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9화 (9/260)

EP.9 009─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

외식을 마치고 브뤼테인 가(家)의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집사인 크리스를 불러 실력 좋은 화가 한 명을 구해 오라는 명을 내린 뒤, 친형이자 현 가주인 제레미아에게 찾아가 개인적인 부탁을 요청했다.

“사람 한 명을 찾아 달라고 했느냐?”

“예.”

주인공──시엘 미드포드는 변두리인 루에르그에서 도망을 쳤으니, 이 시기에 중앙까지 흘러 들어와서 활동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작중에서 유페미아가 브뤼테인이 어떠한 가문인지 시엘 미드포드에게 자세히 알려주는 장면도 있었으니까.

아마, 바보가 아니고서야 제대로 된 패를 갖추지도 않았는데 적의 영향력이 큰 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래도 모른다.

괜히, 등잔 밑이 어둡다는 식으로 뒤통수를 맞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가능하면 철저하게 그물을 펼칠 생각이었다.

아무런 관심이 없는 척, 벌써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흥미를 잃은 척 하는 건 어디까지나 연기에 불과했으니.

“찾아 달라고는 했지만…… 만약 정말로 발견했을 때, 죽일 수 있는 여유가 된다면 그 목을 들고 제게 직접 찾아와주셨으면 합니다.”

“네가 이렇게 까지 말을 하는 걸 보아하니, 여간 내기가 아닌 듯 한데 주의할 점이 있느냐?”

“아마도 오러 나이트의 자질을 조금씩 개화하고 있을 겁니다. 살아만 있다면 지금쯤 벌써 일부를 터득했을 테고.”

주인공인 시엘 미드포드도, 그와 함께 했던 유페미아도 몰랐겠지만 오직 독자였던 나는 3인칭으로 서술된 소설의 내용을 읽었던 터라 주인공의 재능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마력을 품은 자들에게 정해진 길로 중에서.

개화하는 게 제일 까다로운 자질, 오러 나이트.

극의(極意)에 도달하는 순간, 외부로 발산하는 마력은 형태를 이루고 그것은 항마(降魔)의 기운을 머금는다.

일반적으로 마력을 형질 변환 시켜 마법이라는 이름으로 구현된 현상을 파훼하기 위해서는 간섭을 하는 게 첫 번째 수단이지만, 항마의 기운을 두른 오러 나이트의 일격에는 마법을 이루고 있는 구성식이 간단하게 박살나버린다.

그들의 마력 자체가, 일종의 파훼인 것이다.

그렇기에 항마(降魔).

“주인을 지키던 개가 달아났으니, 언젠가 다시금 저를 물려고 찾아오겠죠. 그러니 가문의 힘을 조금 빌리자고 합니다.”

중앙은 브뤼테인 가문의 힘으로 틀어막고.

브뤼테인 가문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변두리는, 아카데미에 모이는 귀족 자제들에게 넌지시 부탁을 하면 되리라.

중앙과 연줄을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는데 아직 만개도 하지 않은 오러 나이트를 꽁꽁 감추려 들지는 않겠지.

“초상화는 크리스가 화가를 구해오면 곧바로 완성하여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그래…… 걱정은 하지 말거라. 그리고 부담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릴 적의 일은 어릴 적의 일이다. 내가 가주가 되었다고 한들, 언제나 브뤼테인은 너의 뒤에 묵묵히 서있을 거란다.”

“……”

“그러니 가문을 의지할 때 마다 지나치게 저 자세로 나오지 않아도 돼. 등을 돌린 채로 말을 하고 있어서 얼마나 호소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형님의 진의를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이만 물러가보도록 하지요.”

집무실을 나와 천천히 걸으니, 뉘엿뉘엿 해가 떨어지는 바깥 풍경이 보인다.

여기도 겨울과 봄은 해가 떠있는 시간이 짧은 걸까.

잡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며, 욕실로 들어선 나는 간단히 목욕을 마치고 내 방으로 들어섰다.

“……!”

그러자 침상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던 유페미아가 어깨를 흠칫 떨며 나를 조심스레 바라본다.

“하, 할 게 없어서…… 책장에서 책을 좀……”

“괜찮다.”

멋대로 책을 꺼내 읽었다고 혼을 낼 생각은 없었으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의 의사를 물어보는 모습은 어째서인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마저 읽어라. 나는 할 게 있으니.”

의자에 앉아, 펜에 잉크를 적신 뒤 종이를 꺼내고 압정으로 고정한 다음……

‘너무 자연스러워서 할 말이 없군.’

압정을 박는 건 아마 도중에 종이가 흔들리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겠지.

이 몸에 베여든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업무 습관에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며, 이해했던 이사벨 론 피에르 제노바의 생애를 빼곡히 적어나갔다.

현재의 마력을 온전히 쏟아 부으면, 아마 40 ~ 50% 대의 구현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유클리드 등급의 원소 마법사로서의 성능은 온전히 뽑아내려면 60% 대의 구현율에 도달 해야겠지.

‘……’

그리 당장 이해했던 그녀의 생애를 적고나자, 나는 좌우대칭이 완벽히 어우러진 글자들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재능에 명필이라는 요소가 기입 되어 있기는 했지만, 일개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야 이런 게 후천적으로 가능해지는 걸까.

