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 네토리-368화 (368/428)

Chapter 368 - 아이돌 메이커(6)

“그래, 바로 그거야!”

“그런 식으로 허리를……”

“에엥? 갑자기 왜 그래?”

“…저기, 가은아?”

“……”

“……”

“까먹었어요.”

별 거 아닌 줄 알았는데… 하다 보니 자꾸만 헷갈렸다. 허리를 돌리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이렇게 하는 거 맞나, 라는 의심이 들자 허리가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흐름이 깨지면서 감각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이래서 반복 학습이 중요한 걸까?

나는 다시 한번 감각을 익히기 위해 부사장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도와주세요.”

“너 되게 뻔뻔하다?”

“불지하문(不恥下問), 모르는 것을 묻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공자님의 말씀이에요. 저는 유교걸로서 공자님의 말씀을 따른 거고요.”

“……그래?”

“네.”

“가은아, 근데 불지하문이 아니라 불치하문이야.”

“알아요. 그래서 불치하문이라고 했잖아요.”

“뭐?”

“?”

“……내가 잘못 들었나?”

“네.”

“그래, 뭐. 그렇다 치고 넘어가자.”

뭐야, 불’치’하문이었구나. 자연스럽게 부사장을 속여 넘긴 난 마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귀중한 상식인 이미지를 망가뜨릴 뻔했다. 불치하문, 불치하문, 불치하문. 좋아, 다음부턴 조심해야지. 머릿속으로 정보를 수정한 나는 당당한 목소리로 레슨을 재촉했다.

“완전히 까먹기 전에 빨리 도와주세요.”

“그래, 자, 여기.”

“으응… 이렇게 하는 거 맞죠?”

다소 민망한 레슨이었지만… 성장할 가능성이 보여서 그런지 의욕이 들끓었다. 이것만 제대로 익히면 나도 1인분은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나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부사장의 엄지 손가락을 움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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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은이의 땀과 애액으로 젖어 완전히 엉망이 된 베개. 이걸 팬들한테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실없는 상상을 한 난 가은이가 쓴 베개를 인벤토리에 보관했다. 일단 가지고 있으면 언제가 쓸 날이 올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영상이랑 세트로 묶으면 현실에서도 팔릴 거 같은데… 어디 준비해 봐?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클라우드 드라이브를 열었다.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으면 자동으로 동기화가 되는 드라이브. 그런데 이게 일방향이라, 폰에서 영상을 지웠다고 드라이브에서도 지워지는 건 아니었다.

따라서 오늘 찍은 영상은 고스란히 드라이브 안에 다 남아 있었다.

[으읏, 으응… 하읏, 으응…]

바로 이렇게 말이다.

[하읏… 저 이제 잘하죠?]

카메라를 바라보며 열심히 허리를 흔드는 가은. 확실히 얼굴만 보면 탈아이돌 급이었다. 제대로 된 조명 없이도 빛나는 외모… 후우, 이런 애는 배우를 해야 하는데 생긴 것과 달리 연기에는 재능이 없어 보여서 아쉬웠다.

[뭐래, 누가 칭찬해 달래요?]

그래도 메인 히로인인 걸 보면 아이돌 쪽으로는 재능이 있다는 거겠지?

[팩트라고요? 뭐… 그건 인정.]

하하, 레슨 몇 번 했다고 정이 생긴 건지 쓸데없이 걱정이 됐다. 어차피 주인공인 시우가 알아서 프로듀스 해 줄 텐데 말이다. 난 영상을 갈무리한 다음 USB에 옮겨 담았다. 이것도 일단 가지고 있으면 언제가 쓸 날이 올 거다.

- 똑똑똑

“부사장님, 들어가도 돼요?”

“잠시만.”

- 벌컥

“우리 사이에 시간 끌 게 뭐 있어요.”

“……우리 사이가 뭔데?”

“소속사 배우랑 부사장이요.”

“틀린 말은 아니네.”

“후훗, 그렇죠?”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레 코트를 벗는 한지영. 그녀는 우리 GSB의 신인 배우로… 일 년만에 미니 시리즈 주연을 꿰찬 배우계의 뉴페이스다. 그리고 일 년 전부터 내 레슨을 받은 제자이기도 한데… 금수저라서 그런지 성격이 조금 독특했다.

“자, 이번 주 대본이에요.”

“지영아… 하고 싶은 말이 이거였어?”

“시간 얼마 없어요.”

“이런 레슨은 이제 졸업하기로 했잖아.”

“오빠… 나라고 안 외로울 거 같아? 나도 사람이고, 나도 여자야. 나도 사랑 받고 싶다고! 그래서 오빠랑 사귀는 건데… 오빠한테 나는 대체 뭐야?”

“지영아…”

“오빠한테 나는 대체 뭐냐고!”

“하아, 너 진짜 이럴 거야?”

“말했잖아요. 시간 얼마 없다고. 다시 처음부터 갈게요. ……오빠, 나라고 안 외로울 거 같아? 나도 사람이고, 나도 여자야. 나도 사랑받고 싶다고!”

“하아… 알겠으니깐 좀 기다려 봐. 나도 대본 좀 읽자.”

“역시 부사장님. 도와줄 줄 알았어요.”

굉장한 마이 페이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아는 지독한 여자. 급하게 할 말이 있다길래 뭔가 했더니, 이번에도 미니 시리즈 대본 리딩 부탁이었다.

“으으음… 잠깐만, 대본 해석이 잘못됐는데? 방금처럼 독선적으로 연기하면 안 돼. 여기서 ‘희연’이는 어리광을 부려야 해. 표현이 조금 거칠더라도 ‘성민’이를 공격한다는 느낌보단 ‘성민’이한테 투정을 부린다는 느낌으로 연기를 해 봐.”

