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화 〉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기(5)
* * *
얼마만에 먹는지 모르겠는 따뜻한 흰 쌀밥. 젓가락 사이로 잡히는 부드러운 감촉에 군침을 주르륵 흘렸어요. 쌀밥 특유의 맛있는 냄새가 콧잔등을 간지럽혔어요. 이제 막 만들어진 도시락이구나. 모락모락 새어 나오는 김을 보면서 저는 활짝 미소 지었어요.
“흐으응, 맛있겠다아… 하린아, 잘 먹어!”
“응, 너도 잘 먹어 하나야.”
메뉴는 돈까스와 계란 후라이, 그리고 미니 샐러드와 김치. 저는 먼저 샐러드를 집어 슬쩍 입 안으로 집어 넣었어요. 으응, 유자 드레싱이구나. 나 이거 좋아하는데. 아삭아삭하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드레싱 소스가 입 안 곳곳으로 퍼져 나갔어요. 짜증났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 내렸어요.
“하음… 으으음…”
“맛있다아…”
샐러드는 합격점. 그렇다면 돈까스는 어떨까요? 보기보다 두툼한 돈까스 두께가 저를 설레게 만들었어요. 바삭한 튀김옷 안에 육즙 가득한 돼지고기. 그리고 치즈가 섞여 마든 훌륭한 하모니. 아직 먹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었어요. 이 돈까스는 맛있는 돈까스라는걸요!
“와아, 치즈 좀 봐!”
“헤, 헤에…”
참을 수 없었던 저는 작은 입을 벌려 돈까스를 한 입 베어물었어요.
“맛있어어어어!”
그리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감탄했어요. 그야말로 완벽… 이때까지 제가 먹어 본 돈까스 중에 최고였어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돈까스가 이 네모난 도시락 통 안에 담겨져 있었어요.
“하으응…”
“으음, 하아…”
씹을 때마다 달짝지근한 양념과 고기가 섞여 천상의 조화를 이루었어요. 이쯤되면 음식이라기보단 하나의 예술이었어요. 감동한 저는 멈추지 않고 미식을 이어갔어요. 우울함 따윈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어요.
이 도시락만 계속 먹을 수 있다면 그깟 키스 정도는…
“하린아, 너 진짜 잘 먹는다.”
…라니, 그건 아니잖아요!
아직도 배가 고파서 헛소리가 나았나 봐요. 호들갑을 멈춘 저는 에잇하고 계란 후라이를 찔렀어요. 그러자 노른자가 흘러나오면서 안그래도 완벽했던 도시락을 완성시켰어요.
**
“”잘 먹었습니다!””
“하아… 진짜 너무 맛있는 거 아니야?”
“응, 고기랑 치즈는 물론이고 바삭하게 튀겨진 걸 보면 기름도 고급으로 쓴 거 같은데, 도시락 음식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퀄리티였어. 거기다 양이 적은 것도 아니잖아. 이 정도면 적어도 만 이천원은 받아야 할걸? 점수는 5점 만점에 4.5점이야.”
“흐응, 우리 하린이 또 시작했구나?”
“그, 그치만 맛있었단 말야!”
“그래 그래, 그렇게라도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야, 하린아.”
“으응…”
이런 말하긴 부끄럽지만 사실 맛있는 음식만 먹으면 눈이 돌아가는 저예요. 입을 즐겁게 해 주는 음식들을 먹다 보면, 어떤 재료로 어떻게 요리했을까 상상이 돼서 저도 모르게 흥분을 하거든요. 그래서 오늘도 조금 들뜨고 말았어요.
“근데 5점이 아니라 4.5점이야? 0.5점은 어디 갔어?”
“국물이 없잖아.”
“나왔다! 아저씨 입맛!”
“아, 아저씨라니! 돈까스만 놓고 보면 완벽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안 맞았단 말야! 느끼한 걸 잡아 주는 국물이 필요했어. 아저씨 입맛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조화를 보고 하는 소리라구!”
“흐응… 난 느끼한 것도 좋아해서, 잘 모르겠어.”
