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20화 (20/260)

EP.20 020─페르젠 교수

소설 속에 차용 되는 중세는,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문명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는 게 보편적이다.

실제로 18세기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주사기가 이 세계에는 이미 존재했고, 의학적 지식과 수준은 순수한 중세시대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을 만큼 발전이 되어 있었다.

그러한데 리지의 발목이 그리 되었다는 건……

적어도 이곳의 의학수준으로는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리라.

물론, 방법이 완전히 없는 건 아니었다.

흑마법사는 명계의 괴이(怪異)와 거래가 가능한 존재.

케테르 등급의 흑마법사가 거래 할 수 있는 명계의 1층──산지바(Sañjīva).

유클리드 등급의 흑마법사가 거래 할 수 있는 명계의 2층──라우라바(Raurava).

이 두 계층을 넘어서서, 아폴리온 등급에 도달해 명계의 3층──프라타파나(Pratāpana)의 괴이와 거래를 할 수 있게 되면 리지의 발목을 치료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확실하지는 않았다.

어떤 명계의 괴이가 자신의 제단과 접선이 되는지는, 흑마법사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명계의 1층, 산지바(Sañjīva)에 서식하는 괴이들과의 접선은 자신이 원하는 능력을 가진 괴이와 연결 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지만 2층에 서식하는 괴이부터는 어림도 없다.

‘기록이 남아 있기는 했었어……’

과거 아폴리온 등급의 흑마법사가 명계의 3층──프라타파나(Pratāpana)의 어떤 괴이와 접선하게 되었을 때, 그 괴이는 대가를 받고 신체의 손상을 회복시켜주었다고 했다.

브뤼테인은 막대한 재력을 보유한 가문.

무려 명계의 3층에 서식하는 괴이의 능력을 빌리는 것이기 때문에 대가의 값어치가 크나크기는 하겠지만, 충분히 감당 할 자신은 있었다.

‘접선이 된다는 가정이지만……’

머리가 아프다.

사실 접선이 되어서 다리를 치료 해준다 해도, 감정의 골이 회복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게 무려 8년의 시간 동안 그리 살아 왔을 테니.

‘짜증난다. 정말로……’

걸어서 올라온 A 교육관의 옥상, 우산을 펼치고 나아가 연초를 꼬나문 뒤 깊게 들이마셨다.

‘차라리……’

깔끔히 밀어 버릴 수 있게.

알프레드와 클로디아 가문이 명분을 제공해주지 않으려나.

변수의 통제 보다는, 제거가 편한 게 사실이다.

“……”

그리 고뇌에 잠겨 있기를 잠시, 오른쪽 옥상의 모퉁이에서 파란색 우산이 기웃기웃 거린다.

누구 인가 싶어 천천히 다가가니……

“뭐, 뭐에요……”

쭈그려 앉아 조심스레 연초를 피우고 있는 유리엘이 보였다.

“의외군.”

“여자는 연초를 피우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말 그대로 의외라고 했을 뿐이다.”

“흥…… 애초에 당신 때문이니까 괜한 설교는 하지 마세요.”

후──

입술을 삐죽 내밀며 건방지게 내 앞으로 연기를 내뱉는 유리엘.

“……”

잠시 눈살이 찌푸려지기는 했지만 참았다.

“아……! 끄앙!”

아니, 참지 못했다.

이 버릇없는 건방짐을 어떻게 참는단 말인가.

때문에 눌러쓴 그녀의 챙모자를 들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고인 웅덩이에 안착해 빗물을 머금고 가라앉는 모자.

“……”

그래, 그래야 했을 텐데.

가라앉지 앉고 둥둥 떠 있다.

쏟아지는 빗물이 이리저리 휘어지는 걸 보면, 주변 대기에 간섭해 모자를 띄우고 있는 듯하다.

곧 이어 자연스레 그 모자가 유리엘의 품으로 날아가려던 걸.

“아……!”

내가 파훼시켜 바닥에 떨궜다.

흑마법사는 원소 마법사처럼 마력을 특정 원소로 변환하거나, 대지나 대기에 간섭할 수는 없지만 마법의 구성식을 파악한 다음 파훼하는 건 가능했다.

사실, 파훼라기보다는 무(無)로 변환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 2주차 강의도 이것과 연관이 있었다.

정확히는 마법의 구성식을 인식하는 ‘개념’에 관해서겠지만.

“눈빛이 참 시건방지다.”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우며, 두 눈을 치켜들고 나를 노려보는 유리엘에게 연초를 한 모금 빨고서는 연기를 뱉어 주었다.

그러자 콜록 거리며 고개를 돌리는 유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도 나에게 대든 것치고, 이 정도 공방이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대들 기미는 없어 보였다.

