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 네토리-379화 (379/428)

Chapter 379 - 아이돌 메이커(17)

진짜 사귀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연기잖아. 그러니 상대가 부사장님이어도 괜찮지 않겠어? 물론 굳이 고르자면 불호에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어른이니깐… 응, 부사장님이라면 안심하고 부탁할 수 있었다.

“어… 진희야,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없어?”

하지만 부사장님은 나를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얘기를 꺼내자마자 정색을 하시는 부사장님. 순식간에 차가워진 부사장님 때문에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그, 그게…이래 보여도 아이돌이잖아요! 그러니 말조심을 해야 한달까요… 아하하, 괜히 얘기를 꺼냈다고 이상한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깐… 이, 이왕이면 회사 사람이랑 하는 게 좋아 보이는데… 시우 오빠는 컴백 준비로 바쁘고, 진수 오빠도… 그, 많이 바빠 보여서… 아, 물론 그렇다고 부사장님이 한가하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그건 아닌데… 그게… 부사장님은 그게…”

“아니, 진희야.”

“네, 네에!”

“다른 건 됐으니깐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

“네, 물어 보세요.”

“너 나한테 몰입할 수 있겠어?”

“……몰입요?”

“응, 이렇게 생긴 아저씨한테 몰입할 수 있겠냐고. 남친 외모의 최소 기준이 키스 가능 여부라던데, 너 나랑 키스할 수 있어?”

“으엑.”

“그래, 못할 거 아냐. 근데 무슨 연인 연기야. 나는 그거 아니라고 봐.”

그, 그렇구나. 그래서 거절하신 거구나. 역시 레슨을 시작한 부사장님은 냉정했다. 진수 오빠라면 좋다고 나랑 사겼겠지만, 부사장님은 되게 현실적이었다. 부사장님이랑 키스? 에이, 무리지. 머릿속으로 상상을 하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부사장님이랑 데이트를 하면… 스폰을 받는다고 이야기가 나올 거고, 그나마 착한 사람들은 우리가 부녀 사이인 줄 알고 흐뭇해할 거야. 하지만 우리는 사귀는 사이. 이미 호텔 예약이 끝난 상태지.

와인을 마신 후 방으로 올라가면 부사장님이 먼저 씻을 거고, 나는 가운만 걸친 채 호텔 야경을 배경으로 멋진 셀카를 한 장 찍을 거야. 그러다 화장실 문이 열리면 부사장님이 반라 차림으로 나올 거고, 기다리던 내게 다가와서 입술을……

우엑.

…역시 무리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한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연애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나는, 진정한 배우가 되기 위해 부사장님과 사귀는 척 연기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부사장님과 입을 맞추었다.

‘으으읍?!’

그러자 부사장님이 말도 없이 혀를 내밀었다.

아아, 프랜치 키스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역시 변태잖아. 상상 속의 부사장님은 얼굴값을 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멋대로 날 끌어안은 부사장님이 내 가운을 벗기면서 내 입 안을 희롱했다.

‘으응… 하아아…’

그러고는 나를 침대로 데려가 내 위에서 팬티를 벗어 던졌다. 서, 설마 이대로 첫 경험까지 하게 되는 걸까? 당황한 난 필사적으로 부사장님에게 저항했다. 그래도 남자 친구인데… 냄새 나는 몸으로 그걸 하고 싶지 않았다.

‘그 편이 더 좋다고요? 벼, 변태…’

그러나 부사장님은 오히려 좋다면서 내 겨드랑이에 코를 갖다 댔고… 으으, 최악이야! 저질스러운 남자 친구의 성적 취향에 내가 정신을 못 차리자… 부사장님이 긴장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진희야, 너 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아.”

“식은땀 좀 봐, 어디 아픈 거야? 두통약이라도 하나 챙겨 줄까?”

“아, 아뇨! 괜찮아요.”

바보, 망상을 너무 진하게 했잖아!

