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001─히로인을 NTR 해버린 악당이 되었다.
사회 초년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여유가 있을까.
당연히 여유 없는 타이트한 삶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퇴근 이후, 또는 황금 같은 주말에 즐길 수 있는 취미 거리는 생각 보다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 또한, 취업을 하기 전 까지는 꾸준히 즐겨오던 배드민턴을 접고 꿀 같은 휴식 시간에는 집에서 피로를 풀며 소설을 읽는 게 낙이 되었다.
남자끼리 분홍빛 기류를 풍기며 엉덩이를 대주는 BL물만 아니라면, 여성향이 그윽한 로맨스 판타지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진성 누렁이.
“아니? 시발…… 이거는 진짜 아닌데.”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발작 버튼은 존재했다.
아니,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이라면 이 요소는 공통된 발작 버튼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NTR.
“……”
그래, 소설 자체의 분위기가 초반부터 많이 어두웠지만 첫 작품치고는 상당한 퀼리티가 있어 유료화를 하고도 재미있게 따라 가고 있던 작품이었는데 해당 소설의 히로인이 악역과 강제적인 혼인을 치루고 초야를 억지로 당하는 묘사를 보며 거짓말이 아니라 피를 토할 뻔 했다.
특히나 초반부터 암울 했던 소설의 분위기를 애틋하고 달달하게 환기 시켜주는 게 해당 히로인과의 만남부터였기에 나를 포함한 독자들이 가지는 애착이 상당한 편이었는데.
‘하……’
주인공의 각성을 위해 희생 되는 버림패 히로인이더라도 이런 취급은 절대 받지 않으리라.
떨리는 손가락을 뻗어 코멘트 창을 누르니, 평소에는 많아야 10개 달리던 코멘트들이 폭주 하고 있었다.
아무리 첫 작품이라지만, 이런 전개는 반발을 떠나서 그냥 소설 자체가 망하게 되리라는 걸 모르고 있었을까.
편집자는 도대체 뭐했던 거지?
혹시 구매수가 높지 않은 작품이라 조기 완결을 내기 위한 포석을 까는 걸로 허락한 걸까?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나 같은 누렁이도, 이런 전개에는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하차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배신감이 컸기에.
악수(惡手)라는 건, 어쩌면 인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느 때와 다르게, 오늘 작가의 후기란은 그 어떤 글도 적혀 있지 않은 공백뿐이었으니.
일반적으로 반발이 심한 전개가 펼쳐지더라도, 다음편까지는 기다려주는 독자들이 많다.
어떻게든 작가가 수정을 하든, 그대로 다음편을 찍어내서 해당 내용을 이끌고 가겠다는 의지를 표력하고는 할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 다음을 기다려주고 싶지 않았다.
첫 작품이 의외의 인기를 얻어 유료화 까지 성공하자 어쩔 줄 몰라 하는 귀여운 작가의 후기를 보고서, 멘탈이 무너지지 않도록 항상 격려를 해가며.
월급이 들어오면 소소한 후원도 하고, 나만의 작은 소설을 대하듯 보물처럼 아꼈는데.
오늘 만큼은 무려 5700자나 되는 장문의 글을 코멘트에도 쓰고, 쪽지로도 보내고, 서평에도 나름 격식은 차렸지만 실상 작가를 감정 쓰레기통이라고 여기듯 지금의 내 기분을 진득하게 배설 해버렸다.
가끔 후기에 나에 대한 감사와 코멘트에 대한 답변을 해주기도 했으니, 작가도 내 닉네임은 기억하고 있으리라.
‘모를 리가 없겠지.’
항상 자신을 격려해주며, 후원해주던 독자가 돌변해서 돌을 던지는 모습을 보고 이번 NTR을 읽고 독자들이 느꼈던 참담한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까.
“후……”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나는 불쾌한 기분으로 내일 출근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 * * * *
열흘의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악착 같이 살아남는다.’ 라는, 최악의 악수를 두었던 소설의 다음편은 올라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수정하겠다는 공지도 없고, 첫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마 이대로 잠적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차라리 이번 악수를 교훈으로 삼고, 필명을 갈아엎은 뒤 새로 활동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히로인을 NTR 시키는 작가라는 타이틀은 어쩌면, 도중에 BL으로 노선을 틀어버리는 작가, 연쇄 연중마 작가라는 타이틀 못지않게 무척 가혹한 꼬리표가 될 테니.