“비켜요.”

“유리엘.”

“그리 친근하게……”

“유리엘 교수.”

“왜요.”

“옷차림은 단정히 해라.”

목과 어깨로 우산을 잡은 뒤, 다 피운 연초를 바닥에 버리고 그녀의 가슴 위 옷자락으로 손을 뻗었다.

정확히 단추 하나 만큼 벌려져 있는 옷깃이, 한쪽은 옆으로 접혀 있고 한쪽은 반듯하게 날이 서있으니 적잖게 심기를 거슬리게 한다.

“……”

그러나 가슴이 상당히 크기 때문일까, 단추를 잠그려 드니 꽈악 조여 드는 듯한 옷 주름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아, 아프잖아요!”

“몸뚱이 자체가 단정해질 수가 없는 천박함이군……”

포기를 하고 두 옷깃을 옆으로 바르게 접어주었다.

“무슨 상관이래! 그 때부터 은근슬쩍 희롱하지 마세요. 기분 나쁘니까. 그리고 알프레드는 알프레드만의 격식이 있어요. 더 이상 브뤼테인에 목매지 않아. 알프레드가 추구하는 건 자유에요.”

“그런 건 자유가 아니라 방종(放縱)이라고 한다.”

“당신의 그 품격도, 고결함이 아니라 잔혹함이겠죠.”

잔혹하다라.

그것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 가는 게 없지는 않았기에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흥……”

그에 나를 지나쳐 걸어가는 유리엘.

“하……”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쏟아진다.

그리고 그 빗속에서, 나는 우산을 들고 오랫동안 젖어 들어가는 수도의 풍경을 하염 없이 지켜보았다.

* * * * *

오후 4시 50분.

예술 문화의 이해라는 교양 과목에서 악기──바이올린을 선택했던 리지는 드디어 그 강의가 끝나자 강의실을 나왔다.

이걸로 오늘의 강의는 더 이상 들을 게 없으니, 본관에서 기다리고 있을 자신의 오빠와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하고 기숙사로 돌아가면 되리라.

‘반드시……’

그 날 이후, 리지는 폐인처럼 지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10살의 나이, 어린 소녀에게 있어서 페르젠이 선보였던 폭력은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기에.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울부짖으며 애원해도 결국 그는 자신의 왼발을 부러트렸다.

아니, 부러지지는 않았다.

신경이 살아있고, 움직이기는 하니까.

하지만 내딛었을 때, 신체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야 말로 장식품에 지나지 않게 된 왼발.

아마, 그 당시 뒤늦게 달려온 첫째 오빠가 페르젠의 턱을 후려쳐서 기절시키지 않았다면 왼발은 정말 부러졌으리라.

물론, 지금 와서는 왼발이 차라리 철저히 부러졌으면 어땠을까 하고 리지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적어도 철저히 부러졌으면,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와 첫째 오빠가 그리 굴욕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

가을철, 곡물을 수확하고 팔아야 하지만 그 어느 곳의 상단도 자신들의 곡물을 매입하려 하지 않았고.

그 어떤 의원도 자신의 발을 진단하러 오지 않았다.

곧 겨울이 다가오니 영지민들은 수확한 곡물을 팔아 겨울을 보내야했고, 자신의 발도 점점 부어오르며 악화되고 있었으니……

모순적이게도 자신의 아버지와 첫째 오빠는, 당시 브뤼테인의 가주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그에 당시의 일을 철저히 함구한다는 조건을 덧붙여 사죄를 받아들인 브뤼테인의 가주는, 곡물을 평균 시세의 세배로 사들이며 여타 다른 압박을 거두어 들였다.

이 일도,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

아니, 페르젠 폰 슈바이크 루에르그.

그 남자는 알고 있을까.

리지는 아직도,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춤을 추는 도중에 긴장해서 실수했던 것이, 그리 중죄였을까.

‘정말, 반드시……’

동일한 조건하에, 사체의 구현율을 다루는 승부.

4년 전의 그는, 그 승부에서 자신을 이기는 자가 있다면 브뤼테인의 이름하에 무엇이든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고 했다.

아직도 유효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의 성격상, 없던 것으로 치지는 않겠지.

때문에 리지는, 명확한 확신이 섰을 때.

그에게 정면으로 도전해 승부에서 이긴 다음, 아버지의 무덤 앞으로 끌고 가 사죄를 시키거나…… 자신과 똑같이 한쪽 발을 부러트리라고 요구 할 생각이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실현 가능성이 낮겠지만, 자신의 첫째 오빠가 알프레드 가문의 장녀와 혼례를 치루고 나면 불가능한 요구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끼릭.

