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88 - 아이돌 메이커(26)
팬티, 칫솔, 슬리퍼… 동거를 연상시키는 물건들. 그리고 콘돔… 용도가 하나뿐인 피임 기구. 몰랐는데, 두, 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였구나?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그렇다고 화가 나지는 않았다.
부사장님이랑 나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만약 내가 ‘진짜’ 여친이라면 울컥 하고 화를 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난, 부사장님의 연기 레슨을 받는 배우 지망생에 불과했다.
“안 잤어요. 제가 그쪽처럼 싸구려로 보이세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배우 쪽 이야기.
업계로 따지면 내가 선배였다.
고작해야 몇 달 차이긴 하지만… 그래도 선배는 선배잖아. 근데 감히 후배 주제에 나한테 싸가지 없이 군다고? 아무리 한지영이 부사장님의 여친… 이라 해도 용서할 수 없었다. 선후배 간의 예의는 연습생 때부터 배우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뭐어? 싸구려? 너 지금 말 다 했어?”
“어라? 지금 반말하신 거예요? 푸흡, 싸구려 맞네. 위계질서 몰라요?”
“나 참… 그럼 그쪽은 장유유서 몰라요?”
“어머, 연예계는 데뷔로 따지는 게 기본인데… 어떡해, 그 나이 먹을 동안 배운 게 없는 거예요? 불쌍해… 제가 하나하나 가르쳐 드려요?”
“……너 진짜 정신 나갔어?”
쿨한 모습은 어디 갔는지, 얼굴이 빨개져서는 씩씩거리기 시작한 한지영. 솔직히 말해서 꼴불견이었다. 저게 쿨뷰티라고? 흥, 웃기시네. 쿨어글리겠지. 예의도 없는 주제에 부사장님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용서할 수 없었다.
“정신 나간 건 당신이겠죠.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하! 진짜 어이가 없네. 거울 좀 보고 말해!”
“제 꼴이 뭐 어때서요.”
“너 지금 네가 노브라인 건 알고 있어?”
“아…… 깜빡했다.”
“머리도 엉망에, 화장도 엉망에, 무엇보다 이 땀냄새… 이 땀냄새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 응? 선배님, 말해 봐요. 도대체 뭘 했길래 이렇게 냄새가 진동해요?”
“…..그, 그건.”
“그건 뭐요?”
“레, 레슨! 레슨 받았거든요?”
“하…… 레슨?”
“네, 레슨. 레슨 받았어요. 왜요? 뭐, 불만 있어요?”
“……어이가 없네.”
본의 아니게 일격을 얻어맞았지만, 나한텐 아직 할 말이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팩트. 방금 내가 여기서 ‘레슨’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노브라인 상태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부사장님, 얘랑 잤어요?”
“안 잤어.”
“……진짜요?”
“넌 내가 그렇게 변태로 보여?”
그리고… 실제로 하기 직전에 멈춘 것도 사실이잖아. 다른 사람이었으면 못 참고 나를 덮쳤겠지만, 부사장님은 그렇게 저질스러운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땀으로 접은 상태에서도 끝까지 당당할 수 있었다.
“뭐래, 저랑은 자잖아요.”
“그, 그건…”
“펠라까지 시키면서 그게 할 소리예요?”
“야, 그건 네가 억지로…”
“아무튼, 거절한 적은 없잖아요.”
“……응.”
그런데… 나보다 당당한 건 한지영이었다. 태연한 얼굴로 돌아온 한지영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외설적인, 부사장님과의 외설적인 행위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펠라라는 건… 분명 입으로 남자의 그걸… 으으, 더러워.
한지영에 비하면 내가 하던 그것은 ‘어른의 사랑’이 아니었다.
“우선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저는 그쪽이 부사장님이랑 사귀는 줄 알았어요. 이 사람, 소속사 연예인한테는 절대로 손 안 대는 웃기는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당신이랑은 분위기가 다른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화를 냈어요.”
“……네에?”
“근데 뭐… 레슨이라면 이해하죠. 부사장님 레슨법이 조금 독특하거든요. 그래서 저처럼 동거하면서 섹스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뭐어… 그쪽이랑은 거기까진 안 하는 거 같지만요.”
“………하아?”
“아무튼… 사귀는 게 아니라면 안심했어요. 그럼 이번엔 진짜로 가볼게요.”
그런데… 한지영이 하는 것도 어른의 ‘사랑’이 아니었다. 당연히 사귀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한지영도 부사장님한테 레슨… 을 받고 있었다. 동거를 하면서 섹스를 하는… 나보다 훨씬 더 끈적끈적하고 질척질척한 레슨을 말이다.
- 덜컥
“진짜예요?! 네에?! 진짜냐고요!”
“으응… 그게, 지영이 차기작에 베드 신이 들어가서…”
“그렇다고 진짜로 섹스를 한다고요?!”
“배우한테 중요한 건 경험이다, 너도 아는 말이잖아. 그래서…”
“그래서 동거도 하고! 섹스도 하고! 페, 펠라도 하고?!”
“으응…”
“뭐야, 그게에! 더러워!”
그 덕분에 부사장님한테 진심으로 실망하고 말았다. 설마 레슨을 핑계로 제자랑 세, 섹스를 할 줄이야… 너무 더럽잖아! 부사장님의 실체는 더러운 변태 아저씨가 맞았다. 자칫하면 나 역시 부사장님의 함정에 빠져서……
함정에 빠져서…
빠져서…
……응?
