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006─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
“아……”
아무 말 없이 어둠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적안에 숨을 멈추고 있던 유페미아는, 이윽고 페르젠이 손을 뻗어 오자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러나 겁을 먹는 게 무색하리만큼, 페르젠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서 비틀거리는 몸을 침대로 꾸역꾸역 옮길 뿐이었다.
“가만히 서있지 말고 이리와라.”
마음 같아서는 바닥에 드러누워서라도 따로 자고 싶었으나, 저 남자가 그걸 허용해줄 것 같지는 않았기에 유페미아는 천천히 페르젠의 곁으로 다가가 등을 돌린 채 누웠다.
“유페미아 엘 로렌느 루에르그.”
“왜……”
“일어나라.”
역시, 얌전히 잠들 생각은 없었던 걸까.
페르젠의 목소리에 유페미아는 자그마한 손으로 이불보를 꼬옥 말아 쥐며 몸을 웅크렸다.
“앗!”
하지만 그것이 의미 없는 저항이라는 걸 알려주듯, 페르젠은 손을 뻗어 유페미아의 상체를 강제로 일으키고서는 한가득 짜증 서린 어투로 입을 열었다.
“베개는 올바르게 베고 자도록.”
수치화의 도움을 받아 기울어진 베개를 반듯하게 정리한 페르젠은 그제야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유페미아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몸을 눕혔다.
“시, 싫……!”
자신과 다르게 몇 배나 두꺼운 팔뚝이 몸을 옥죄는 것 까지는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초야를 치렀던 그날 밤,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찍어 눌렀던 커다란 손이 옷자락 안으로 들어오자 유페미아는 숨을 헐떡이며 몸을 비틀었다.
“가만히 있어라.”
“아, 악……!”
절로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아무런 배려 없이 가슴을 우악스레 움켜쥐는 손길에 유페미아는 몸을 파르르 떨며 애원하듯 자신의 손으로 페르젠의 팔목을 붙잡았다.
“너를 배불리 먹이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한지 알고 있나. 이 정도는 감내하도록 해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 수조차 없는 유페미아였기에, 무어라 답을 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해를 바라지 않았던 페르젠은, 유페미아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값비싼 도자기를 어루만지듯 몸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싱그러운 녹색을 바라볼 때면 편안함과 심신의 안정을 느끼는데, 페르젠에게 있어서 유페미아가 바로 그러한 존재였다.
이내 몸을 뒤덮은 취기와, 마력을 사용했던 피로, 강박의 발작을 억눌렀던 정신적 스트레스가 유페미아로 인해 천천히 해소 되자 페르젠은 몰려드는 잠기운에 저항하지 않고 편하게 몸을 맡겼다.
* * * * *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잠깐 들기는 했으나, 이 예민한 남자가 숙취 가득한 정신으로 눈을 뜨는 게 더욱 무서웠기에 유페미아는 잠자코 미약한 숨을 내쉬었다.
“읏……”
숨결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는 자신의 배를 따라, 얹힌 페르젠의 손이 잔잔하게 움직이더니 배꼽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 소름 돋는 감각에 몸을 흠칫 떠는 유페미아지만, 아무런 의사조차 없는 행동에 일일이 반응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이를 악물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리하여 다음날 아침,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유페미아가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건 숙취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있는 페르젠이었다.
“일어났나.”
“……”
아침 인사를 주고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기에 유페미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침은 이곳으로 가져오라고 말해뒀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목욕을 하고서 여기를 곧바로 떠날 거다.”
“그래……”
무성의하게 말을 하고서, 유페미아는 고개를 돌렸다.
조금 찝찝하다 싶었더니,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그리 아무런 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아침 식사가 들어오더니 눈앞으로 만찬이 펼쳐졌다.
“왜 그러지?”
“조금, 과하다 싶어서……”
“식탐이 좋은 듯 하여 내가 따로 말을 해두었다.”
“……”
유페미아도 여인 인지라, 페르젠의 그 말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어제를 되새겨보면 그리 착각할 만도 해서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이후, 간단히 배를 채우고 목욕을 끝마친 유페미아는 로베론 남작과 인사를 나누고 등을 돌리는 페르젠을 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브뤼테인에 도착하면 솜씨 좋은 재단사를 소개해주마. 그 때 까지만 그 볼품없는 옷을 입고 있어라. 북부의 미적 감각은 지나치게 실용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볼품없지 않아……!”
“……”
채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치고 들어오는 유페미아를 보며, 페르젠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훑은 뒤 말했다.
“볼품없다. 가능하면 티가 나지 않도록 한 듯 하나 꿰맨 자국이 보이고, 옷의 색깔은 하얀색이라 봐주기 어려울 만큼 혼탁해져 있지.”
“이건……!”
“그래. 돈이 없어서 그랬던 거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유페미아. 네가 진심으로 그 옷이 볼품없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실망할 것 같군.”
