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 022─페르젠 교수
유페미아의 하루 일과는 무료함 그 자체다.
그도 그럴 게, 수도에는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으며 무언가를 즐기려 해도 그 돈은 자신의 것이 아닌 페르젠의 것.
때문에 아침 일어나 목욕 시중을 받고 식사를 한 뒤, 책을 읽거나 저택의 정원을 산책하는 게 최선의 유희다.
그리 밤이 되어 페르젠이 퇴근할 때가 되면, 시녀들은 자신을 데려가 향유를 풀어낸 탕 안에 몸을 담그게 하고 정성스레 씻긴 후 침실에 집어 넣는다.
수도에 도착한지 이제 이틀째지만, 이 반복적인 챗바퀴가 영원히 굴러 갈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옷은, 또 왜……’
얕은 외투 아래로, 안이 훤히 비치는 하얀색 네글리제를 입고 있는 유페미아는 이불을 끌어 당겼다.
이딴 걸 입고 싶지 않다고 소소하게 반항을 해보았지만, 나이 먹은 중년의 시녀들은 가차없이 자신의 의견을 묵살했다.
“……”
문제라도 다시 풀어 볼까.
두 번째 문제부터는 머리가 아파와 손을 대지 않았는데, 그래도 문제를 풀면 그는 자신의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고 약속을 했으니……
‘작은 가게라도 하나 차려 달라고 하면……’
무얼 해야하는지, 무얼 하고 싶은지도.
주체적인 목적성을 잃어버린 상태지만, 그래도 자금을 조금씩 마련해두면 언젠가 도움은 되지 않을까.
씀씀이에 있어서 만큼은 크다 못해 헤픈 그였으니, 수도에 가게 하나를 차려주는 건 일도 아니리라.
딸칵.
움찔!
저녁 6시.
퇴근하고 저택으로 돌아온 그가, 목욕을 마치고 편한 차림으로 방 안에 들어선다.
헌데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와인 한병과 잔을 들고 있다.
“춥지는 않을 텐데. 이불은 왜 그리 끌어 덮고 있지.”
“몰라서 묻는 거야?”
“그러면 알면서 묻겠나.”
“……”
유페미아는 게슴츠레 하게 눈을 뜨고서는, 이불을 천천히 내렸다.
“이 옷차림 당신이 시킨 거 아니었어……?”
“아……”
페르젠의 반응에, 유페미아는 결국 그가 지시했던 사안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저 까먹고 있었을 뿐이리라.
“뻔뻔해……”
“잘 어울린다. 어차피 나한테만 보여줄 모습인데, 부끄러워 할 필요가 있는가. 그것보다 더한 모습을 보여줬으면서.”
“당신, 의외로 음흉한 구석이 있네……”
“내가 정말로 음흉했다면, 천쪼가리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너를 내버려둔 뒤 당장 다리나 벌리라고 했을 것이다.”
실제로 페르젠은 유페미아의 심리적 저항선을 차츰 무너트림과 동시에, 자존감을 떨어트릴 생각으로 저런 옷차림을 시녀들에게 입히라고 지시했을 뿐이었다.
“……”
“같이 한잔 하겠나?”
자그마한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아, 잔을 내려두는 페르젠의 말에 유페미아는 대답없이 고개를 저었다.
“귀여운 부분 하나 없는 아내구나.”
“기가 막혀……”
“상대해주지 않겠다면 되었다.”
잔에 와인을 따르고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마시는 페르젠.
“잠이 오면 먼저 자도록 해라.”
“알아서 할 거야……”
마음 같아서는 유페미아도 그러고 싶지만, 고작 6시다.
잠이 올리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침상에서 일어나 책을 하나 꺼내들고는,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걸 억지로나마 읽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러다 피곤해진 눈이, 잠을 자자고 재촉할지도 모를 일.
그리 유페미아는 책장을 조금씩 사락사락 넘기며 시간을 보냈고.
페르젠은 달빛을 안주삼아 와인을 마시며 시간을 지새웠다.
‘조금 천천히 먹지……’
잔을 비우고, 와인을 따르는 속도가 꽤나 빠르다.
술은 그리 잘 먹는 것 같지도 않는데.
괜히 취기가 올라 자신에게 불똥이 튀면 곤란했다.
물론, 그 당시 북부에서 봤던 페르젠의 술버릇은……
‘나빴네……’
침상에서 자신의 가슴을 거세게 움켜쥐며 잠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비교적 얌전한 술버릇이라고 속으로 읊조리려 했는데, 그 전에 남작의 꽃병을 집어 던져 깨트리던 모습이 생생히 떠올라 곧장 수정한다.
