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4화 (4/260)

EP.4 004─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

“정말 시중은 필요 없으십니까?”

페르젠이 세바스와 함께 데려온 하녀들의 말에 유페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들을 내보내고 따스하게 데워진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아……!”

몸을 살짝 숙이자말자, 아릿한 통증이 찌르르하게 치솟아 유페미아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허리 쪽으로 손을 얹혔다.

“……”

아침에는 경황이 없어서 잘 몰랐으나, 지금 자신의 몸을 둘러보니 어젯밤 정사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몸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다.

지워지지 않은 걸 알면서도, 자신의 손으로 열심히 피부가 새빨갛게 부어오를 만큼 문질러보지만 결국 남는 건 따끔한 통증 뿐.

찰박.

여기서 더 고집을 부려봤자 자신만 더 비참해질 걸 알았기에, 결국 유페미아는 손을 내리고 대충 목욕을 한 뒤 저택을 나와 영지를 거닐었다.

“……”

돈이 없어서 방치 해둬야만 했던, 오랜 세월 속에 무너진 성벽이 한참 보수되고 있다.

그리고 나눠주고 싶어도 나눠줄 식량이 없던 텅 빈 창고에는 식량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해당 식량을 무료로 배급 받는 영지민들의 줄이 아침부터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이내 멀찍이 서있던 자신과 눈이 마주친 몇몇 영지민들이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떨어뜨리자, 유페미아는 자신이 여기에 서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조용히 시선이 더 끌리기 전에 걸음을 옮겼다.

사박.

사박.

사박.

그 남자──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의 말대로,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제외하면 더 할 나위 없는 최고의 결과다.

몇 년 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룰 수 없던 것들이 거짓말처럼 깔끔히 해결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일까.

유페미아는 그 시간들이 그리웠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몇 개월 되지 않던.

시엘 미드포드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혼자 아등바등 거리지 않고, 잠시나마 누군가를 의지할 수 있었던 기억이라 그런 걸까?

‘무사하기를 바라……’

영지에 단 한필 밖에 없던 말에 묶어 태워 보냈으니 살아남았다면 추후 그 말을 팔아 생활에 필요한 돈을 얻어 다른 곳에 정착을 하면 되리라.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볼품없는 자신을 주인처럼 섬기며 따라준, 듬직한 기사 같았던 사내에게 보내는 초라한 헌사니까.

사실 그 때의 그 순간, 멀어져 가는 시엘이 자신에게 억지로 손을 뻗는 모습을 보고 문득 함께 영지를 탈출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있어야 이곳의 영지민들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우를 받게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판단 하에, 반쯤 올라갔던 손을 내리고 조용히 눈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지켜만 봤다.

물론, 이제 와서는 의미가 없는 걱정이 되었다.

그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결과는 좋았으니까.

때문에 유페미아는 길을 잃은 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그 남자,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이 영지민들에게 가혹하게 굴었다면 어찌되었든 자신이 해야 할 무언가라도 있었을 텐데.

사박.

사박.

어디로 걸음을 내딛어야 할지 모르겠다.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동기를 잃었을 때, 사람은 이리도 무력해지는 법일까?

단순히 개인의 행복을 원했다면, 그 때 시엘과 함께 영지를 탈출했을 터다.

그 선택은 지금의 결과로 매몰되어버린 비용.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버린 시간.

사박.

“유페미아 엘 로렌느 루에르그.”

“……”

낮게 내려 깔리는 중저음의 목소리.

자신의 앞에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를 보며, 유페미아는 고개를 올려 지독히도 독선적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물을 흘릴 거라면, 두 눈으로 모두 흘려라.”

“하……”

울고 있는 꼬라지가 싫다는 것을 저리 빙빙 돌려 말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일까.

“마차가 준비 되었다. 따로 짐을 챙길 필요는 없으니 따라 오도록. 지금 바로 이곳을 떠난다.”

“그래……”

대꾸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단순히 목줄을 채워 자신을 통제하려 드는 것이었다면 나았을 텐데, 눈앞의 남자는 그보다 더욱 잔혹했다.

새장 속에 갇힌 새는 자유를 갈망하며, 언젠가 푸르른 하늘을 향해 비상하겠다는 꿈을 품은 채 자신의 날개를 푸드덕 거리겠지만……

날개를 뜯긴 새는 그럴 수가 없었다.