내가 대답도 없이 혼자서 끙끙거리고 있자, 여러모로 걱정이 된 모양이다. 어느새 일상 모드로 돌아온 부사장님이 진심을 담아 나를 걱정해 주었다. 상상 속에서는 그 누구보다 거칠었던 사람이 말이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네에.”

“그리고 유사 연애 상대는 오늘부터 천천히 찾아 보자.”

그런데…

저렇게 자상한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대비 효과 때문인지 눈앞의 부사장님이 좋게 보였다. 착한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훨씬 더 믿음직스러웠다. 아니, 생각해 보면 오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부사장님은 언제나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연인 연기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최악을 상상했기에 역으로 안심이 된 나는, 결심 끝에 입을 열었다.

“부사장님, 저… 가능할 거 같아요… 아, 아니, 가능해요! 부사장님 상대로 몰입하는 거… 제가 도전해 볼게요. 부사장님을 상대로 몰입할 수 있다는 건, 다른 그 누구를 상대로도 몰입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아아아, 그게, 그렇다고 부사장님이 별로라는 건 아니고요! 부사장님도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제가 정말로 존경하고, 동경하고, 그게… 아아아, 부사장님 최고!”

“……고맙다.”

“헤, 헤헤…”

“……”

“…죄송해요.”

“근데 진희야.”

“…네에.”

“그럼 너, 나랑 키스할 수 있다는 소리야?”

“어… 그, 그렇죠? 그런 거겠죠?”

“그럼 지금 키스해도 되지?”

“어… 에, 아, 어? 으, 응?”

그렇게 말하고서는 내게 다가오는 부사장님. 어, 어떡해! 상상 속의 부사장님이랑 똑같잖아. 이번엔 반라가 아니라 옷을 다 입고 있는 부사장님이었지만, 생긴 것은 상상이랑 똑같았다. 아니 생긴 건 당연히 똑같겠지만 표정이 정말로 똑같았다.

“아… 으으… 우으으으….”

그래서 겁을 먹고 만 나. 첫 데이트, 첫 키스, 그리고 첫 섹스… 로 이어지는 망상 속의 3단 콤보가 떠올라서 소름이 돋았다. 서서, 설마 망상처럼 거기까지 가는 건 아니겠지? 나는 두려움에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얼마 안 가 부사장님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미지근해서 굉장히 불쾌한… 아, 그래도 냄새는 좋네. 무슨 향수를 쓰는 걸까? 아, 아니야, 그럴 때가 아니잖아! 잠시 현실에서 도피하려던 나는 다시 위기를 느끼며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언젠가 하게 될 키스였지만, 그 상대가 부사장님인 게 너무 슬펐다.

굳이 해야 한다면 차라리 시우 오빠가…

- 따악!

“아얏!”

“그 표정으로 몰입은 무슨 몰입이야. 정신 차려.”

“어라?”

“내가 미쳤다고 너랑 키스하냐? 나 그렇게 쓰레기 아니야, 진희야.”

“어……”

“그리고 야, 여자들이 보는 남친 외모 기준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언제 키스해야 한다고 한 적 있어? 제발 망상 좀 그만하고 레슨에 집중해.”

“어라라?!”

뭐야, 그런 거였어?

이번에도 부사장님에게 시험당한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첫 키스를 지켰다는 것 이상으로, 부사장님이 좋은 사람이란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게 그 이유였다. 진수 오빠라면 시작부터 바로 키스했을 텐데 역시 부사장님은 배려할 줄 아시는 구나. 이번 일로 부사장님을 한층 더 신뢰하게 되었다.

“죄송해요… 근데, 저… 진짜 부사장님밖에 없는데 어떡해요?”

“어떡하긴. 내가 도와줄 테니깐 안심해.”

“정말요?!”

“다른 사람 없다며.”

“네에!”

“그럼 별 수 있어? 내가 도와 줘야지.”

