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2화 (12/260)

EP.12 012─교수가 되기 전에

“……”

잠시 고개를 들어 대칭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맑은 하늘을 편히 바라보다, 나는 집어 던졌던 서류를 도로 쥐어들고 시선을 내렸다.

사실, 알프레드 가(家)는 원래부터 브뤼테인 가(家)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악연이 있다고 해도 이상한 건 아니다.

그래, 오히려 의혹을 품을 거라면 알프레드 가문이 브뤼테인 가문과 사이가 나쁘다는 설정 자체가 핵심이리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 노골적으로 보였으니까.

‘유리엘 웨인 데이나 알프레드……’

알프레드 가문의 차녀.

그녀와 관련된 기억은……

‘생각보다 심하지는 않은데.’

알프레드 가문이 주도적으로 마련한 약혼 자리에서 주제를 깨닫게 해줬을 뿐이라고, 페르젠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알프레드 가(家).

세력 자체는 브뤼테인과 견줄만하다고 할 수 있으나, 브뤼테인과 비교하자면 근본(根本)이 틀리다.

아니, 근본이 틀리다고 하기 보다는……

무얼 거름삼아 자라났는지의 차이일까?

알프레드 가문은 세력을 키우는데 있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브뤼테인이 순수한 황금으로 이루어진 조각상이라면, 알프레드는 오물 위에 겉만 도금한 조각상.

그래, 적어도 그들이 부르짖는 명예는 브뤼테인 앞에서 한낱 쓰레기에 불과했다.

조금 더 순화해서 표현 하자면……

울고 있는 여자 아이가 산적을 보고서 울음을 그치는 것과, 왕자님을 보고서 울음을 그치는 것 정도라 할 수 있겠지.

오죽하면 알프레드 가문에게 최고의 아첨은 브뤼테인과 비교하는 것이라 하겠나.

그래서 알프레드 가문의 뒷방 늙은이들은, 그 누구보다 명예에 목말라 있는 족속들이었다.

때문에 사석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페르젠이 무언가 결함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넌지시 차녀인 유리엘과 약혼 자리를 만든 것이다.

당연히 브뤼테인의 어르신들과 페르젠의 부모님은 거기서 약혼을 성대하게 파토를 냈고, 따로 자리를 마련해있던 페르젠 또한 유리엘에게……

──구정물이 바다에 흘러 들어간다고, 자신 또한 바다가 될 거라 생각하나?

라는 한 마디를 내뱉으며, 등을 돌렸다.

사실 페르젠은 그 약혼 자리가 파토날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유리엘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 첫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호의를 표현하며 귀찮게 달라붙었겠지.

오히려 제레미아와 있었던 일 이후, 사람을 마주할 때는 항상 일정 간격을 유지하는 페르젠이었는데 유리엘이 그 간격을 계속해서 넘어서려 들었으니 페르젠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최선의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다.

‘리지에 비하면…… 심할 건 없는데, 알프레드 가문이라서 최상단에 따로 표기를 해둔 거였나.’

의아함을 품고 제일 밑의 단락을 보자, 클로디아 가문의 장남과 알프레드 가문의 장녀가 결혼을 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적혀져 있다.

출처가 확실치 않은 정보이기에,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고 덧붙임이 되어 있기는 했으나……

‘알프레드 가문이 클로디아 가문의 뒷배가 될 가능성이 존재 한다 이거군.’

거기까지만 읽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엉킨 실타래…… 아니, 실타래도 아니겠지.

이것들이 어떻게 시엘 미드포드의 징검다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까.

답이 떠오르지 않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며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먼저 먹고 있었어도 뭐라 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로는 뭐라 못해……”

차려진 아침 식사를 건드리지 않고, 다소 곤히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유페미아의 모습에 입 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먹지.”

나이프와 포크를 쥐려다, 유페미아가 수저를 드는 걸 보고서 반대쪽 손으로 수저를 쥐고 수프를 한 숟가락 떠먹었다.

‘정말, 피곤한 몸이다.’

강박장애.

어떻게든 고치고 싶기는 하나, 21세기인 현대에서도 정신병은 불치병으로 판정이 내려졌다.

완화하는 약이 있기는 하지만, 그 약물의 재료는 하나도 모른다.

이서진은 정신병을 앓지 않았으니까.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발악은 페르젠이 24년간 해온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서 무얼 더해야 하는지 마땅한 방향성을 찾지도 못하겠다.

의도적으로 시력을 떨어트리고, 사람을 바라 볼 때면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초점을 흐리는 습관.

좌우대칭이 완벽해질 만큼 글을 쓸 수 있게 된 노력, 옷을 흐트러짐 없이 정리하는 완벽성.

악착같이 발버둥 친 끝에 페르젠이 마련해두었던 울타리를 어설프게 확장하려 들었다가는, 사태만 더 악화되리라.

“그…… 루에르그로는, 언제 돌아가는 거야?”

