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 네토리-426화 (426/428)

Chapter 426 - 은밀하고 음란하게(3)

거유가 될 수 있는 방법, 그 방법을 찾았다는 세실리아의 이야기는… 내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중요한 이야기였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세실리아. 나는 멍한 얼굴로 그녀가 하는 말에 집중했다.

“후훗, 이상하지 않아요? 그래도 아직 성장기인데… 1mm도 자라지 않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생각을 바꿔 봤어요. 신체가 고정된 건 아닐까… 하고요.”

“……고정됐다고?”

“네에. 아버지는 둔감하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실은 엉덩이도, 키도, 그리고 머리카락도 전혀 자라지 않았답니다.”

“…그, 그랬어?”

“네, 그리고 이건 제 이야기만이 아니에요. 소피 언니도, 혜아 아줌마도… 소환된 모습 그대로예요. 뭐어, 두 사람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말이에요.”

세실리아의 충격적인 고백.

아무리 둔감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것을 몰랐을까? 하다못해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는 것 정도는 알았어야 했는데… 내가 정말로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변명을 하자면 할 수 있었고, 헌터 일과 네토리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못 알아 봤다고 얼굴에 철판을 깔 수도 있었지만…

아무튼 세실리아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미안했다.

“후후후… 아니, 애써 모른 척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모르는 척?”

“혜아 아줌마 얘기예요. 본인 말로는 살이 안 찌는 체질이라고 하는데… 흥, 하루종일 맥주만 마시는데, 어떻게 살이 안 쪄요. 분명히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걸 거예요. 그 아줌마, 항상 그러잖아요.”

“으음…”

음, 그러고 보니… 소피아도 그렇고 위지혜도 그렇고 야식을 안 먹는 날이 없었지. 밤에 먹으면 살찐다고 얘기를 해 줘도, 매번 억지로 못 들은 척 하던데… 그게, 다 알면서 그랬던 거구나? 미안했던 감정이 조금 식었다.

“반면에, 현아는… 안 그래도 큰 가슴이 더 커졌죠.”

“…그랬지.”

“그래서 알게 됐어요. 제가 아직도 빈유인 건 아버지 때문이란걸요.”

“?!”

“후훗, 정확히는 아버지의 능력 때문이란걸요.”

유력한 가설을 세운 다음 몇 달에 걸쳐 연구를 했다는 세실리아. 누구보다 천재인 그녀가 연구 끝에 알아낸 것은… 히로인들의 신체가 나의 능력, 그러니깐 ‘히로인 네토리’에 의해 고정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내 능력이… 두 세계를 연결해 주고 있다는 거야?”

“네에. 제가 확인한 아버지의 능력은, 지금 이 세계를 저희가 살던 세계와…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세계와 연결해 주는 ‘통로’예요.”

“통로…”

“그리고… 이쪽 세계에서 소환된 저와 소피 언니, 그리고 혜아 아줌마는 지금 그 능력에 종속되어 있어요.”

“…종속?”

“아, 종속이라고 무조건 나쁜 건 아니에요. 저희가 이쪽 세계에서 존재하기 위한 ‘에너지’를 아버지의 능력이 대신 지불해 주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래서일까요? 그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저희의 신체가 고정되고 말았어요.”

“고정되었다고?!”

“네에.”

“그럴수가…”

로맨스 판타지 세계관의 세실리아는 빈유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세실리아도 빈유다. 그런데, 둘 중 하나의 모습이 달라진다면… 로판 세계관과 현실을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세실리아의 모습을 바꾸기 위해서 추가 에너지를 써야한다. 하지만 그건 아까우니깐… 그것을 막기 위해서 신체를 고정시켰다.

……라고 이해하면 되겠지?

아, 복잡해.

머리가 아팠지만… 그래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달라진 모습으로 세계관을 이동할 경우, 세계관의 억지력이니, 위화감이니… 하는 알 수 없는 무언가 때문에 생각하지도 못했었던 트러블이 발생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 그것을 미리, 그리고 효율적으로 차단하겠다는 게 ‘히로인 네토리’의 판단. 그리고 그 판단 때문에 일어난 웃지 못할 사건이… 바로 작금의 사태였다.

“그런데 방법을 찾았다며. 그럼 설마…”

“맞아요. 바로 독립이에요.”

“도… 독립?”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저도 이제 독립해야죠.”

“그, 그래도 독립은…”

“후훗,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한테서 독립한다는 얘기가 아니니까요.”

“그럼… 설마?”

“네에. 아버지의 능력에서 벗어나… 아버지께 직접 귀속될 거예요.”

그녀가 살던 세계와 현실 세계를 이어주는 ‘히로인 네토리’. 거기서 독립하여, 내 영혼과 직접 계약을 맺는 게… 바로 세실리아가 말한 ‘가슴을 키우는 방법’이었다. 정말이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 그러나 세실리아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위험한 건 아니지?”

