났다.
“아……”
라우라를 비롯한 세 명의 영애들은, 벌써 시간이 이리 되었나 싶어 우물쭈물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도 9시에 시작하는 강의가 있을 텐데…… 더하고 싶다면 12시 까지는 허락해줄 수 있다. 그 이상은 혹여나 너희들이 지각이라도 하게 된다면 나한테 쓴 소리가 날아 올 테니 그럴 수 없고.”
“아! 그, 그러시면……!”
환하게 웃는 세 영애들이, 페르젠에게 졸졸 달라붙어 12시까지 음악실을 사용해도 된다는 허가증을 라우라의 몫까지 받아낸다.
“페, 페르젠 교수님도 피아노를 좋아 하시나요?”
브뤼테인의 차남이자,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
그런 페르젠이 자신에게 상냥함을 베풀어주자, 세 영애들은 조금 더 살갑게 굴며 페르젠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니. 나는 피아노를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최악의 악기에 속하는 편이지.”
“아……”
그러나 흘러나온 그의 대답에, 세 영애들은 어색하게 물러났다.
페르젠이, 피아노를 싫어하는 이유.
그래, 그것은 별 게 없었다.
이서진이 살던 현대의 피아노는 건반의 수가 88개였지만, 여기의 피아노는 건반수가 73개.
그 때문에 페르젠에게 있어서 피아노는 최악의 악기다.
하지만 귀족, 그것도 브뤼테인의 적자로서 유행에 뒤쳐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페르젠은 피아노를 연습할 때 건반을 하나 억지로 떼어내고 쳤었다.
“여, 역사가! 짜, 짧은 악기라서…… 그, 그러시는 거, 건가요?”
“그것과는 연관이 없다.”
“피, 피아노는…… 여, 연주를 해, 해보기 전에는……”
“라우라. 설마 내가 연주를 해보지 않았을 것 같나.”
“……”
이사벨일 때, 저주──만월의 괴벽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이따금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골랐던 게 바로 피아노와 연초였다.
더군다나 현생은 문화와 예술의 성지, 로젠베르크의 딸.
그에 걸맞게 음악적 재능도 상당한 터라,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자주 연주해왔기에 그녀에게 있어서 피아노라는 악기는 상당한 애착이 서려있는 물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라우라는, 건방질 수도 있지만.
감히 페르젠에게, 도발하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 그러면 저, 저희에게 한 곡만 여, 연주해주세요.”
“……”
“모, 못하시면 어, 어쩔 수 없고요……”
“라, 라우라……!”
라우라 곁에선 세 영애들은 사색이 되었지만, 오히려 당사자인 페르젠은 옅게 웃었다.
“그래. 한곡을 연주해 줄 테니, 그 연주가 끝나면 라우라 너는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줘야겠다.”
“무, 물론이에요.”
내심 조그마한 후회가 들었지만, 라우라는 괘념치 않고서 반듯이 앉아 페르젠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걸 보여줘도 괜찮겠구나.”
왼손의 반지를 어루만지며, 아공간을 열어 이사벨의 관을 내려둔 페르젠은 곧 이어 그녀를 사역해 자신의 곁에 앉혔다.
“자율 통제에 능숙해지는 게 어떤 건지, 거기서 지켜보도록.”
고작 한 곡을 연주하는 것뿐이라면, 73개의 건반이 거슬린다는 강박의 발작 정도는 충분히 억누를 수 있었다.
게다가 페르젠뿐만이 아니라, 뒤섞인 자아──이서진도 중학교 까지 피아노 학원에 다닌 전적이 있는 터라 연주 자체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작금의 페르젠이 연주할 곡 또한 이서진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악보, 화이트 아웃.
곧 이어 심호흡을 마친 페르젠이 연주를 시작한다.
“……”
시작은, 상당히 잔잔한 음의 조화였던지라 듣는 입장에서 무덤덤할 정도였다.
“……!”
하지만 변곡점은 얼마 가지 않았다.
길게 이어지는 작은 음이 여운을 남기고,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가파르게 치고 올라가는 음량.
상당한 속주였던 터라, 귀를 기울이고 있는 라우라의 뇌리에 연상되는 건 갑작스런 소나기와 폭설이었다.
음이 가진 분위기 자체도 적잖게 긴박했기에, 그 소나기와 폭설을 피해 이리저리 달아다는 사람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허나 얼마 가지 않아, 다시금 음은 느릿하고 잔잔해졌다.
무미건조했던 처음과 다르게, 명확한 좌절과 슬픔의 음색.
이것은 갑작스레 몰아치는 소나기, 그래 소나기 보다는 폭설에 가까울 것 같았다.
끝없이 내리는 눈을 피할 장소를 찾는, 그러한 헤메임을 비유하고 있는 걸까?
동시에 음울한 음색의 음량이 점차 높아지며, 조금 전의 가파른 속주가 다시 한 번 찾아온다.