잠시…
부사장님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야?
화를 내려다가… 곧바로 이성을 되찾았다. 아무리 망상을 해도 한지영을 강간하는 부사장님을 떠올릴 수 없는 게, 그 이유였다. 지난 번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한지영 그 사람… 부사장님이랑 되게 가까워 보였지.
그걸 생각해 보면 부사장님은 억지로 남을 건드리는,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부사장님… 언제나 ‘권유’를 했지, ‘강요’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따라서 부사장님이 그렇고 그런 레슨을 했다고, 그 즉시 부사장님한테 실망하는 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 맞아, 언제나 나를 믿고 응원해 주는 좋은 사람인데…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상호 합의 하에 한 레슨이에요?”
“뭐? 그야 당연하지. 그럼 내가 강간했을 거 같아?”
“그건…… 아니죠.”
“하아아… 원래 배드 신 레슨까지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지영이가 조금 독종이거든. 연기 욕심이 되게 강해서, 후우… 나도 어쩔 수 없이 도와 주는 중이야.”
“…그렇구나.”
이것 봐, 역시 부사장님은 좋은 사람이었다.
“근데, 부사장님… 성인이면 섹스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연인 사이인데… 키스만 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아무래도 리얼리티가 많이 떨어지는 거 같아요.”
“……무슨 의미야?”
“우리가 하는 레슨요.”
“…레슨?”
“네. 그러니 키스만 할 게 아니라… 끝까지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므로… 한지영, 그년 혼자 좋은 일을 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분명히 사귀는 사이도 아니면서 부사장님을 끌어안고는… 나를 향해 썩은 미소를 날렸었지. 그렇게 제멋대로 우월감을 느끼려는 그년이, 부사장님의 특별한 존재가 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부사장님은 내 치트킨데… 왜 자기 멋대로 끼어드는 거야?
내 허락도 없이.
부사장님의 레슨을 독점할 수 없는 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받지 못하는 레슨을 다른 사람이 받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부사장님에게 요구했다. 좀 더 진한 ‘어른의 사랑’을 해 달라고.
- 따악!
“하읏?!”
하지만 그런 내게 돌아온 것은… 부사장님의 냉혹한 딱밤이었다.
***
지금 하는 연기도 완벽하지 않으면서 그 다음 걸 배우려는 건 욕심이야, 라는 부사장님의 대답을… 난 인정할 수 없었다. 희진이가 된 나한테 푹 빠졌으면서, 그게 무슨 헛소리야.
이미 배울 건 다 배운 거 같은데… 부사장님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이러면 승부 속옷이라도 준비해야 하나?
난데없이 나타난 한지영에게 열등감… 은, 좀 그렇고… 한지영을 질투… 이것도 좀 그런데? 아, 아무튼… 부사장님과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어진 나는, 어떻게 하면 부사장님을 유혹할 수 있을 지를 고민하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푸흡, 인정.”
“알았어요. 다음주에 봬요.”
그런데 숙소 입구에서 은아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부사장님도 푹 주무세요.”
그 누군가는 부사장님이었다.
“아, 언니 왔어?”
“……부사장님?”
“응? 아아… 응, 부사장님.”
“왜?”
“으응? 레슨 때문에.”
“레슨?”
“응. 레슨.”
“왜?”
“?”
“네가 왜 부사장님한테 레슨을 받아?”
“저번에 받던 거 계속 받기로 했어.”
“그니까 왜, 왜 그걸 계속 받냐고?”
“?”
“대답해, 가은.”
“……그냥.”
“뭐어…? 그냥?”
“그냥… 아직 배울 게 있어서, 그래.”
방해꾼은… 한지영 혼자가 아니었구나. 평소와 다르게 아주 행복한 얼굴로 통화를 한 은아. 그래서 당연히 가족인 줄 알았는데 그게 부사장님이었다면… 으, 은아도 그렇고 그런 레슨을? 아, 아니야. 은아는 배우가 아니잖아.
그러니 분명… 내 착각이겠지?
“언니 피곤해? 표정이 이상해 보여.”
“……조금 그래.”
“레슨 중에 무슨 일 있었어?”
“조금…”
“힘들어?”
“아니야… 후후, 버틸만 해.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래… 은아한테는 아이돌로서의 마음가짐, 뭐어 그런 걸 가르쳐 준다고 했잖아. 걱정을 멈춘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 난데없는 방해꾼 때문에 에너지를 많이 쓴 탓에 수면욕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대로 씻지도 않고 잘 수는 없었다.
하필이면 은아를 만나서 더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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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
“아니야… 후후, 버틸만 해. 걱정해 줘서 고마워.”
언니, 피곤해 보이는데 레슨 시간 좀 줄이면 안 돼? 그래야지 내 레슨 시간이 늘어난단 말야… 라고 말하면 혼나겠지? 아쉬움을 삼킨 나는 터벅터벅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이어폰을 낀 후 침대에 누웠다.
부사장님은 바쁘다고 했지만 나한텐 녹음본이 많았다.
[은아야, 하아…]
이렇게 혼자서 자위하는 것도 이번 주가 마지막이구나. 부사장님 앞에서 알몸이 될 순간을 상상하자 아랫배가 움찔거렸다. 한층 더 섹시해진 나를 보면 좋아하시겠지? 두 달 전보다 더 단단해질 부사장님의 자지를 생각하자 내 보지에서 음란한 액체가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