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24화 (24/260)

EP.24 024─당직

“끝났습니다.”

“……”

그 말에 제 1 황녀 엘리자베스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대로 인 것 같다만……”

“낮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해가 떠있는 시간 동안 흉내쟁이의 능력을 빌려 바꾼 겉모습은 거울이나 유리에 비추어졌을 때 본모습이 보이니까요.”

“……”

황실 소속의 흑마법사, 유피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좀처럼 못 믿겠다는 눈초리를 보냈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직접적으로 흉내쟁이를 강림시켜서 능력을 사용하게 하면 해당 제약이 없으나, 어차피 당직을 서는 동안은 밤이니……”

“구구절절 말을 하지 않아도 되니라.”

“결코 재물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족을 붙일수록 추해진다는 걸 모르는 게냐……”

한숨을 내쉬며 엘리자베스는 총장실에서 유피르를 내보냈다.

명계의 1층, 그곳에 서식하는 괴이──흉내쟁이의 능력을 빌려 엘리자베스가 바꾼 겉모습은 오늘 밤 페르젠과 함께 당직을 서기로 예정되어 있던 교수 일레이나다.

그녀의 가문은 진즉 제 2 황자를 지지하고 있었고, 현 황실이 중앙집권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반기를 들 마음이 없는 곳으로 판정되어 있는 친 황실파.

때문에 그녀와 접촉해, 황녀 자신이 오늘 밤 대신 당직을 서겠다는 의견을 전달한 뒤 회유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승낙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으나 그런 것은 캐묻지 않는 게 예의이자 도리.

‘오늘은 유독 해가 빨리 지는 걸……’

오후 5시.

붉게 내려 깔린 석양조차 어둠에 서서히 집어 삼켜지기 시작하는 창밖을 바라보며, 일레이나의 겉모습을 뒤집어쓴 엘리자베스는 총장실을 나섰다.

어차피 10 ~ 20분 뒤에는, 해가 완전히 질 테니 상관없으리라.

‘그 보다……’

중앙집권──황실의 힘이 지나치게 강력해지는 걸 원치 않는 귀족들은 필히 존재할 것이다.

초기 단계에서 억누르지 못한다면, 차후 자신들의 직위는 그저 명예직에 지나지 않게 될 수도 있으니까.

조세권을 모두 몰수하고, 영지의 관리는 중앙에서 차출한 관리들이 시행하는……

물론, 그런 미래는 까마득한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하리라.

현재의 황실도 거기까지 내다보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오랜 세월 갈등을 겪어 오던 엘마르크 제국이 숙원이라 해도 좋을──고질적이었던 남동쪽의 우환을 제거한터라 에르네스도 변화와 준비를 꾀해야 했다.

작금의 황실을 견제하는 가장 간단한 수단은, 본래 똬리를 틀고 있던 사자를 억누르기 위해 다른 곳의 사자를 들여오는 것.

그런 점에서 엘리자베스의, 상대방의 속내를 엿들을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은 황실 입장에서 매우 효과적인 견제 수단이다.

당직을 서는 교수의 모습을 뒤집어 쓴 것도, 황녀의 모습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보다는 훨씬 잡음 없는 속내를 엿들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브뤼테인의 충성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역사조차 기억하는 자가 없다면 소실되기 마련이다.

필멸이 가득한 세상에서, 영원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리 강의가 끝나고 활발히 돌아다니는 학생들을 지켜보며, 엘리자베스는 A 기숙사의 당직실로 들어섰다.

당직 근무를 시작하는 시각은 오후 7시.

남은 시간 동안, 잠시 눈이라도 붙일 생각에 엘리자베스는 편하게 흔들의자에 앉아 근처의 담요를 끌어와 덮었다.

삐걱.

앞뒤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율동감이, 졸음을 몰고 온다.

* * * * *

‘왕도라……’

오후 4시쯤, 저택의 시녀가 직접 찾아와 건네주었던 제레미아의 서신을 읽고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왜냐하면 시엘 미드포드가, 제국의 국경을 지나 왕도로 들어서는 걸 목격했다는 제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목격자는 브뤼테인에서 운영하고 있는 상단의 상단주.