* * * * *
“끄……”
황금 같은 토요일, 오랜 만에 만난 친구들과 진득하게 술을 마시고 자취방으로 돌아온 나는 비틀 거리는 몸을 간신히 침상에 뉘이고 곯아 떨어졌다.
제발 다음날 아침, 지옥 같은 숙취가 조금만이라도 약하게 찾아오길 간절히 바라며.
‘!’
다행히도 그런 내 바람이 이루어졌는지, 눈을 떴을 때 나는 일말의 숙취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생생하고 맑은 정신으로 목격해야 했던 충격적인 광경은 이루 말할 수가 없으리라.
내 밑에 깔려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슬픔이 가득한 눈동자로 울음 없이 아련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봄을 품은 듯한 녹색 머리의 여인.
‘미친!’
설마 어제 밤, 집으로 흐느적거리며 돌아왔던 기억은 망상에 불과하고 사실은 성범죄라도 저질렀던 걸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듯 앞으로의 암담한 수순이 뇌리에 선명히 그려지자, 나는 헐레벌떡 거리를 벌리려 했으나 어째서인지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 동기화 진행 중…… 현재 11% 」
‘무슨?’
그리고 그 때 귓가에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와 함께, 내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몸이 창가로 저벅저벅 걸어가 연초를 입에 물고 호롱불에 고개를 숙이더니 불을 붙인다.
“유페미아 엘 로렌느 루에르그.”
멋대로 연기를 들이쉬더니 내뱉고.
멋대로 입이 움직여 말을 한다.
‘이건……’
꿈인가?
그리고 유페미아 엘 로렌느 루에르그라는, 저 침상에 초라하게 누워 있을 여인의 이름으로 추정 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작금의 상황이 꿈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악착 같이 살아남는다.’ 라는 소설에서 등장하는, 히로인의 풀 네임(Full Name)이니까.
「 동기화 진행 중…… 현재 38% 」
‘하지만……’
자각몽은 보통, 꿈이라는 걸 인지하는 순간부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지 않나?
더군다나 아무리 꿈이라도, 더럽게 불쾌한 히로인의 NTR 이후의 장면을 이리 적나라하게 지켜 봐야한다니 짜증이 치솟는다.
내 몸인 듯 내 몸이 아닌 듯한, 연초를 피우고 있는 이 작자가 아마도 히로인을 NTR 해버린 악역──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이겠지.
아니, 유페미아와 혼례를 맺고 루에르그 백작위를 승계하게 되었으니 페르젠 폰 슈바이크 루에르그가 되리라.
「 동기화 진행 중…… 현재 64% 」
‘……’
무시 하려고 해도, 계속해서 귓가에 들리는 동기화 진행 관련의 소리가 무척이나 거슬린다.
100%를 달성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꿈에서 깨어나는 걸 암시하는 것 같지는 않고, 이 페르젠의 몸을 내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되려나?
만약 그리 할 수 있다면, 당장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려서 자살 한 다음 꿈에서 깨어나야겠다.
“인형처럼 내게 안기는 건 나름의 반항이었던가? 그러면 끝까지 그 연기를 이어 나가지 그랬나.”
귀공자라고 묘사가 되더니, 목소리 하나 만큼은 간드러지게 듣기 좋은 중저음이다.
“인형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텐데.”
그 한마디를 내뱉고, 창가로 고개를 돌려 연초를 피우는데 창가에 비친 모습이 빌어먹을 만큼 준수하다.
새로운 헤어 스타일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정돈도 되지 않은 채 흐트러진 단출한 검은 머리가 어찌 이리 세련되어 보일 수가 있는 건지.
「 동기화 진행 중…… 현재 83% 」
외모만 봤을 때는, 페르젠이 주인공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수준이었다.
배가 불룩 튀어나온 중년의 귀족에게 NTR을 시키는 건 너무하다 싶어서 이리 노선을 꼬았나?
아니다.
애초에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히로인을 NTR 시킨다는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았겠지.
「 동기화 진행 중…… 현재 91% 」
“사람은 침상에 누웠을 때, 가장 생각이 많아진다고 하지.”
「 동기화 진행 중…… 현재 98% 」
“그러니 그곳에서 혼자 잠자코 생각한 뒤에 체념해라. 네가 나의 소유가 되었다는 현실을.”
때마침 연초를 다 피운 페르젠이 아무 미련도 없이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선다.
「 동기화 진행 중…… 현재 100% 」
「 동기화 완료. 」
그리고 아무도 없는, 춥고 씁쓸하고 어두운 복도로 나섰을 때 동기화가 완료되었다는 소리와 함께 나는 페르젠의 몸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시야뿐만이 아니라, 몸의 다른 오감(五感)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이 이게 정말 꿈인지 현실인지 제대로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다.