그리고 그 가파른, 아니 가파르다 못해 경이로울 정도의 속주는 듣는 이가 호흡조차 고를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듯 세차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
얌전히 페르젠의 연주를 듣고 있는 라우라는, 곧바로 그의 연주가 무척이나 감정적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음악은 당연히 감정적일 수밖에 없지만, 이것은 마치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것만 같은……
그래, 그저 음악이라는 것으로 잘 포장되어 있을 뿐인.
그의 처절한 내면의 배설.
‘……’
라우라도, 아니 전생의 이사벨도.
작금의 페르젠과 동일한 연주를 했었다.
그 당시의 그녀에게 있어서 피아노는 현실의 도피처였고, 감정 쓰레기통이자 위안거리였으니까.
이 곡은 아마 그의 자작(自作)이리라.
로젠베르크 어디에서도 들어 본적 없는, 오직 그만의 음악.
이내 곡이 서서히 끝나가는 걸 알리듯, 음이 낮아진다.
사납게 내리는 눈에 파묻혀, 결국 도피처를 찾지 못한 사람이 서서히 죽어 가듯이……
눈앞이 새하얘지는 듯 했다.
말 그대로 화이트 아웃(White out).
곧 이어 이사벨의 시신을 자율 통제해 함께 건반을 누르던 그의 연주가 끝이 나고, 세 영애들은 감탄을 토해냈다.
피아노에 대한 지식이 얕은 그녀들이니, 단순히 페르젠이 선보인 깔끔하고 압도적인 속주에 경이로움을 내뱉는 것이다.
하지만 라우라는 달랐다.
그녀는 조금 더, 방금 전의 곡에 내재 된.
페르젠의 심상에 공감했다.
그 처절함이, 슬픔이, 괴로움이……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하며.
“라우라 드 샤를 로젠베르크.”
곧 이어 페르젠이 자신을 부른다.
그에 상념에서 깨어난 라우라는 몸을 움찔했다.
앉아 있는 상태라 거의 고개를 뒤로 젖혀야 할 만큼 높다란 그가, 자신의 곁으로 와서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겠지.”
“네……”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걸까.
굽어보는 적안이 너무 섬뜩해, 라우라는 주먹을 꼬옥 쥐었다.
……멍멍이네 꿀꿀이는 멍멍해도 꿀꿀하고 꿀꿀이네 멍멍이는 꿀꿀해도 멍멍하다.
“네?”
고개를 숙인 그가 자신에게 속삭이는 기다란 한 문장.
“말해보도록.”
“……”
“못 외웠으면 다시 말해주지.”
재촉 보다는, 강요이자 명령에 가까운 그의 말에.
라우라는 세 영애들을 힐끔 쳐다보고서는 페르젠의 옷깃.
정확히는 넥타이를 붙들고…… 목덜미 근처에 입가를 가져다댄 뒤 나근나근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머, 머, 멍, 멍이네 꾸, 꿀, 꿀꿀이는…………”
그러나 말을 이어 나갈수록, 목소리의 성량은 점차 줄어들었다.
자신이 말더듬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굳이 이런 걸 시키는 이유는 고약한 장난이자 단순한 벌이리라.
“방금 내가 알려준 말을 일주일 마다 와서 검사 받도록. 한 번도 더듬지 않고 이어 말한다면 끝난 걸로 하지.”
“…………!”
정신 연령에 어울리지 않게, 라우라는 그만.
정말로 잔뜩 볼을 부풀리고서 페르젠을 매섭게 쏘아봤다.
하지만 페르젠은 벌써 이사벨의 시신을 관에 넣고 아공간으로 회수한 뒤 음악실을 떠나가고 있었다.
“……”
그리고 페르젠의 연주로 이리저리 떠드는 세 영애들과 다르게, 라우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머, 멍, 멍, 멍멍…… 이네……”
글렀다.
첫 음절부터 이리 더듬어서야, 언제 그 기나긴 문장을 더듬지 않고 깔끔히 완주 해낼 수 있겠는가.
“머, 머, 멍멍……”
마치 개 같다.
강아지가 된 기분이었다.
“마, 망할 놈……”
기어코 얼굴을 잔뜩 붉힌 라우라는, 이곳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버린 페르젠을 향해 귀여운 욕설을 내뱉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에게는 너무 가혹한 난이도.
때문에 라우라는 차라리, 방금 전 그의 연주를 악보로 옮겨 적은 뒤 로젠베르크로 보내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어떤 명예, 운이 좋으면 한발 더 나아가.
예술의 신에게 축복을 받게 해줄 수 있다면……
“머, 머, 멍, 멍이네…… 꾸, 꾸, 꿀꿀…… 이는……”
이 형벌에 가까운 벌을 취소해주지 않을까?
라우라는 제발 그리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곡의 모티브는 O2JAM의 End Time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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