시엘 미드포드의 초상화를 보여줬을 때, 자신 있게 확신은 못한다고 했으니 오보일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시엘 미드포드가 에르네스 제국 내에서 자리를 잡고 힘을 키운 뒤 알프레드와 접선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닐 테니까.

하지만 왕도라면 말이 달라진다.

에르네스 제국과 엘마르크 제국 사이에 있는 세 개의 왕국.

이 세 개의 왕국은, 두 제국의 체스판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 제국이 지원하는 왕자가 왕위에 많이 오르느냐, 그것으로 간접적인 힘겨루기를 하는 곳이기에.

듣기로는 과거 에르네스 제국이 지원해 왕위에 올려두었던 두 왕국의 왕이, 슬슬 왕위에서 물러날 시점이라고 들었다.

더불어 엘마르크 제국이 남동쪽의 우환을 제거하였으니,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양상이 되겠지.

또한, 이것은 제 1 황자와 제 2 황자 중에서 누가 황태자가 되는 것인지를 가리는 황위 쟁탈전이 되기도 하리라.

난세(亂世).

아무것도 없는 자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최적의 환경.

게임으로 치자면 아마 이것이, 주인공의 성장을 가속시켜주는 일종의 메인 퀘스트가 아닐까.

브뤼테인은 오직 황제에게만 충성한다는 오래된 전통이 있기에 아마 본래의 페르젠이었다면,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았으리라.

개연성도 납득이 간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성도 브뤼테인이 아닌 루에르그.

명분은…… 충분했다.

‘시간이……’

벌써 5시에 가까워진다.

저녁 식사를 어찌 해야 할까 고민하다, 간단히 빵을 사서 A 기숙사의 당직실로 걸음을 옮겼다.

거기서 마저 이 생각을 정리하는 게 편할 것 같았기에.

“……”

그러나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이름은 모르겠다.

아마 나와 함께 당직을 서게 될 교수겠지.

깊게 잠들어 있는 듯한데, 괜히 깨울 필요는 없다 싶어 빵이 든 바구니를 근처에 내려두고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그리고는 문 앞에 붙어 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돈하고 비켜서는데……

“이건……”

거울에 비친, 자고 있는 교수의 모습이 다르다.

직접 바라볼 때는 청단발이었으나, 거울 속은 기다란 금발을 풍성하게 늘어트린──엘리자베스 황녀 전하가 비추어지고 있었다.

흑마법사인 만큼, 특히 명계의 1층에 서식하는 괴이라면 그 정보를 속속히 꿰고 있었기에 흉내쟁이의 능력만을 빌려 타인의 겉모습을 덮어썼다는 사실을 빠르게 눈치 챘다.

문제는……

‘왜 이런 짓을?’

떠오르는 가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 나의 성은 루에르그니, 혹여나 내가 현 정세에 참여를 할 건지 말 건지를 캐묻기 위함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중요한 사실은, 굳이 황실의 핏줄 앞이 아니더라도 이실직고 하지 않을 것이다.

지혜의 신에게 축복을 받은 그녀이니, 당연히 이 정도 상식쯤은 염두에 두고 있을 텐데……

단순히 한 번 찔러보려는 생각인가?

모르겠다.

일단, 그녀가 깨어나고 나면 좋든 싫든 품고 있던 의중을 내뱉을 테니 얌전히 빵이나 먹기로 했다.

그리하여 오후 6시 25분.

어둑한 밤이 내려 깔리고, 야광석이 환하게 빛이 나며 방안을 비추어 내린다.

거울 속에 비춰지는 엘리자베스 황녀의 모습도, 흉내쟁이의 능력만을 빌렸을 때 받는 패널티가 사라져 덮어쓴 겉모습이 온전히 비추어지고 있었다.

“으음……”

부스럭거리며, 제 1 황녀가 잠에서 깨어난다.

“아……”

“반갑군.”

“……”

“잠이 아직 덜 깼나?”

“그, 언제 오셨나요. 페르젠 교수님……?”

“6시 정도였던가.”

차분히 연기에 어울려주며, 나는 태연히 거짓말을 내뱉었다.

“그렇군요……”

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담요를 곱게 접어 내려두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어색하게 나를 바라본다.

“할 말이라도 있는 눈초리군.”

“……”

“말해라. 그리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는 게 더욱 거슬린다.”

저 또한 어느 정도는 연기일터, 나는 편히 등을 떠밀어주었다.