이걸 또 무시하면 일주일 내내 나를 귀찮게 하겠지?

그게 싫었던 난 급한 대로 ‘관측’을 사용해 대본을 분석했다. 그리고 가장 적합한 연기를 찾아내어, 그것을 한지영에게 알려 주었다. 이 짓도 일년 내내 하다 보니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져,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본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치만 ‘희연’이는 그렇게 약한 애가 아니잖아요.”

“맞아, 여기서 어리광을 부리면 캐붕이지. 그런데 그걸 의도하고 작가가 대본을 쓴 거야. 갑자기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여 준다? ‘희연’이처럼 도도한 여자가? 그러면 캐릭터가 사랑스러워지거든. 그걸 노리고 캐붕을 만든 거야.”

“……그걸 연기하는 저를 띄워 주려고요?”

“그래, 누가 뭐라 해도 이번 드라마의 성공은 너한테 달렸으니깐. ‘희연’이를 연기하는 너를 스타로 만들 생각인 거야.”

“그렇구나… 하아, 역시 부사장님은 다르네요. 고마워요.”

“그래, 이제 됐지?”

“아니요? 이제 시작인데요?”

“뭐? 나머지는 딱히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잖아.”

“마지막 페이지 보세요.”

“이건…… 자, 잠깐만, 아니지?”

“부사장님, 저… 어디 가서 키스 못하는 여자라는 소리 듣기 싫어요.”

“아니, 그래도…”

“수연 선배랑은 그거까지 했다면서요. 그런데 고작 키스 가지고 그럴 거예요?”

“너, 너어어! 그걸 어떻게!”

“뭐야, 진짜로 한 거예요? 나, 참… 그 선배 순진한 척은 혼자서 다 하다니 뒤에선 할 거 다 하고 다녔네요. 뭐? 아무리 부사장님이라 해도 베드 신 레슨은 어렵다고? 웃기고 있네… 여기서 했어요? 아니면 호텔? 아니면 부사장님 집?”

“지영아… 수연이랑은 아무 것도 안 했어. 진짜야.”

“부사장님. 조사하면 다 나와요. 제가 그것도 못할 거 같아요? 조용히 있을 테니깐, 이거나 도와주세요. 자존심이 달린 일이에요.”

“하아아… 괜찮은 거야?”

“당연하죠. 괜찮으니깐 대본이나 읽어 주세요.”

“아니, 너… 연애 경험 없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요, 그래서 도와 달라는 거예요. 첫 키스도 못해 본 여자가 키스를 리드할 수 있겠어요? 시간 없으니깐 말 돌리지 말고 빨리 도와주세요. 아, 그냥 바로 키스로 넘어갈까요? 어차피 그게 메인이잖아요.”

“허, 허허……”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두 눈을 감고 자그맣게 입술을 벌린 한지영. 그녀답지 않게 긴장했는지 두 손을 꼼지락거리는 게 귀여워서 심장이 아팠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모습도 있었구나. 얌전해진 한지영은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뭐해요. 시간 없다니깐요?”

“하아, 알겠어.”

“하읏, 읏… 혀도 넣어 주세요.”

“괜찮은 거 맞지?”

“요즘 드라마 수위가 어떤지는 부사장님도 아시잖아요.”

“그래…”

“하읏, 으응… 응…”

이걸로 여배우랑 키스한 횟수가 두 자리 수를 넘겼구나. ‘반박귀진’까지 사용하여 성실한 척 연기를 한 보람이 있었다. 레슨을 위해서 내 모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결과가 바로 지금의 키스였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어른이라고 착각한 GSB의 배우들. 그들에게 레슨이란 핑계로 다소 민망하고, 음흉하면서도, 더럽고, 질척질척한 행위를 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게 설사 그들의 첫 경험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앗, 으응… 더는 도망치지 마, 하아… 츄릅, 츄으읍… 이렇게 하아, 나를 사랑해 줘… 나도 오빠 앞에서는, 츄으읍… 아무 생각 없이, 하읏… 사랑만 받고 싶단 말야.”

“으읏…”

그런데… 최근 들어 배우들의 분위기가 변했다. 레슨의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자, 그들이 먼저 내게 다가와 레슨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지금 나와 키스를 하고 있는 한지영처럼 말이다.

이거… 좋게 생각해야겠지?

뭔가 조금 불안했지만… 나는 고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아, 하아아… 어때요? 좋았어요?”

“으응?”

“제 키스 연기 좋았냐고요.”

“자, 잘하던데? 성아는 첫 키스할 때 완전 별로… 앗, 아니, 그게…”

“성아보다 제가 더 잘해요? 흐응, 그럼 됐어요.”

만족한 얼굴로 내게서 멀어지는 한지영. 그녀가 혀를 내밀어 자기 입술을 핥더니, 코웃음을 치며 벗어 뒀던 코트를 걸쳤다. 역시 성아 이야기를 꺼내길 잘한 거 같다. 이 정도면 한동안 조용히 있겠지? 나는 그녀 몰래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부사장님, 재밌는 소문이 들리던데 그거 진짜예요?”

“소문?”

“아이돌 하나 가르친다면서요.”

“아, 그거? 맞아. 연기 레슨은 아니고 그냥 기본기 레슨을 좀 해 주고 있어.”

“흐응… 연기는 아닌 거죠?”

“응, 걔는 재능 없어서 연기 못 해.”

“그래요, 알겠어요. 그러면 이만 가 볼게요.”

“그래, 조심히 가.”

- 벌컥

“후우…”

하여튼 한지영 쟤만 만나면 기운이 다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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