“부사장님…”

“그래도 나, 목소리는 괜찮은 편이거든. 이것 봐, 얼굴 가리고 이렇게… 아아, 안녕하세요. GSB 부사장, 감덕배입니다. 반갑습니다. …어때? 잘생긴 사람같지 않아?”

“와아아, 진짜다! 대박! 부사장님 목소리 진짜 잘생겼어요! 얼굴이랑 너무 다른 거 아니에요?! …가, 아니라, 그게… 칭찬을 하려고 한 거지, 욕을 하려고 한 건 아닌데… 그게… 부, 부사장님 목소리 최고!”

“……고맙다.”

“헤헤…”

“……”

“죄송해요.”

“하아, 아무튼 이런 식으로 얼굴만 가리면 몰입할 수 있을 거야.”

“고맙습니다아…”

“그리고, 자. 이거 받아. 연습용 대본이야.”

“연습용 대본?”

“적당히 달달한 멜로물 대본인데, 너 연습시키려고 준비한 거야. 이거 나랑 같이 리딩하면서 연애하는 느낌을 내 보자. 대본이 좋아서 리딩만으로도 대충은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을 거야.”

“아… 네에! 알겠습니다!”

“이걸 설마 내가 읽게 될 줄은 몰랐지만… 후우, 뭐 어쩔 수 없지. 잘해 보자.”

대박 철저한 사람. 이런 것도 준비를 해 놨었구나.

완벽한 부사장님의 레슨 플랜에 감동을 받았다. 역시… 부사장님은 의지가 되고, 안심이 되는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뭐가 됐든 부사장님 옆에만 있으면 된다니깐? …이라고 조언해 주셨던 선배 배우분의 조언이 생각났다.

그러니, 응… 이번 위기도 금방 넘어갈 수 있겠지?

기분이 좋아진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대본을 살펴보았다.

“아, 그리고 손 좀 내밀어 볼래?”

“…손이요?”

“키스는 무리여도 손 잡는 건 가능할 거 아냐.”

“그렇죠…”

“이렇게 대본으로 얼굴을 가릴 테니깐, 네가 생각하는 이상형이 옆에 있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몰입해서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껴 봐. 망상하는 거 잘하잖아, 너.”

“으응… 알겠어요.”

손 잡는 거 정도야 뭐어… 별 거 아니잖아.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부사장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부사장님이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마주잡아 주셨다. 으음, 생각보다 크구나. 성인 남자의 손. 뭔가 안심이 되는 이상한 감각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기분이 좋아서 웃는 건 아니고… 그냥 이 상황이 뭔가 우스웠다.

대본으로 얼굴을 가린 부사장님과 연인처럼 손을 잡은 나.

이게 뭐야, 진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나는 리딩을 시작했다.

“만나지 말까?”

“……”

“응? 만나지 말까?”

그런데, 리딩이 시작되자 웃음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냥 리딩만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사장님의 연기는… 정말로 수준급이었다. 마치 배우처럼 진지하게 연기를 하기 시작한 부사장님… 그와 동시에 몰입하게 된 나는, 대본 속의 여주가 되어 부사장님과 대화를 주고 받았다.

“만나지 말라고 해라.”

눈앞의 상대는 부사장님이었지만, 더는 부사장님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본으로 얼굴을 가리기도 했지만… 그것 이상으로 미친듯한 연기력이… 부사장님을 남주로 착각하게끔 만들어 주었다.

“으응…”

덕분에 나는 대본 속 남주와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만나지 마, 그 사람…”

나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학창 시절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

시은이가 된 나는 우재와 함께 웃고 또 웃으며 대화를 주고 받았다. 나를 좋아해 주는 우리 팬들은 이런 추억이 있었겠구나. 부럽기만 하던 그 청춘을 잠깐이나마 들여다 본 나는 발그레 얼굴을 붉혔다.

어느샌가 마주잡은 두 손은 깍지를 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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