그러자 내 시선에 압도라도 된 듯이, 애꿎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이는 망설임을 선보이는데……

“……”

정말 좆같은 디자인의 목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대칭 강박이 유독 중증이기는 하지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어느 정도의 강박은 있다.

오른손잡이 화가가 어색하게 왼손으로 붓을 들고 색을 칠해 낸 것만 같은, 여러 보석이 괴기하게 어우러진 목걸이.

저럴 거면 왜 겉모습만 타인의 것으로 뒤집어썼을까.

하기야 나는 엘리자베스 황녀 전하라는 걸 알고 있으니, 이리 연관을 지을 수 있는 건가.

차라리 잘 되었다.

이참에 그녀의 심미관을 뜯어 고쳐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 * * * *

“……리비에르 가(家)의 장녀, 일레이나로서 루에르그 백작님에게 감히 여쭙겠습니다. 브뤼테인은 현 시국에 언제나처럼 과거를 그대로 이어나가실 생각인가요?”

“리비에르의 현 가주가 나에게 의향을 떠보라고 시켰는가.”

페르젠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의 독단입니다.”

“야망이 넘치는 여자군. 그러한 야망을 겉으로 드러내도 될 만큼 능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

“브뤼테인의 역사는 그대가 의심할 정도로 얄팍하지 않다. 방금 말은 못들은 걸로 해주지. 주제넘은 경솔한 발언임을 자각하도록.”

“그런가요……”

페르젠의 이러한 반응은 예상했던 바였다.

그렇기에 엘리자베스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세계의 소리가 원천 차단되고,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지기 시작하더니 곧 이어 페르젠의 속내가 읽혀든다.

「 1초. 」

“그건 그렇고, 일레이나 교수.”

──엘리자베스 황녀는, 자신의 심미관이 독창적이거나 개성적이다라는 수준을 넘어서 괴기하다는 걸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 2초. 」

“그 목걸이……”

──애초에 사교계에서 단, 한 번도 유행을 이끌지 못하셨지 않나? 이만큼 확실한 반증도 없을 텐데.

「 3초. 」

“정말 역겹군.”

──이참에 충격 요법이 제대로 먹혀들기를 바라야지.

3초간 속내를 꿰뚫어보는 시간이 지난다.

그리고 잠시 붕 뜨듯 가라앉았던 정신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린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잔뜩 붉히며 두 손을 파르르 떨었다.

사교계에서도 단 한 번도 유행을 이끌어 보지 못한 황녀.

그 불운의 명칭은,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아도 엘리자베스가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는 역린이었기 때문에.

한편, 페르젠은 의외로 아무런 반응을 해오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의아함을 품으며 몸을 일으켰다.

현 시간은 오후 7시.

당직 근무를 시작할 시간이다.

타악!

페르젠이 먼저 문을 닫고 나간다.

그리고 홀로 당직실에 남은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 무례하다……”

목소리에 유독 힘이 없는 건 무려 브뤼테인의 적자에게 저런 쓴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핵심은 자신이 황녀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저런 말을 내뱉었다는 점이다.

“예쁘기만 하지 않느냐……”

어찌 공감해주는 사람이 이리 한명도 없을까.

‘그 보다, 결국 6시에 온 것도 거짓말……’

아마 자신이 잠들고 난 직후, 당직실에 들어섰으리라.

그 때는 해가 완전히 저물기 직전이었을 테니, 흉내쟁이의 패널티가 남아 있는 상태였을 터.

입이 가벼운 남자로 보이지는 않으니, 제 1 황녀가 타인의 겉모습을 뒤집어쓰고 현 정세에 관한 의중을 캐물으려 다닌다는 소문을 퍼트리지는……

‘않겠지.’

애초에 그런 소문이 퍼진다면, 원흉으로 자신이 지목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능력에 관해서는 알 도리가 없을 테니, 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실제로 자신이 황녀라는 걸 눈치 챘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젠이 개인적으로 꾸민 일은 자신의 심미관을 폄하하는 것뿐이었으니까.

‘……참으로, 뻔뻔하기 그지 없는 남자.’

한숨을 내쉬며, 엘리자베스는 문 앞의 거울로 다가갔다.

“……”

그리고는 얌전히 목걸이를 벗은 뒤,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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