“……”
“더러운 걸 더러운지 모르는 자, 하찮은 걸 하찮은지 모르는 자, 볼품없는 걸 볼품없는지 모르는 자…… 그리 식견이 부족하고 소양이 없는 자들을 일컬어 천한 것들이라 부른다.”
추적추적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가 마차 안에서 잔잔한 운율을 만들어내며, 페르젠의 목소리와 뒤섞여 또박또박 유페미아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분명,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자신의 삶은 아무런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짓밟는 발길질에 이리도 비참히 쓰러져야 하는가.
때문에 유페미아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천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수용함으로써 이런 나를 아내로 삼은 당신의 교양과 식견에도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반론하려 했지만……
“비루하게 굴지마라. 합당한 지적에 애꿎은 자존심을 지키려 드는 행위는 본인만 더 추하게 만들 뿐이다.”
마치 그것을 미리 읽은 듯, 종지부를 찍어 주는 그의 말에 유페미아는 결국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 * * * *
‘골치 아파 죽겠군.’
이서진의 자아에 페르젠의 자아가 흡수되는 쪽으로 일이 풀리기는 했으나, 모든 관점에서 이서진의 자아가 더 많은 영향을 주는 건 아니었다.
예시로 이서진의 자아는 현대인인 만큼 윤리관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를 주었지만, 강박 증세를 비롯한 귀족으로서의 프라이드와 관련된 부분에서 만큼은 거의 건드리지 못했다.
솔직히 이제 와서는 두 자아를 나누는 기준 조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모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방금 전의 대화에 대해서 유페미아에게 어떤 식으로든 사과를 하여 관계를 개선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고는 있으나,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으니까.
귀족으로서 부족한 격식을 겸비하지 못해 훈계를 하였을 뿐인데 어째서 사과를 해야 하는가?
나는 너무나도 당연히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억지로 유페미아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작위적인 사과를 건네 봤자 좋지 못한 말이 튀어나가거나 더 악화만 될 뿐이라 여겨 입을 굳게 닫았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빗속을 지나, 마차가 조용히 나아간다.
* * * * *
중부─브뤼테인.
사람들은 이곳을 광석들의 모태가 되는 곳이라 부른다.
그 만큼 각종 광석이 잠들어 있는 광산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고, 철광산은 무려 6개에 달하는 터라 브뤼테인의 철 값이 오른다면 전운이 돈다고 봐도 무방했다.
야금술(冶金術)에 있어서는 가히 일류.
브뤼테인에서 이름 있는 대장간은 6 ~ 7개의 주문 제작만으로도 한 달간 가게를 닫아도 될 만큼 돈을 벌어들인다.
“눈을 떼지 못하는 군. 신기한가?”
“벼, 별로……”
북부를 지나 브뤼테인에 도달하는 시간 동안, 유페미아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많이 익숙해진 것 같았다.
정확히는 체념을 했다고 봐야겠지.
그래서 로베론 남작의 영지를 떠나가며 있었던 일 이후로는, 특별한 사고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전에는 용무가 있으니, 오후쯤에 직접 브뤼테인을 구경시켜주겠다. 그 간 마차에만 타 있어서 상당히 숨이 막혔을 테지.”
“용무가 있다면…… 시중만 붙여줘. 나 혼자서도 구경은 할 수 있으니까. 배려 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내 배려를 거절할 수 있을 땐, 몸이 아플 때뿐이다. 그래도 한 번은 눈감아 주자면 용무가 끝나고 줄곧 한방에 있으면 되겠군. 때마침 브뤼테인이라 눈치 보일 필요도 없으니……”
“아, 아니야!”
“의사표현은 제대로 해라.”
같이 있기 싫다는 티를 겉으로 팍팍 드러내지만 않았어도 상관이 없었을 텐데, 감정을 숨기는 일이 너무 미숙한 건지 아니면 이 페르젠의 몸뚱이가 지나치게 눈썰미가 좋은 건지……
“다, 당신하고…… 같이, 이곳을 구경하고 싶어……”
“잘했다.”
명령을 수행해낸 애완견을 칭찬하듯, 나는 손을 뻗어 유페미아의 녹색빛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오는 길에 그녀와 몸을 섞지는 않았어도, 과하리만큼 전신을 지분거리기는 했었기에 신체 접촉에 대한 경계심이 비교적 많이 허물어 진 듯 하다.
그리고 그 광경이 마치, 오랜 기간 사용해 손 떼가 묻은 물건을 보는 것 같아 은근히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끼익!
천천히 멈추어 서는 마차.
벌컥!
곧이어 밖에서 문이 열리고, 브뤼테인 가(家)의 집사인 크리스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크리스는 페르젠에게 있어서 상당한 호감을 지닌 인물이다.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대칭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대머리였기에.
“형님께서는 있으시나?”
