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1 - 아이돌 메이커(9)
이름 모를 여자 배우를 떠나 보내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자 부사장님이 돌아왔다. 그것도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와 함께 말이다. 후우, 부사장님… 왜 자리에 없나 했더니 그거 때문이었어요?
돼지 주제에 살 뺄 생각도 안 하는 게 짜증났다. 저러다 당뇨병에 걸리면 어떡해. 나는 부사장님의 건강을 챙겨 주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오, 가은아 여기는 무슨 일로…… 그 손은 뭐냐?”
“주세요.”
“……뜬금없이 뭔 소리야?”
“그거 먹으면 살 쪄요.”
“나는 아이돌이 아니라서 살 쪄도 돼.”
“살 찌면 각종 합병증에 걸리기 쉬워져요.”
“그땐 병원가면 돼.”
“계속 그렇게 억지 부릴 거예요?”
“……한 입 달라는 거야?”
“네.”
“그럼 그렇지. 건강 걱정은 무슨… 들어가자. 아, 참. 이 팀장한텐 비밀이다?”
“확인.”
좋아, 이걸로 부사장님의 건강을 확보한 나는 문은 열고 들어가 자연스럽게 물을 올렸다. 분명 고급 홍차가 여기 있었지? 좋아, 좋아. 치즈케이크와 홍차라니 역시 부사장실로 놀러오기를 잘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뭐 물어볼 거라도 있어?”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상담 받으러 온 거였지. 나는 부사장님에게 따뜻한 홍차를 건네 준 후 자리에 앉아 세팅을 마쳤다. 그런 다음 잘 먹겠습니다, 라고 인사한 후 싱글벙글 웃으며 치즈케이크를 음미했다. 역시 부자는 다르다니깐. 비싼 케이크라 그런지 너무너무 맛있었다.
“왜 찾아 왔냐면요… 우물우물, 시우 오빠가 저희한테…”
“가은아, 제발… 먹으면서 말하는 거, 그거 내가 고치라고 했지.”
“아, 죄송. 너무 맛있어서요.”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먹고 이야기하자.”
“확인… 우물우물.”
으음, 그런데 홍차보단 커피가 더 나았을 거 같아. 여긴 커피도 맛있잖아. 그렇게 피드백을 마친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상담을 시작했다. 용건은 당연히 시우 오빠가 우리에게 내준 숙제였다.
“춤이냐, 노래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
“셰익스피어인데요.”
“셰익스피어가 쓴 햄릿에 나오는 대사를 따라한 거잖아.”
“………아무튼, 둘 중 하나를 정해야 한대요.”
“그래? 그러면 정하면 되겠네.”
“……”
“왜?”
“혼자서는 못 정하겠으니깐 온 거잖아요. 도와주세요.”
“은아야 이런 건 네가 직접 정해야 의미가 있는 거야. 이 팀장이 너희한테 숙제를 왜 내줬겠어? 너희들끼리 시트러스의 방향성을 한번 생각해 봐라, 이거잖아. 그럼 그렇게 생각을 해야지. 응? 그걸 나한테 부탁하고 그러면 안 돼.”
“……그런가.”
“그리고 이 팀장 성격이면 양쪽 다 어느 정도는 준비해 놨을걸?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한번 천천히 고민을 해 봐.”
“……확인.”
그런 뜻이 있었구나. 어쩐지 멤버들한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했어. 하여튼 시우 오빠는 음흉한 구석이 있다니깐. 솔직하게 얘기해 주면 더 좋을 텐데… 이런 부분은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게 시우 오빠의 프로듀스 방법이라면 따라야겠지?
나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쉰 후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뭐… 사실 정답이 정해져 있기는 해.”
그런데 갑자기 부사장님이 내게 해답지를 내밀었다.
더는 방해 받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걸까? 부사장님의 얼굴에서 귀찮음과 피곤함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부사장님도 최근에 많이 바쁘다고 했지? …이렇게 된 이상 부사장님을 위해서라도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할 거 같다.
“은아야, 가창력으로 유명한 아이돌 있어?”
“네.”
“그래, 있긴 하지. 근데 손에 꼽지?”
“……아무래도 그렇죠?”
“그런데 노래 좋기로 유명한 히트곡은 몇개일까? 최소 열 손가락은 넘지 않을까?”
“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인데… 아이돌한테 중요한 건 가창력이 아니야. 노래는 그냥 적당히만 불러도 돼. 가창력이 좋아 봤자, 타이틀곡이 구리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안 그래?”
“그럴지도…”
“반면에 춤은 중요해. 은아야, 보컬 첼린지라고 들어 봤어?”
“으음… 아뇨.”
“그럼 댄스 첼린지는?”
“많이 들어 봤죠.”
“그렇지? 그만큼 춤이 더 중요한 거야. 가창력 위주의 곡? 기교? 이런 건 아이돌이 아니라 발라드 가수가 선택할 방향성이지… 시트러스가 선택할 방향성은 아니야.”
“그렇구나.”