철컥!
휘이이잉!
“흡!”
굳게 다물린 복도의 창문을 열어, 북부 최악의 영지 루에르그의 밤바람을 맞이하며 숨을 들이마시니 폐가 얼어붙는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절실히 알게 되어 곧장 창문을 도로 닫았다.
“읏!”
그러다 맺힌 고드름에 손가락이 긁히자, 알싸한 고통과 함께 핏방울이 바닥으로 뚜욱 뚜욱 흘러내린다.
“……”
이건, 정말 자각몽이 맞는 걸까.
밖으로 뛰어내려 페르젠을 죽이고 꿈에서 깨어난다는 선택지를 감히 이행 할 수도 없을 만큼의 선명한 아픔.
때문에 나는, 아무런 말없이 한참을 복도에 서있었다.
그러길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뜬금없이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뒤이어 그런 나, 이서진의 기억과 대비되듯 뒤따르는 페르젠의 어린 시절이 뇌리에 각인 되고.
차례차례, 그 과정을 반복하며 이서진과 페르젠의 기억이 번갈아가듯 엎치락뒤치락 하며 완전히 자리를 잡는다.
본디 나, 이서진의 나이는 27살.
페르젠의 나이는 설정상 24살.
고작이라 해도 좋을 3년의 차이이지만 페르젠의 자아가 이서진의 자아를 삼키는 게 아닌, 이서진의 자아가 페르젠의 자아를 삼키고 하나로 동화되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
사실 삼켰다고 해서, 페르젠의 자아가 소멸해버렸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받아들여, 흡수했다고 해야겠지.
실제로 골 아픈 상황에서 본디 내가 자주 취하던 습관이 검지의 옆 부분을 이빨로 잘근잘근 씹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페르젠의 습관대로 입술을 짓씹고 있다.
“아……”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하던 찰나, 어둠을 몰아내는 달빛이 은은하게 복도의 창가로 스며들어오더니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허공의 글자들을 내 눈에 각인시켜주었다.
「 재능 」
▶사체 ■■력
▶사체 ■■력
▶■필
▶■모■정
「 성격 」
▶강박■■
▶아집
▶독■■군
「 특수능력 」
▶???
▶수치■
한글이 아니다.
제국──에르네스어.
페르젠의 기억, 특히나 지식과 관련된 부분은 동화되는 속도가 느렸기에 드문드문 이해가 가지 않는 글자들이 보였다.
“하……”
새해 신연맞이로,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상태창을 외쳐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더니.
“……”
철컥!
망부석처럼 넋을 놓고 서있다, 나는 다시금 복도의 창문을 열어 북부 최악의 영지인 루에르그의 밤바람을 맞이했다.
휘이이잉!
당장이라도 살이 베여 나갈듯한 칼바람.
얼마 열어 놓지도 않았는데, 귓가가 얼어붙어 떨어져 나갈듯한 통증이 올라온다.
그에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악착 같이 살아남는다.’ 라는 소설 속의 악역.
브뤼테인 후작가의 차남이자, 주인공의 히로인을 강탈한 개새끼,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이 되었음을.
“하하……”
NTR이 싫어 물어뜯었더니.
친히 NTL로 장르를 바꿔 이런 선물을 해줄 줄이야.
재주도 좋지 않은가.
더군다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게끔 초반부로 진행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이미 물이 엎질러진 상태로 보기 좋게 스킵 해주었다.
그 소설을 쓰던 작가는 신(神)이라도 되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지금의 내가 후회를 하고 있다는 거겠지.
코멘트, 쪽지, 서평으로 작가를 격렬히 비난했던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가 후회하는 건 오직 하나.
코멘트, 쪽지, 서평에 그래도 나름 격식을 차리며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작가에게 감정을 배설했었는데.
차라리 그러지 말고, 작가의 증조와 고조를 비롯한 족보까지 모조리 싸잡아 욕을 해버릴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나는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자연스레, 페르젠의 어투로 한 마디를 내뱉은 나는 복도의 창가를 천천히 내리 닫았다.
만약 평행이론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내가 거기서 히로인이 악역에게 NTR 당하는 전개를 환영할 세계는 없으리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안녕하세요 ^_^
J와는 편수 하나 차이의 딜레이를 둘 예정입니다.
플러스 등록이 되면 마저 업로드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닉네임 가지신분 돌려주실수 있을까요?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