“예. 가주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그러면 유페미아는 맡기겠다.”
“알겠습니다.”
먼저 걸음을 내딛어 저택으로 들어온 나는, 곧장 집무실로 걸어가 두 번 노크를 하고서 얌전히 기다렸다.
유페미아 때문에 북부로 출발하기 전, 페르젠은 브뤼테인의 현 가주인 자신의 형에게 특별한 부탁을 해둔 상태였다.
이내 안에서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어와도 괜찮다.” 는 대답을 해오자, 나는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이구나. 동생아.”
“여전히 건강해 보이시는 군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페르젠의 형이자 브뤼테인의 현 가주인 제레미아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릴 적, 대칭으로 인한 강박 장애 때문에 살인을 저지를 뻔 했던 대상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이제 괜찮은 걸 알지만, 이래야 너를 마주할 용기가 생기니 부디 이해해 주거라.”
“제게 이해를 바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레미아는 오드아이다.
그래서 어릴 때, 페르젠은 제레미아의 눈동자를 칼로 수차례 도려내려 들었고 그 때문에 반년 가까이 감금당한 경력이 존재했다.
지금 와서야 아무 탈이 없는 건, 감금당한 그 반년의 시간 동안 제레미아의 오른쪽 눈의 푸른 색소가 왼쪽의 붉은 눈과 조화를 이룰 만큼 짙어졌기 때문이다.
아마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불균형을 초래했던, 그 당시 색소가 옅은 푸른 눈을 칼로 도려내는데 성공했어도 페르젠이라면 한 쪽 눈 밖에 없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필시 마저 파내려 들었겠지.
“이사벨 론 피에르 제노바의 시신은……”
“당연히 낙찰 받는데 성공했다. 재력으로 우리를 찍어 누를 수 있는 곳은 존재하지 않으니.”
이사벨 론 피에르 제노바.
악명이 자자했던 쾌락 살인마이자, 상계(上界)──아폴리온 등급의 원소 마법사.
정확히 24년 전, 페르젠이 태어나기 전에 붙잡혀 목숨을 잃고 그 시신은 황궁에 보관되었다.
그리고 제노바 백작가는, 이사벨이라는 마녀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깔끔히 멸족 당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가문이었다.
“다행이군요.”
그러한 이사벨의 시신을 황실은 경매로 내놓았고, 그 시점이 북부에 있을 시간과 겹쳐 부득이하게 가주인 제레미아에게 대리를 맡겼다.
아폴리온 등급의 원소 마법사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높았지만, 당시 페르젠이 더욱 욕심을 냈던 건 그녀가 마력을 전류로 형질 변환할 수 있는 원소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마법은 파훼가 가능했으나, 빛의 속도는 인간이 날고 기어봤자 항거할 수 없는 것.
파훼를 위해서는 간섭을 해야 하지만, 간섭할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에 미리 대비를 하는 게 최선.
때문에 원소 마법사에게 있어서 마력을 전류로 형질 변환할 수 있는 건, 하늘이 내린 축복이다.
“다만……”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문제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로젠베르크 자작가의 막내딸이 낙찰 금액의 두 배를 지불 할 테니 자신에게 팔아 달라고 했을 뿐이니까.”
“그 정도로 황금이 썩어 넘치지는 않을 텐데.”
로젠베르크.
문화와 예술의 성지.
브뤼테인의 세공술을 이류(二流)로 전락시킨 곳.
돈이 부족한 곳은 아니겠으나, 재력으로 브뤼테인에 비빌 수는 없는 곳이다.
애초에 황실에 잘 보이기 위해 일부러 다른 귀족가들을 포섭해 바람잡이를 부탁한 다음 잔뜩 거품 낀 가격으로 사들였을 텐데.
“물론, 납부 방식은 분할로 하겠다고 하더군.”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네가 거절하면 이 말도 전해달라고 했다.”
“?”
“동등한 조건으로, 당신의 흑마법에 도전하겠다고.”
그게 무슨 듣도 보도 못한 개소리인가 싶었으나, 4년 전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당시 페르젠은 흑마법사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위해 동등한 조건에서의 구현 대결을 신청 받았는데, 당연히도 사체 이해력과 사체 친화력이라는 재능이 있는 이상 겉으로 동등한 조건을 달아도 페르젠을 능가할 수 있는 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당시의 페르젠은,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브뤼테인 가문의 이름으로 청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걸 뜻하는 거리라.
“당돌하군요.”
별 다른 일이 없다면, 로젠베르크 자작가의 막내딸은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될 테고 거기서 흑마도학 교수가 될 나에게 수업을 듣게 될 터.
“지금 브뤼테인에 있습니까?”
아직 본적도 없는 예비 학생이, 벌써부터 청출어람을 시도하겠다는 귀여운 포부를 밝히자 나는 당장이라도 그 얼굴을 한 번 마주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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