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8 - 아이돌 메이커(16)
“어이없어. 걔가 그렇게 소중해요?”
“내가 말했잖아.”
“시트러스는 사장님의 꿈이라고요?”
“그래.”
“그렇다고 부사장님의 꿈인 건 아니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
“흥, 그럼 나 좀 챙겨 줘야하는 거 아니에요? 부사장님, 저 말이에요… 종방연인데 쌍욕을 들었어요… 쌍욕을! 부사장님은 이런 제가 불쌍하지 않아요? 세상에 어느 여주가 종방연에 쌍욕을 들어요, 네에?!”
“지영아, 너 취했어.”
“네, 저 취했어요! 왜요? 취하면 안 돼요?”
“사람들 다 쳐다 보잖아.”
“어쩌라고요!”
“하아… 데려다 줄게. 찬물 마시고 정신 좀 차려. PD님 찾아가서 인사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내게 코트를 건네주는 부사장님. 상당히 굴욕적인 일이 있었지만… 덕분에 일이 잘 풀렸다. 내게 쌍욕을 한 미친년 덕분에 나는 합법적으로 화를 낼 수 있었고, 그것을 핑계로 부사장님을 집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여기서 슬쩍 유혹하면… 넘어오겠지?
술에 취한 몸으로 집에 돌아온 나는 떠나려는 부사장님의 옷깃을 붙잡았다.
“지영아?”
“가지 마세요.”
“하아… 너 또 왜 그래?”
“짜증나서 미칠 거 같으니까… 책임지고 가세요.”
“뭐?”
“책임지시라고요! 하아… 부사장님 때문에 억지로 사과까지 했잖아요!”
“그건……. 미안해.”
“말로만 하지 말고 성의를 보이세요.”
“뭘 어떻게 하란 소리야?”
“그걸 꼭 제 입으로 말해야 해요?”
“나 간다.”
역시 생긴 거랑 다르다니깐… 이렇게 먹기 쉽게 판을 만들어 줬는데도 부사장님은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공과 사가 철저하다는 건… 매력 포인트였지만 이런 상황에선 오히려 밉상 포인트였다.
그냥 좀 자고 가지.
수연 선배랑은 갈 때까지 갔으면서, 나한테는 손도 안 대는 게 굴욕이었다.
‘지영아, 부사장님 은근 쉬워. 뭐든 뒤에 레슨만 붙이면 돼.’
결국 치트키를 써야 하나? 반드시 오늘, 끝을 보겠다고 결심한 나는 부사장님에게 ‘레슨’이란 말을 꺼냈다. 오늘만 날인 건 아니었지만… 언제 또 집으로 데려오겠어. 이대로 부사장님을 떠나보내긴 싫었다.
“알겠으니깐, 가기 전에 레슨 좀 도와주고 가세요.”
“레슨? 뜬금없이 무슨 레슨?”
“마지막 화 보셨죠?”
“…봤지.”
“거기서 나오는 키스 신, 되게 별로였죠?”
“……”
“그러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좀 가르쳐 주세요.”
“지영아.”
“술취한 남녀가 집에서 키스하는 신 말이에요.”
“너, 진짜…”
솔직히 얼굴만 보면 정말로 별로였지만… 남자는 능력이잖아. 별 볼 일 없던 나를 최고의 신인으로 만들어 준 사람, 그리고 언젠가 나를… 최고의 배우로 만들어 줄 사람, 부사장님. 나는 다른 여배우들과 달리 진심으로 그와 이어질 생각이었다.
그러니 처녀를 내주는 것 정도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아, 맞다. 부사장님 콘돔 있어요?”
“야, 한지영!”
“뭐가요. 우리한테 리얼리티를 강조한 건 부사장님이잖아요.”
“아니, 그래도…”
“그러면 술취한 남녀가 집에서 키스하는데… 거기서 끝나겠어요? 카메라에는 안 담겨도 어떤 분위기인진 알아야 하잖아요. 그니까 장난치지 말고 확실하게 가르쳐 주세요. 이번처럼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한테 창피당하고 싶진 않아요.”