한편으로는, 반드시 이리 할 수밖에 없었던 페르젠의 삶에 안쓰러움과 연민을 느낀다.

* * * * *

탁.

끝없이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으며, 이사벨 론 피에르 제노바의 생애를 파고들었던 나는 아려오는 손목에 펜을 내려두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이만 하면 충분하다.’

수치화를 발동 시켜 확인 바로 오른 구현율은 고작 0.3%.

한 인간이, 어떤 한 인간의 생애를 완전히 이해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의 영역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부모와 자식, 아내와 남편도.

서로가 서로를 100% 이해할 수 있지는 않으니까.

“……”

시간은 어느 새 8시 40분.

얌전히 책을 읽던 유페미아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내심 무슨 책을 읽었나 싶어 표지를 살펴보니……

오복신(五福神)의 이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제일 내용이 가벼운 책을 꺼내들었군.’

오복신(五福神).

이 세계에는 다른 신들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만, 인간 세계에 관여해 축복을 내리는 이들을 묶어 오복신이라 칭한다.

그들이 관장하는 영역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5개.

수호.

사랑.

예술.

풍요.

지혜.

이 중에서도 예술을 관장하는 신이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인지도도 높다.

당장 로젠베르크에 가면, 예술을 관장하는 신이 축복을 내린 예술가 몇몇을 볼 수 있을 정도니까.

물론, 축복의 능력은 별 게 없었다.

다루는 악기가 주인의 생이 다하기 전 까지는 망가지지 않는 다거나 하는 등의 소소한 축복을 내려줄 뿐.

그래도 무려 신의 인정을 받았다는 명성.

그 하나가 그들의 값어치를 올려준다.

하지만 신들의 축복이 매번 소소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정확히는 수호와 지혜를 관장하는 신.

이들의 축복은 내려 받기도 힘든 만큼, 내려 받은 자들은 비교적 특별한 능력을 부여 받는다.

실제로 제 1 황녀는 지혜의 신에게 축복을 받아 자신이 계획하는 어떤 일에 관해서 길흉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다고 하니 말이 필요 없겠지.

똑똑.

책을 들어 책장에 꽃아 넣고 나니, 희미하게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나를 걸음을 옮겨 문을 열었다.

“저녁 식사에 관해서 가주님이 의사를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형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늘은 일찍 잠들겠다고 해라.”

“알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허리를 꾸벅 숙이고 뒤돌아서는 시녀를 보며, 나는 문을 닫고 방안을 은은히 밝혀주는 불을 모두 꺼버렸다.

삐걱!

그리고는 침상에 올라가, 달빛이 내리비춰주고 있는 유페미아의 모습을 조용히 감상했다.

매번 볼 때 마다 마음이 안락해지는 완벽한 황금 비율.

‘……’

그렇게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다, 나는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올라 손을 내려 유페미아의 아랫배에 손을 얹혔다.

지금 상황을 유지한다는 가정 하에, 굳이 유페미아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게 하는 것보다는 아이를 가지게 만드는 것이 더 확실한 수단이 아닐까.

그녀를 뒤덮고 있는 갈 곳 잃은 무력감에, 억지로 길을 제시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임신을 하여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상상이상으로 커다란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결과일 테니까.

애초에 아카데미에 들어가 교수가 되고 나면, 평소보다 그녀와 붙어 있는 시간이 더욱 적어지겠지.

“뭐, 하는……”

생각보다 깊게 잠들지는 않았나 보다.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는 내 손길에 눈을 뜬 유페미아가 잔뜩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더니 들추어낸 이불을 꼬옥 끌어안는다.

“아파……!”

그에 가느다란 발목을 붙잡아 힘을 주니, 놀라우리만큼 간단하게 코앞으로 끌려왔다.

그 과정에서 말려 올라간 원피스가, 새하얀 허벅지의 속살을 드러내며 시선을 잡아끈다.

이서진의 자아가 뒤섞인 도덕적 관념이 겁에 질린 유페미아를 보며 거부감을 슬며시 드러내고 있지만, 부부관계로 묶여 있다는 사실과 어차피 본래의 이서진 또한 그녀에게 충분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 누그러트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해탈한 성인의 자아가 뒤섞인 것도 아니다.

고작해야 평범하기 그지없던 현대 소시민의 자아.

욕망 앞에 휩쓸려 형체를 잃는 건 너무나 당연지사한 일.

“나, 나같이 천한 여인을 안아봤자……!”

“괜찮다.”

소매를 단정하게 걷어 올린 뒤, 나는 유페미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 놓으면 주변 사람들은 흉을 보지만, 그 대척점에 서있는 자가 볼품없는 목걸이를 걸고 있으면 자신들 멋대로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고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낸 뒤 부여하지.”

“시……”

“천한 것도 고결하게 만드는 것이, 브뤼테인의 이름값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싫어……”

“유페미아 엘 로렌느 루에르그이기 이전에, 너는 나의 아내다. 씨를 받아 후사를 안겨주는 건 의무이기도하지.”

유페미아의 몸부림은 너무나도 간단히 제압되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유리 같았으나, 그런 것을 어떻게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지는 이 몸에 너무나도 자연스레 베여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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