더군다나 오늘은 어째서인지, 심기가 많이 불편해보였다.
좋든 싫든, 곁에 있는 시간이 그래도 한달을 부쩍 넘어 갔으니 이런 점은 눈치 챌 수 밖에 없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브뤼테인 가문의 차남이기는 하나, 아카데미의 교수는 상당히 이름 있는 가문의 귀족들로만 구성 되었다고 들었다.
그러니 개인은 아니더라도, 단체로 모여 짜증나는 시비를 걸어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겨우 그런 일로, 그가 답답해하며 술을 먹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는다.
외려 그런 일에 직면하면, 덜떨어진 것들이 무리를 지어 재롱을 피우는구나라며 비웃어 넘기고 말 것 같은데.
‘몰라…… 이런 걸 내가 신경써서 뭐하겠어.’
고개를 저으며 유페미아는 다시 시선을 내려 책을 읽었다.
그리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병에 담긴 와인이 바닥을 보이고, 책을 읽던 유페미아도 눈이 침침 해지기 시작했을 무렵.
“유페미아.”
페르젠은 나근나근한 목소리로, 유페미아를 불렀다.
“왜……”
그에 침상에 편히 누우려던 유페미아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페르젠을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적안은, 어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잔잔해 보였지만.
그 잔잔함은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전야(前夜) 같았다.
그래, 비를 내리지 않는 먹구름 같은.
“이리 와라.”
“……”
그래서 유페미아는, 차마 거부 같은 걸 하지 못했다.
조용히 침상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그의 곁으로 다가간다.
그러자 페르젠은 마치 품평이라도 하듯, 속옷이 비추는 새하얀 네글리제를 입고 있는 유페미아를 위 아래로 조용히 훑어 보았다.
“변태 새끼……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조금은 티가 나지 않게 행동하라는 주의를 담아 투덜거리며, 유페미아는 슬그머니 자신의 가슴을 두손으로 가린 뒤 다리를 오므렸다.
“유페미아. 손을 치우고 똑바로 서라.”
“아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러는 거냐고.
그리 말을 하려던 유페미아였지만, 페르젠과 시선이 마주치자 거칠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그가 바라는대로 해주었다.
“잘했다.”
“당신 칭찬은…… 정말 헤프네. 값어치가 없어.”
“손.”
“……”
오늘 밤은 자신을 개처럼 취급하기라도 하려는 걸까.
그래도 딱히 어려운 요구는 아니다 싶어, 유페미아는 내밀고 있는 페르젠의 왼손 위로 자신의 왼손을 얹혔다.
“뭐, 뭐……”
하지만 페르젠의 미간이 대번에 찌푸려진다.
“손.”
술을 먹더니 개가 된 건 오히려 자기 자신일까.
지금 이게 손이 아니라 발로 보이기라도 하나?
“……”
진중하게 발을 얹혀야 하는가 하고 고민했던 유페미아지만, 왼손을 거두고 오른손을 얹혔다.
“잘했다.”
그러자 헤프기 그지 없는 그의 칭찬이 튀어 나온다.
“진짜…… 특이한 술주정이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려던 걸 간신히 참아내며, 유페미아는 페르젠을 향해 툴툴 거렸다.
“유페미아.”
“왜…… 이번에는 발이라도 얹혀줘야 해?”
페르젠은 고개를 저으며, 아무말 없이 자신의 무릎 위를 손으로 두어번 치고서는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해하지 못한 척 하지마라.”
“……”
뜸들이며 시간을 끌자, 페르젠이 재촉하듯 입을 열었다.
그에 유페미아는 자신의 옷차림을 한 번 스윽 훑어보고서는, 거의 체념했다시피 한 얼굴로 페르젠의 무릎 위에 앉았다.
“마주보며 앉지.”
“좀……!”
마주보고 앉게 되면, 특성상 두 다리를 벌려야 하기에 짧은 네글리제의 밑단이 밀려 올라가게 된다.
“애태우려는 의도라면, 그런 건 침상위에서만 하도록.”
“애태우기는 누가……!”
진짜 기괴한 술주정이다 싶어, 뺨이라도 한 대 때려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싶었으나……
아마 그러면, 이 남자는 자신의 뺨도 가차 없이 떄리리라.
이것은 이미 학습된 경험이기에, 유페미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는 페르젠의 어깨를 두손으로 잡고 그의 무릎 위로 주저 앉았다.
“잘했다.”