“진심이야?”
“그럼 거짓말로 이러겠어요?”
저렇게 보여도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깐… 내 처녀를 가져간 걸 알면, 나한테 더 잘해 주겠지? 계산을 마친 난 부사장님에게 편의점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참고로 생으로 해도 안전한 날이었지만… 그냥 콘돔이란 말을 써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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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후 레슨, 그리고 또 레슨이라는… 파멸적인 스케줄 속에서 살다 보니 시간이 말 그대로 순식간에 흘러갔다. 연기는 아직 기초밖에 못 배웠는데, 벌써 한 달이나 지났구나. 아직 배워야 할 게 산더미처럼 있는데 시간이 많이 부족해 보였다.
두 달 후에 있는 오디션… 내가 붙을 수 있을까?
잠시 걱정이 되어 침울해졌지만, 다시 용기를 냈다. 그 유명한 부사장님한테 개인 레슨을 받는 나잖아. 나는 지난 한 달간의 레슨을 떠올리며 자신감을 회복했다.
아주 기본적인 발성법부터 시작해서 전문적인 대본 분석까지, 상상 이상으로 체계적이었고 하드했던 부사장님의 레슨. 그 레슨을 낙오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내겐 오디션에 붙을 자격이 있었다.
음음, 맞아.
부사장님도 가능성이 높다고 했잖아.
나는 나 자신을 믿어 주는 부사장님을 생각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컴백 준비랑 겹치면서 벅찬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성장하고 있다는 게 실감나서 난 힘을 낼 수 있었다. 시트러스에선 존재감이 옅은 나지만, 연기 레슨을 받을 땐 내가 주인공이잖아. 그러다 보니 의욕이 솟아나서 모든 일이 즐거웠다.
후후, 이게 다 부사장님 덕분이야.
역시 고민 끝에 부사장님을 찾아간 게 정답이었다.
그리고 부사장님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지난 한 달 동안 옆에서 레슨을 들어 보니, 아주 배울 게 많은 사람이었다. 생긴 거는 조금… 취향을 타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하는 행동은 굉장히 프로였다.
우선 공과 사를 잘 구분한다고 해야 하나? 휴식 시간엔 그 누구보다 다정한 사람인데, 레슨을 시작하면 엄청 냉정해져서 그만큼 신뢰가 갔다. 그리고 또, 보기와는 다르게 머리도 좋아서 대본 분석도 잘 하는데, 혼자서는 알 수 없었던 등장인물의 사고 방식을 배울 수 있어서 정말로 큰 도움이 되었다.
왜 배우들이 부사장님을 찾는지 알 것 같달까? 연기에 있어서 부사장님은 치트키였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리는 치트키. 그리고 나는 그 치트키를 얻게 된 행운아였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해 볼래?”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대본에서, 이 배역으로,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것도 행운이었다. 동생이지만 굉장히 어른스러워서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맡고 있는 여동생. 마침 리더인 내가 하는 일이랑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연기하는데 어려움이 적었다.
혹시 그걸 알고 나한테 이 배역을 골라 준 걸까?
진실을 알 순 없었지만 아무튼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으음, 좋지 않은데.”
“네에?! 그, 그래요?”
그런데 우으… 부사장님의 지적 시간이 돌아왔다. 이번엔 또 어떤 실수를 저지른 걸까? 연기를 멈춘 나는 떨리는 눈으로 부사장님을 바라보았다. 지적받는 건 슬픈 일이었지만 이걸 이겨내야 성장할 수 있었다.
“진희야, 나도 물어보기 싫은데… 그래도 필요해서 물어보는 거거든?”
“…네에?”
“그러니 오해하지 말고 들어. 진희 너 모솔이야?”
“네… 네에에?!”
“연애 경험 있냐고.”
“어… 그, 그게… 없어요.”
“역시, 모솔이구나.”