“전혀요.”

“믿어도 되는 거야?”

“그럼요.”

“으음… 불안한데.”

“계약 내용은 완전 귀속. 그러니 아버지께 문제되는 일은 전혀 없을 거예요.”

“리아야, 네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잖아.”

“어머? 후후후… 아버지의 소유물이 될 수 있는데, 제가 걱정할 일이 뭐가 있어요.”

“소, 소유물?!”

“네에에… 아버지의 소유물이요.”

너무나도 행복해하며 얼굴을 붉히는 세실리아.

그러나 나는 솔직히 말해서 고민이 되었다. 괜히 ‘히로인 네토리’를 건드렸다가… 이상한 일이 일어날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가슴 좀 키우겠다고,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머릿속이 점점 더 아파왔다.

“아버지. 그러니 부탁할게요.”

“리아…”

“아버지와 함께 늙어갈 수 있도록… 저를 받아 주세요.”

“……뭐어?”

그런데… 내가 바보였다. 누구보다 똑똑한 세실리아가 그렇게 단순한 생각을 했을 리가 없잖아. 세실리아는 그저 가슴 좀 키우겠다고 연구를 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방에 틀어박혀 그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이었다.

“저 혼자 남기는 싫단 말이에요.”

신체가 고정됐다는 건 다시 말해, 성장이 멈추었다는 것. 세실리아의 말에 따르면, ‘히로인 네토리’에 종속된 그녀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 몸이었다.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지금 상태 그대로일 거라는 세실리아의 이야기. 충격을 받은 내가 말없이 당황하자, 그녀가… 힘없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이 모습 그대로인데, 아버지는 하루하루 더 늙어가시겠죠. 마법으로 노화를 늦춘다 해도, 사람의 수명이란 건 유한하니… 아버지도 언젠가… 늙어서 죽게 될 거예요. 그건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에요.”

“리아야.”

“그런데… 저는 인간인데도 그 운명을 피하게 될 거예요. 지금처럼 늙지도 죽지도 않는 몸으로, 아버지께서 하루하루 약해지시는 걸 곁에서 지켜만 봐야할 거예요.”

“……”

“그건 너무 슬프지 않나요?”

“후우…”

“게다가, 결국 ‘그날’이 온다면… 아버지의 능력이 사라지면서… 저희는 각자,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게 될 거예요. 그리고… 다시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예요. 마치 아버지와 함께 했던 날이… 한여름 밤의 꿈이었던 것처럼 말이에요.”

“……”

“아버지… 저는 그게 너무 무서워요.”

여전히 당황스러웠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간식을 내려 놓은 난, 두 팔을 벌려 세실리아를 안아 주었다. 그런 다음… 천천히 그녀의 등허리를 어루만지면서, 세실리아가 진정할 때까지 시간을 주었다.

현실로 소환할 수 있다길래, 마냥 좋게만 생각했었는데…

이런 맹점이 있었구나.

혼자 남겨질까 봐 걱정했을 세실리아를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착한 내 딸을 슬프게 하다니… 반성한 나는 세실리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의 어리광을 받아 주기로 했다. 영혼이니, 귀속이니, 굉장히 위험해 보였지만… 세실리아한텐 별로 어려운 위험한 일이 아니겠지? 나는 내 딸을 믿었다.

“계약을 하고 나면… 완전히 이쪽 세계의 사람이 되는 거야?”

“후훗, 그렇답니다.”

“부작용 같은 건 없고?”

“네에.”

“그래… 그러면 허락할게.

“……아버지!”

내 영혼에 귀속됨으로써…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 벗어나, 그리고 ‘히로인 네토리’에서 벗어나, 이쪽 세계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세실리아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믿은 나는 그녀와 함께 계약을 준비했다.

자그마한 마법진을 그린 후, 각자의 핏방울을 떨어뜨린 다음, 뜨거운 키스를 나눈 우리 부녀. 그 상태 그대로, 세실리아가 알 수 없는 주문을 영창하자… 그녀의 눈이 빛나더니, 내 심장이 두근거리며 날뛰기 시작했다.

“으윽…”

그리고 얼마 후, 난장판이 된 방 안에서 내가 힘겹게 정신을 차리자… 내 몸 위에 올라타 옷을 벗고 있는 내 딸이 시야에 들어왔다. 음… 기쁜 마음에 섹스를 하려는 걸까? 그것보단 우선 계약 결과를 확인하고 싶은데…

“으읍?!”

“하아… 아버지, 으응… 드디어… 아버지의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었어요!”

“…리, 리아야?”

하… 하하… 히로인들이 아직도 임신하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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