끼릭.

복도의 모퉁이에 가만히 있다, 다른 학생들이 모두 내려가는 것을 보고 리지는 사체를 통제해 휠체어를 밀었다.

8년 전 그날, 자신은 가족이 아닌 다른 남성을 보면 벌벌 떨게 되는 기피증을 앓았지만 결국은 극복해냈다.

흑마도에도 재능이 있어, 2 ~ 3년의 시간만 있다면 유클리드 등급으로 승격할 수 있는 길도 보인다.

첫 강의 때, 그의 모습을 보고 감정적이 되어 빈틈이 있는 반론을 해버리기는 했지만……

앞으로는 그런 실수 따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아……”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경사로.

그 중간에서 마력이 모두 소진 되었다.

아침부터 줄곧 이러고 다녔으니, 무리도 아니리라.

아니, 마력의 양은 충분했다.

단지 교육관 내부의 지리가 익숙하지 않아, 동선 낭비를 많이 하는 바람에 과소비를 했을 뿐이었으니까.

‘하필……’

내리막길만 아니라면 바퀴를 직접 굴리면 되겠으나, 내리막길이라 이대로 내려갔다가는 멈출 수가 없어서 벽에 부딪힐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목발을 짚고 일어나, 본관에 기다리고 있을 자신의 오빠를 불러온 뒤 휠체어를 가지고 가야……

뚜벅.

뚜벅.

모든 학생들이 내려가, 조용히 비가 내리는 침묵만이 맴도는 계단의 끄트머리 너머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1층의 모퉁이를 도는 그.

단정한 정장 차림,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는 품격 넘치는 모습.

페르젠 폰 슈바이크 루에르그.

“하, 흐……”

하지만 리지에게는 그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마치, 어둠이 내려앉은 으슥한 골목길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살인귀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그런 류의 공포.

어째서?

남성을 두려워하는 기피증은 극복했을 텐데.

설령 그게 아니라 페르젠이라는 남자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라 해도, 강의를 들을 때는 괜찮지 않았는가.

“아, 으……”

뚜벅.

뚜벅.

그가 올라온다.

거리를 좁혀온다.

그럴 때 마다 리지는, 누군가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듯한 느낌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그녀는 깨닫게 되었다.

8년 전 그날처럼.

주위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둘이 그와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잔혹했던 트라우마를 발작시키고 있다는 것을.

“마력이 다한 건가.”

절로 소름이 돋는 듯한, 그의 새빨간 적안이 자신을 내려다보자 리지는 온 몸이 뻣뻣이 굳어 버렸다.

“……시간도 있으니, 도와주마.”

쓰러진 사체를 사역해 일으켜 세우고, 페르젠이 리지의 휠체어를 뒤에서 붙잡아 천천히 밀고 나간다.

하지만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던 페르젠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끔 후미로 위치를 옮기자……

리지가 느끼고 있는 공포감은 배가 되었다.

음산한 골목길에서 마주한 살인귀를 피해내 달아나보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며 언제 처참하게 죽어버릴지 모른다는 그러한 두려움이……

“하, 흐, 으…… 흑……!”

기어코 한계점에 도달해, 스스로를 무너지게 만든다.

끼릭.

“……”

휠체어를 타고 흘러내리는 옅은 노란색의 액체.

비가 내리고 있는 터라 교육관 내부의 진득한 습기와 뒤섞여, 묘한 지린내가 올라온다.

그에 페르젠은 잠시 나아가던 걸음을 멈췄다.

내리막길의 경사로를 따라 주르륵 흘러내리는 그것이, 소변임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눈치채는 게 늦었기에, 오른쪽 신발은 이미 그 소변이 만들어낸 길을 밟고 내려와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끄, 흐윽……!”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며, 두 다리를 꼬옥 오므린 채.

리지 폴 리아나 클로디아,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르젠은, 불결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거의 반사적으로 왼발을 내딛어 경사로를 더럽힌 리지의 소변을 즈려밟았다.

“하……”

결벽증은 없지만, 이건 결벽증과 상관이 없을 정도로 누구나 불쾌해 할 것이다.

이리 강박이 발작할 수밖에 없게끔 원인을 제공한 리지에게 짜증이 솟구치지만 페르젠은 억지로 그 감정을 억눌렀다.

적어도 이 결과에 대해 합당한 원인이 있다는 걸 나름대로 자각은 하고 있었기에.

단지, 강의를 들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녀가 이제와서 이러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었다.

“……”

그리고 맴도는 침묵 속에서, 리지는 어느 때보다 강렬한 수치심과 좌절감을 느꼈다.

다음화 보기―――――――――――――――――――――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