갑자기 모솔인지는 왜 물어 보는 걸까? 딱히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지만… 어째선지 정곡을 찔린 느낌이라 식은땀이 났다. 혹시 매력이 없는 애라고 생각하시나? 당황한 나는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가장 적절한 변명을 생각해 냈다.
“여, 연습생 시절이 길어서요… 그래서 연애할 시간이 없었어요.”
“응? 연습생끼리도 사귀고 하잖아.”
“네에에?! 아, 아니요? 요즘은 엄청 엄격해서 그런 거 없어요.”
“그렇구나, 아이돌쪽은 내가 문외한이라 몰랐네.”
“네, 네에… 연애는 하고 싶어도 못해요… 아하하…”
사실, 몇 번 대쉬를 받은 적은 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두세 번 정도 사귀자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하지만 데뷔를 앞두고 가볍게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모두 다 거절을 했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됐던 걸까?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부사장님에게 물어봤다.
“대본을 잘 보면 민호는 민지를 동생으로만 생각하지만, 민지는 조금 달라. 민호를 남자라고 생각해. 둘은 고아원에서 만난 피가 다른 남매잖아? 그래서인지 잘 읽어 보면 민지의 떨리는 감정을 느낄 수 있어.”
“……그렇죠.”
“아무래도 작가님은 민지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보일 듯 말 듯 드러내고 싶은 거 같은데… 네가 하는 연기는 설렘이랑은 완전 거리가 먼 연기야.”
“우으으… 그런가요?”
“대본에 있는 민지는 오빠에 대한 마음을 애써 숨기는 사랑에 빠진 여동생이라면, 네가 연기하는 민지는 그냥 민호를 챙겨 주는 엄마 같은 여동생이야.”
“그렇구나…”
이래서 경험이, 리얼리티가 중요하다는 거구나.
나름 그 감정을 살린다고 살린 건데… 아쉽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부사장님은 내가 무엇을 참고했는지를 정확히 알고 계셨다. 어쨌든 엄마도… 나를 사랑하잖아. 그러니 그 느낌을 살리면 되지 않을까? …라는 내 생각은 정말로 잘못된 생각이었다.
우으… 그러면 어쩌지?
나는 우물쭈물거리며 내 치트키를 바라보았다.
“주변에 연애할 사람 없어?”
“…네에?!”
“아니, 사귀라는 게 아니라, 사귀는 척 연기해 줄 사람 없냐고. 역시 이런 건 직접 경험해 봐야 알거든. 책이나 드라마로는 절대 해결 안 돼.”
“어…”
그러니까… 유사 연애를 경험해 보라는 거야?
부사장님의 의견이니 분명 내게 도움이 되는 의견일 테지만… 솔직히 말해서 부담스러웠다.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 지도 모르겠고… 유사 연애를 시작한다고 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감이 안 왔다.
이, 이걸 어쩌면 좋지?
내가 대답없이 고민하고 있자 부사장님이 말을 덧붙였다.
“주변에 남자 없어?”
“제가 연습생 시절이 길어서…”
“아니면 뭐… 이 팀장이나 박 실장한테 부탁하는 건 어때?”
“네에에?!”
으으으음… 무, 물론 내 도전을 응원해 준 두 사람이니 분명 부탁만 한다면, 나를 도와주겠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에게 유사 연애를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우 오빠는… 호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컴백 준비로 많이 바쁜 사람이라 방해하기 싫었고, 진수 오빠는… 응, 진수 오빠는 아니야. 내 취향이라는 정반대의 사람이라 연인인 척 연기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두 사람 말고는 내 주변에 남자가 없었다.
어, 어떡하지.
레슨을 시작한 지 한 달만에 위기가 찾아오고 말았다.
“그 두 사람은 싫어?”
“싫다기보단, 그게에… 아하하…”
어, 잠깐. 잠깐만.
부사장님도 남자잖아.
부사장님도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진수 오빠처럼 무섭지도 않고 은근히 자상한 면이 있어서 연인인 ‘척’이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조심스레 검지 손가락을 뻗어, 눈앞의 부사장님을 가리켰다.
“부사장님이랑 하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