“닥, 쳐……”
밀려 올라간 네글리제의 밑단 덕분에, 새하얀 다리와 허벅지가 드러나고 고급스런 자수가 새겨진 그녀의 검은색 팬티는 페르젠의 허벅지에 맞닿아 움직일 때 마다 인식하고 싶지 않은 감촉이 올라왔다.
“진심이다.”
“……”
“잘했다.”
바로 코앞의 거리에 그의 얼굴이 있기 때문에, 풍겨오는 짙은 술냄새를 바로 맡을 수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도수가 독했던 와인이었을까.
은은한 향만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 해질 정도였다.
스윽.
“……”
이후, 아무런 말없이 페르젠은 유페미아를 끌어 안고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자신의 말에 고분고분 복종하는 모습에, 얼마나 안도를 느꼈는지.
변수 하나가 착실히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 하나──그래, 고작 하나였지만 페르젠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위안이자 기쁨이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페르젠의 자아가, 이서진의 자아를 온전히 집어 삼켰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그랬다면, 페르젠은 주변의 변수에 크나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로에르가 보여주었던 송곳니에도 코웃음을 쳤으리라.
물론, 그리했다면 그 끝에 기다리는 결과는……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겠지만, 스트레스 하나 받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살다 죽지 않았겠는가.
이제와서는 의미 없는 가정이기는 했다.
이서진의 자아가 뒤섞여 탈바꿈한 페르젠은, 적어도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
“유페미아.”
“……”
“오늘 처럼만 하면 된다.”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며, 페르젠은 유페미아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그리 읊조렸다.
그리고 유페미아는, 지금까지 자신이 봐왔던 페르젠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나약해 보이는 모습에 적잖은 괴리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술 때문일거라 생각한 유페미아는, 아무런 말없이 온 몸의 힘을 풀고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길 뿐이다.
“자도록 하지……”
시간은 어느 새, 8시 55분.
유페미아를 부드럽게 안아들고, 페르젠은 침대로 걸어가 그녀를 눕힌 뒤 함께 이불을 덮어썼다.
“오늘은 거리를 벌리고 자지 않나……”
“어차피 아침에 일어나면 당신이 끌어 안고 있을 거 아냐.”
이러든 저러든 조삼모사이기에, 유페미아는 포기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포기조차도, 페르젠은 만족스러웠다.
“그래. 잘자라……”
건네오는 밤인사에, 유페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소소한 반항이었다.
페르젠 입장에서도 눈치 채지 못할 법한.
그도 그럴 게 잘자기는 개뿔, 이리 불편한 잠자리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괜히, 두 눈을 치켜들고 힐끔 그를 바라보는 유페미아지만……
페르젠은 그녀가 억울하리 만큼, 벌써 고른 단잠에 빠져 있었다.
* * * * *
“……”
어젯밤 와인을 마시며 잠에 빠져들었던 페르젠이지만, 출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에 박혀 있어서 그런지 몸은 지나치게 빠르게 잠에서 깨어났다.
힐끔 시계를 보니 오전 5시 40분.
‘더 자도 되겠군……’
더 자는 걸 떠나, 완전히 푹 잠들어도 상관이 없었다.
흑마도학은 어차피 주 1회 강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 출근을 안 하는 건 아니었다.
평민들을 가르치는 전담 교수와,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는 전담 교수는 한 주마다 교대로 기숙사의 당직을 선다.
그리고 오늘 당직은, 페르젠 자신과 이름 모를 교수 한 명.
어차피 황실 기사단이 기숙사 주변을 지키기에,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섞여 들어간 일정이었다.
외부의 습격으로 인해 아카데미 내에서 피해가 발생하게 되면 이 일을 추진한 황실의 권위에 손상이 간다.
하지만 당직을 서는 교수가 있기에, 황실은 그 부담을 해당 교수의 가문과 나눌 수가 있었다.
예컨대 당직을 서는 교수의 부주의는 둘째치고, 지독하게 물어 뜯으려 한다면 그 교수가 혹시 습격자와 내통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효율만 보면 병신 같으나, 정치적으로는 괜찮은 수법이었다.
‘어차피……’
어제 점심 때쯤, 학과 사무실에 배정된 행정 조교가 잔뜩 피로한 눈빛으로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냐고 하던 걸 거절 했었다.
그 이유를 들어봐야 했으니……
이 일정이 없더라도 잠깐 들러보기는 했을 것이다.
다만, 그 시각대도 오후 정도가 될 예정이기에.
페르젠은 유페미아의 머리맡에 고개를 묻고, 도로 눈을 감았다.
좋은 냄새가 났다.
너무나도.
향긋한.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