“아?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생각을 해보니 유페미아에게는 언질을 준 게 없는 것 같아, 앞으로의 일에 관해서 상세히 알려주었다.

“수도로…… 나를, 데려 가겠다고?”

그녀를 루에르그에 처박아둘 생각은 진작부터 없었기에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브뤼테인 가문의 이름으로 매입한 저택도 있으니 지내는 건 문제가 없으리라.

데려갈 시녀들도 가능하면 나이가 많은 쪽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그녀와 나이대가 비슷하면 친밀감을 가질 수도 있을 테니까.

계속 되는 환경 변화에 낯섦을 느끼고, 몰려드는 외로움에 의지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는 상황을 마련하는 게 최적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저택의 크기가 상당했지.’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수도에서 몇 안 되는 시녀들과 홀로 지내다 보면, 퇴근하고 돌아오는 나를 보다 살갑게 맞이하려 들지 않을까.

알프레드 가문과 클로디아 가문은 당장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적어도 유페미아는 내 손 안에 있으니 변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3일 뒤에 출발할 것이다.”

교수직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을 자는, 2월 3일 까지 직접 아카데미에 들리라고 했으니 시기를 계산 했을 때 3일 뒤에 출발하면 딱 알맞으리라 본다.

“매번 내가 듣는 건…… 통보일 뿐이네.”

“마땅한 절충안이 있다면 말해봐라. 몇 개월 뒤에 따로 루에르그로 올라가겠다는 소리는 듣지 않겠다.”

“당신은, 협상을 그런 식으로 해?”

“갑과 을이 논의하는 걸 협상이라고 하지는 않지.”

“욕정을 풀고 싶은 거라면, 굳이 나를 곁에 두지 않아도 상관없잖아…… 아무 여자나 안으면 브뤼테인이라는 이름값에 흠집이 날 것 같아서 그러나?”

비꼬듯 입술을 삐죽 내미는 유페미아지만,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도 내가 어떻게 반박을 해올지 눈에 선명히 보이니까 제발이 저리는 거겠지.

“어제를 생각해보면, 네 욕정을 내가 풀어 준 것 같다고 느끼고 있는데.”

“음식, 식어……”

“말 돌리는 재주가 없군.”

대답을 하지 않고, 유페미아가 화풀이하듯 거칠게 아침을 먹기 시작한다.

“식사 예절 하고는……”

그에 반사적으로 천한 것이라는 말이 튀어 나가려던 걸 집어 삼키고, 나는 묵묵히 배를 채웠다.

* * * * *

“……”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침대에 앉아 책을 읽던 유페미아는, 일순간 침침해진 눈가를 비비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는 걸 꾸역꾸역 읽어나가는 건 상당한 고문이었지만, 그렇다고 산송장처럼 멍하니 앉아 있기도 싫었다.

“유페미아.”

“왜……”

낮게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책상에 앉아 있던 페르젠이 자신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고 있다.

“……”

와서 받아 가라 이건가.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직접 몸을 일으켜 건네줘도 상관없을 텐데.

하지만 그런 불퉁스런 마음과는 다르게, 유페미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페르젠이 내밀고 있는 종이를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네가 그 세 문제를 모두 풀면, 청을 하나 들어주마. 어차피 할 것도 없는 듯 한데. 그 정도면 의욕을 북돋아 줄 수 있겠지.”

“루에르그로……”

“가고 싶다면 보내주마.”

“뭐?”

페르젠의 말에 몸을 흠칫하는 유페미아였으나, 저리 말할 정도라면 애초에 자신이 풀지 못할 수준으로 문제를 냈을 거란 생각에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

1. 아래 두 가지가 성립되는 조건을 찾으시오.

「 6+8 = 14 」

「 6+8 = 2 」

─────

“기한은 수도에 도착할 때 까지다.”

“뭐야, 이게……”

“그걸 벌써부터 나에게 묻나? 무식하게 어려운 문제들로 구성을 하지는 않았다. 싫으면 관둬라.”

“시, 싫다고 하지는 않았어.”

줬던 걸 도로 뺏어가려는 페르젠의 손길에 유페미아는 종이를 황급히 뒤로 숨겼다.

“그러면 잠시 자리를 비우마. 종이와 잉크는 마음대로 써도 좋지만 책상과 바닥에 묻혀 얼룩을 남기면 혼낼 것이다.”

말을 마친 페르젠이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선다.

그에 머뭇머뭇 서있던 유페미아는, 페르젠이 앉았던 의자에 조심히 착석해 책상에 문제를 내려두고 펜을 쥐었다.

“흥……”

설사 자신이 모두 푼다고 해도, 어쩌면 말을 뒤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괜찮았다.

한 번 내뱉은 말을 되도 않는 논리로 무마시키려드는 그의 모습은 그것대로 통쾌할 것 같았기에.

그리 페르젠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고고함을 무너트리는 순간을 상상하며, 유페미아는 오기로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

의욕 찼던 시작과는 다르게, 어느 새 찾아온 밤.