머릿속이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굉장히 쉬운 문제였다. 노래는 시우 오빠랑 작곡가 선생님이 잘 뽑아 주면 되는 거고, 우리는 그걸 잘 표현하면 되는 거잖아. 따라서 어려운 가창력은 포기, 도전할 수 있는 춤을 선택하는 게 옳았다.
뭐야, 간단하잖아.
오늘도 부사장님한테 하나 배운 나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됐어? 그럼 이제 슬슬 회의 시간이니깐 좀 비켜 줄래?”
“아, 한 가지만 더요.”
“뭔데? 말해 봐.”
“우리 회사 배우 중에 단발머리에 고양이 눈 있죠? 그거 누구예요?”
“어… 좀 더 디테일한 설명 없어?”
“저처럼 예쁜데 저보다 키도 작고 바스트도 작아요.”
“으음… 또?”
“성격이 나빠요.”
“아, 지영이? 갑자기 지영이는 왜 찾아?”
“아까 문 앞에서 만났어요. 그 사람이 부사장님을 찾더라고요.”
“그래?”
“잠깐만요… 지영, 한지영… 잠깐, 한지영 이 사람 맞아요?”
“응? 어어, 맞아. 한지영.”
“뭐야, 나보다 후배잖아.”
“맞아. 너보다 몇 달 정도 더 늦게 데뷔했을걸?”
어이가 없네. 예쁘다고 다가 아닌 것처럼 나이가 많다고 다가 아닌데, 그걸 알고도 나한테 반말을 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연예계는 데뷔 순인 거 모르나? 좋았던 기분이 단숨에 식어 버렸다.
분명 이름이 한지영이라고 했지?
안 되겠어. 다음에 만나면 꼭 복수를 해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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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러스의 리더, 유진희. 난데없이 담당 프로듀서로부터 숙제를 받은 그녀는 큰 고민에 빠졌다. 보컬을 위주로 한 곡과 댄스를 위주로 한 곡, 둘 중에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양쪽 다 그만그만한 그녀로서는 쉽게 고를 수 없는 문제였다.
유키처럼 춤을 잘 췄다면 댄스를, 시엘처럼 노래를 잘 불렀다면 보컬을 선택하면 됐지만… 그 어느 쪽으로도 재능이 부족한 유진희에겐 그 어떤 선택지도 정답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은하처럼 랩이라도 잘 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랩 실력 또한 평범했다.
그렇기에 유진희는 절망했다.
‘나란 년은 정말… 어중간한 년이구나…’
사실 그녀도 자신이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심각성을 느끼진 않았었다. 그녀보다 못한 멤버, 가은의 존재 덕분이었다. 얼굴만 예쁘지 아이돌로서의 능력은 전무했던 가은. 그러면 안 됐지만… 유진희는 가은을 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었었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 와선 옛말이었다.
지금은 그녀가 가은보다 못한 존재였다.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자리걸음 중인 그녀와, 한 달만에 재능이란 꽃을 피운 가은. 이제 시트러스의 짐짝은 그녀 혼자뿐이었다. 그 사실에 유진희가 열등감을 느꼈다. 나이도 어리면서… 얼굴도 예쁘면서… 재능까지 있으면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야. 그녀가 가은을 질투하게 된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랑 다르게 은아는… 정말 다 가진 년이구나…’
결국 유진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부사장님한테 레슨만 받을 수 있으면… 아니, 하하, 애초에 나한텐 불가능한 특혜잖아. 얼굴이 예쁜 은아니깐, 그거 하나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애니깐… 레슨을 해 준 거겠지… 그에 비해 난… 나는…’
“하아…”
‘나는 나이만 많고 할 줄 아는 건 1도 없는… 그냥 나이가 많아서 리더가 된, 허울뿐인 리더. 2집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나는 금방 묻히겠지. 안 봐도 뻔해. 그렇잖아. 지금도 팬이 가장 적은걸…’
“하아아…”
‘이런 내가 연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아하하…”
헛웃음을 지은 유진희가 웃음 끝에 눈물을 흘렸다. 평소라면… 프로듀서를 찾아가 상담이라도 받았겠지만, 지금은 그런 기운이 없었다.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조차 두려워 화장실로 도망쳤다.
- 끼이익
- 탁!
“짜증나… 부사장님은 진짜 걔만 편애한다니깐. 그래 봤자 아이돌인데… 뭐? 시트러스로 성공하는 게 사장님의 꿈이라고? 그런 형의 꿈을 도와주고 싶다고? 나, 참. 그런 건 프로듀스 팀한테 맡기고 배우만 챙기란 말야!”
그런데 화장실 변기칸 안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들었다. 누구지 모르는 그녀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부사장이 가은에게 레슨을 해 준 건 절대로 가은이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그저 가은이 시트러스의 멤버여서였다.
‘그, 그렇다면 나도… 레슨을 받을 수 있다는 거야?’
물론 부사장에게 레슨을 받는다고 달라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한 달만에 다른 사람이 된 가은을 보면 기대를 안 할 수도 없었다. 컴백까지 남은 시간은 약 반 년. 그 안에 가은처럼 자신의 숨은 재능을 찾을 수만 있다면…
꿀꺽하고 침을 삼킨 유진희가 주먹을 꽈악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