눈앞의 남자, 페르젠에게 있어서 자신은 집안을 꾸미는 장식품이자 죽어서 박제된 짐승 따위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가 하는 말을 자신은 들어야하지만, 자신이 내뱉는 말은 마치 벽과 대화를 하듯 그에게 전달되지 않으니까.

“출발하지.”

정말 오랜 세월 지내온 자신의 영지, 루에르그를 떠난다는 현실감조차 들지 않게 아무런 흔들림 없이 마차가 움직인다.

아마 창밖으로 점점 멀어져가는 영지의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면, 유페미아는 떠나가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 봐……”

눈이라도 감고, 잠시 숙면이라도 취해주면 좋을 텐데.

자신의 앞에 마주 앉은 사내, 페르젠은 그러지 않고 턱을 괸 채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기만 한다.

소름이 돋을 만큼 붉은 적안에는 이따금 즐겁다는 이채가 스쳤으니, 어젯밤 자신을 원하는 대로 희롱하며 안았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치솟는 수치심에 옷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바짝 오므린 뒤 오른손을 왼쪽 어깨에 올려 가슴을 감싸 안아 보지만 훑고 지나가는 듯한 감각이 피부위로 느껴지는 착각이 들었다.

“……”

그에 유페미아는 의미 없을 반항을 포기하고, 편하게 머리를 기댄 뒤 눈을 감고서 얌전히 그의 볼거리가 되어주었다.

심신이 지친다.

수면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도피처.

몰려드는 수마를 이불 삼아, 유페미아는 잠을 청했다.

* * * * *

‘하필 머리를 기대도……’

내 기준, 맞은편에서 왼쪽으로 머리를 기댄 채 고른 숨을 내뱉는 유페미아를 보며 나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감각에 얼른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겨 턱을 괴었다.

유페미아가 앉아 있는 자리와 내가 앉아 있는 자리가 대각으로 알맞은 대칭이 되자 비로소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정말…… 사서 고생을 하는 몸이다.’

추후 사망하여 관에 들어갈 때, 관의 좌우대칭이 맞지 않는다면 이 몸뚱이는 어쩌면 관에 처박히는 걸 죽어서도 거부하지 않을까라는 의미 없는 생각이 들었다.

「 특수능력 」

▶???

▶수치화

북부를 지나, 중부의 브뤼테인까지 가려면 시간이 상당히 소비되기에 그 시간들을 가능하면 알뜰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나는 상태창의 일부──표기 되지 않는 특수능력을 추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이 표기 되지 않는 특수능력은 이로워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단점이 된다.

왜냐하면 이 몸은 어찌 되었든 소설의 설정상 주인공의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니까 재능이 출중할수록 그 만큼 주인공의 잠재능력도 뛰어나다는 공식이 성립 되겠지.

‘기억을 되짚어 보자.’

악착같이 살아남는다라는 소설은, 세계관의 설정을 따로 풀이해둔 설정란이 꽤나 활성화된 작품이었다.

그리고 애정 ‘했던’ 작품인 만큼, 나는 최신화를 읽고 나면 그 설정란을 빈번히 드나들며 열람을 했기에 세계관의 설정에 관해서는 온전히 기억을 하고 있다.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은 중계(中階)──유클리드 등급의 흑마법사이니 이와 관련된 설정을 대조해보면 표기 되지 않은 특수 능력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으리라.

흑마법사.

보통의 문화매체에서의 설정은 천시 되고, 금기시 되며, 대륙의 공적으로 언급 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흑마법사의 아이덴티티는 사체 사역술.

본인의 자질과 기량, 시체의 손상도와 해당 시체의 이해도를 비롯한 익숙함에 따라 생전의 능력을 최대 90% 까지 구현하는 게 가능했다.

때문에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일수록, 오러 나이트가 되거나 원소 마법사가 된 이들의 시신은 영구히 부패를 막아 가문에서 엄중히 관리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설정과 어긋남이 없군.’

재능에 기입된 사체 이해력과 친화력 때문에 돋보이는 자질을 보여주었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가지만, 적어도 설정에 언급 되지 않은 무언가를 보여주었다거나 설정 붕괴를 일으킨 요소는 짚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이마를 짚어 조금 더 과거를 되새긴다.