침대에 누워 두 눈을 끔뻑이는 유페미아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 살포시 상체를 일으켰다.

여러 수학적 지식으로 접근을 해보았으나, 1번 문제에 관한 답은 아직까지도 찾지 못했다.

혹시 수학적 접근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종이와 잉크를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고 했던 페르젠의 말을 돌이켜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스륵.

브뤼테인에서 수도인 에르네스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일주일.

한 마디로 열흘의 시간 밖에 남지 않았으니, 유페미아는 조금 조바심이 나서 편법을 써보기로 했다.

어찌 되었든 세 문제의 답을 알아내기만 하면 될 테니까.

스윽.

손바닥을 내밀어 얼굴에 음영을 드리워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에 페르젠이 깊게 잠들었음을 확신한 유페미아는, 고개를 숙여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문제의 정답.

취기와 수마는, 예로부터 사람의 무의식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전통적인 자백제.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그만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문제의 정답.

……문제의 정답.

……말해.

……이 나쁜 새끼야.

“아……”

도중에 무심코 감정이 실려 나갔다.

목소리 톤도 비교적 높았던 것 같았기에, 유페미아는 점점 심박수가 빨라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고개를 뒤로 내뺐다.

다행히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 요지부동……

“너무 한심하고 유치한 발상이라…… 한숨조차 나오지 않는다.”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처럼 타오르는 듯한, 페르젠의 붉은 적안이 자신을 또렷이 응시하자 유페미아는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끅……!”

자신의 행동을 기행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 깊게 잠이 들 새벽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고 칼 같이 눈을 뜨는 페르젠도 정상은 아니라 할 수 있지 않나.

애초에 진심으로 잠결에 페르젠이 정답을 이야기 해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아마 욕심을 조금 더 부렸어도, 면전에다 대고 욕을 두어마디 추가해 속삭이는 걸로 끝났겠지.

어쩌면 이 남자는, 침대에 누웠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 곧 자는 척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숨을 쉬어라.”

그리고 페르젠은 자신이 뭐라 하기도 무안할 만큼 놀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유페미아에게, 조곤조곤한 어투로 달래듯 말했다.

“흐, 으……”

그제야 멈췄던 숨을 간신히 토해내는 유페미아.

“1번 문제는 수리적으로 접근 할 필요가 없다.”

정답을 알고 있는 페르젠 입장에서는 문제가 비교적 간단하게 보였기에, 일부러 첫 번째 문제부터 전혀 연관 없는 수학적 지식을 이용해 풀게끔 유도했다.

일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널브러진 종이들을 보고 자신의 의도가 너무 잘 먹히고 있어서 놀라기는 했지만 나중에 유페미아가 힌트를 요구하면 그때서야 선심 쓰듯 알려주려 했는데……

“만족스런 대답이 되었으면 이만 누워라.”

아무리 봐도 당근의 효율이 최고로 극대화 되는 상황 같아, 굳이 그 시점을 뒤로 미룰 필요가 없어 보인다 싶었다.

“나, 나는 말해달라고 한 적 없어……”

“그래. 안다.”

호응해주는 대답이 무슨 면죄부로 느껴지기라도 한 건지, 유페미아는 옅은 기쁨을 머금고 몸을 눕혔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단잠을 자던 사람을 깨운 벌은 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 페르젠은 유페미아의 아랫배로 손을 얹혔다.

“왜, 왜……”

유페미아 입장에서는 페르젠이 자신의 아랫배를 매만지는 게 성관계를 하기 전의 전조로 각인 되어 있기에, 당황하며 손을 뻗으려 했으나……

“끄응……!”

자신의 배꼽 부분을 검지로 지그시 누르는 자극에, 차마 밀어 내지 못하고 두손을 얌전히 가슴위로 모았다.

그리고 그제야 유페미아도, 페르젠이 자신에게 일종의 벌을 주고 있음을 어렴풋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악담조금 했다고……’

사실 악담도 아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까.

“하, 하지…… 끄흥!”

배를 드러내고 누운 강아지가 자신을 만지게 내버려두는 건, 명백한 굴복의 의사를 표현한다.

그리고 유페미아는 페르젠이 자신에게 그런 의도로 이러는 것 같아서 다소곤하게 모은 손으로 굵직한 팔뚝을 붙잡아 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커다란 손이 복부 전체를 짓누르며 자궁을 압박하는 듯한 통증뿐이었다.

‘굴욕적이야……’

가만히만 있으면, 페르젠의 손은 자신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편하게 잠을 재줘주려는 듯한 자장가처럼 굴었다.

의도가 너무나도 노골적인 길들이기.

물론, 얌전히 순응 해줄 마음은 없었기에 유페미아는 눈을 감고 자는 척 고른 숨을 내뱉었다.

적당히 자신이 잠들었다 싶으면 페르젠도 손을 치울 테니까.

“……”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유페미아는 자신의 아랫배에서 페르젠의 손이 치워지는 감촉을 느끼기도 전에 정말로 단잠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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