이 소설에서 흑마법사는 사체를 사역하는 능력과 별개로 명계(冥界)와 거래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주선 되는 명계의 괴이(怪異)는 무작위이고, 대가로 바쳐야 하는 건 높은 값어치를 가진 재물.

그 중에서도 단순히 값이 비싼 것 보다, 오랜 시간 해당 값어치를 유지한 것일수록 등급을 높게 쳐준다.

때문에 해당 능력은 가난한 자에게 있어서 사실상 의미가 없는 겉치레.

‘찾았다.’

계속 해서 과거의 기억을 되짚던 나는, 드디어 설정과 어긋나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을 알아냈다.

흑마법사는 기본적으로, 자신만의 제단을 보유한다.

그리고 의식을 치러 한 번이라도 거래를 성사시키면 해당 제단은 아공간이 되기에, 당연히 페르젠도 그 편리함을 얻기 위해 명계의 괴이와 거래를 시도했다.

문제는 처음 거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선된 명계의 괴이가 바친 제물이 과하다며 일정 부분을 돌려주었다는 점이다.

작품의 설정에는 일정 거래 횟수를 달성하여, 흔히 말하는 VIP가 되지 않는 이상 제물의 삭감을 해주지 않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하지만 겨우 이게……’

표기가 되지 않는 불편함을 선사할 수준일까?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 더 기억을 짚어 보려했으나, 얌전히 나아가던 마차가 갑자기 덜커덕 거리더니 멈추어 선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부석에 앉은 마부가 무덤덤하게 자그마한 칸막이를 열어 바깥의 상황을 어렴풋이 전달해왔다.

그에 나는 몸을 일으켜 깊게 잠들어 있는 유페미아를 힐끔 내려다보고서는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내렸다.

“……”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무척이나 투명하고 끈적거리는 실선 같은 것들이 내 몸에 덕지덕지 들러붙어온다.

동시에 저 멀리서 보이는 희멀건 무언가, 페르젠의 기억을 토대로 유추 하자면 북부 지방의 설산에 서식하는 에르베트 아라크네이리라.

‘새끼를 꾀고, 사냥하는 법을 알려주러 내려 온 건가.’

에르베트 아라크네의 거미줄을 일반인이 치워내려면, 기름을 두른 뒤 불을 붙이고 10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당연히 그 정도의 시간을 주면 사냥 당하고도 남기에.

나는 품안의 주머니로 손을 뻗어 안경을 꺼내 썼다.

대칭(對稱)에 있어서 극단적인 강박장애를 가지고 있는 페르젠이기에, 안경을 착용하는 행위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팅──!

사방팔방으로 빼곡히 늘어선 거미줄이 일제히 흔들리며, 새끼 에르베트 아라크네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온다.

이어 그러한 새끼 아라크네들의 몸통에 새겨진 어설픈 무늬들이 대칭을 이루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본능적인 불쾌함에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스륵.

페르젠이 제단으로 삼은 건 왼손의 반지.

그리고 그 왼손의 반지에 새겨진 아공간을 통해, 나는 브뤼테인 가(家)의 27대 가주였던 바이에른 폰 그리엘 브뤼테인의 시신이 잠들어 있는 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흑마법사의 사역술은 해당 사체에 관한 익숙함에 영향을 받는 만큼, 같은 혈통이라는 건 적지 않은 이점을 제공한다.

철컥!

마력으로 옭아매어 사역하는 것이나, 나는 아주 당연히 예의를 차리는 것처럼 관을 열고 몸을 일으키는 바이에른 폰 그리엘 브뤼테인을 보고서 목례를 취했다.

이것은 혼이 없는 죽은 자가 되어서도, 가문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일념으로 육신을 남긴 전대(前代)를 위한 감사(感謝).

‘확실히……’

페르젠이 혀를 내두를 만큼, 강한 선민의식을 가진 채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을 내뿜을만하다고 느낀다.

흑마도(黑魔道).

지나간 과거와 흘러가는 현재를 이어, 죽은 자와 산자가 공존하게 만들어주는 연결고리.

따──악!

이윽고 27대 가주, 바이에른 폰 그리엘 브뤼테인이 생전에 애용했던 지팡이를 바닥에 묵직하게 내리쳤다.

다음화 보기―――――――――――――――――――――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