“그야 물론 취향 차이는 있겠지만, 그래도 맛의 밸런스를 생각했다면 미니 샐러드 말고도 미소 된장국을…”
“아아, 알겠어 알겠어. 내가 또 괜한 걸 건드렸네. 항복!”
다른 건 몰라도 미식은 타협할 수 없다고요! 오늘도 하나를 논파하는 데 성공한 저는 젓가락을 내려 놓았어요. 국물만 있었다면 정말 5점짜리 도시락이었지만… 그래도 이걸로 만족해야겠죠. 아쉬움을 삼킨 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어요.
“그럼 우리, 내일부턴 커피도 달라고 하자!”
“커피?”
“응! 원래 느끼할 땐 커피잖아!”
“그건 동의하는데… 커피 값으로 막 이상한 걸 시키면 어떡해. 솔직히 많이 무섭단 말야…”
“에이, 강요는 안 한다고 했잖아. 얘기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거절하면 되지! 너무 그렇게 미리 겁먹지는 마.”
“…그런가?”
“그리고 아저씨가 무섭긴 뭐가 무서워. 잘생겼잖아! 잘생긴 게 최고인 거 몰라? 무서운 것만 따지면 역겨운 최진호가 더 무섭지! 아까 그 새끼 화낼 때 진짜 소름 돋았다니깐.”
“으응…”
“게다가 아저씨는 키스도 잘하잖아. 정 안되면 그냥 키스해 달라고 하면 돼. 그러면 기분도 좋아지고, 커피도 얻어 먹고… 히히, 일석이조야!”
그러고 보면 하나가 엄청 야한 소리를 냈었죠.
헤실헤실 웃으며 얼굴을 붉히는 하나를 보자 딥 키스에 흥미가 생겼어요. 제가 한 키스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하나는 벌써부터 키스에 푹 빠진 듯 보였어요. 혀와 혀를 섞는 딥 키스는 또 다른 느낌인 걸까요? 그렇게 생각하며 제 첫 키스를 떠올리자, 살짝 맛보았던… 남자의 침이 생각났어요.
설탕보다 달콤하고 꿀보다 황홀했던, 점수로 치면 거의 4.7점은 되는 남자의 침.
잠깐… 딥 키스를 하면 그 침을 마음껏 마실 수 있잖아요!
이제야 몸을 배배 꼬고 있는 하나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걸 맛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딥 키스는 충분히 할 가치가 있었어요. 돈까스 도시락도 정말 맛있었지만, 언제나 디저트는 필요한 법이잖아요!
아아, 입술에 묻은 얼마 되지도 않는 침만으로도 크게 감동했던 저예요. 그런데 그 침을 원하는 만큼 마실 수 있다면… 하아앙,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달아올랐어요. 4.7점짜리, 아니, 사실상 4.8점에 가까운 디저트를 맛 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었어요.
그러니 하나처럼… 가슴을 대주는 건 무리여도, 어차피 키스도 한 사이인데 혀를 섞는 것 정돈 괜찮지 않겠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어요.
시우한텐 조금 미안했지만… 어차피 시우는 제가 뭘 하든 별로 신경도 안 쓰잖아요. 굳이 제가 시우를 위해서 4.8점짜리, 아니 사실상 4.9점에 가까운 달콤함을 포기할 이유는 없었어요. 응, 맞아요. 죄책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스트레스가 풀리죠!
맛있는 돈까스를 먹었더니 욕심이 났어요.
좀비가 나타나면서 포기했던 미식 탐방을 재개할 기회가 찾아온 거잖아요. 이대로 바보같이 포기할 순 없었어요. 탐방 대상이 남자의 침이라는 게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거의 5점 만점에 가까운 맛이라면…
“하린아!”
“으, 으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왜 불러도 대답을 안 해.”
“그으… 그게, 아하하… 아까 일이 생각나서…”
“아, 맞아! 너 그런 거 되게 싫어했었지? 미안… 내가 깜박했어. 많이 힘들었지? 으이구 우리 하린이… 내가 챙겨 줬어야 했는데…”
“하나야…”
“그래도 걱정 마. 보니깐 아저씨가 변태긴 해도 선을 넘는 변태는 아닌 거 같더라고... 그러니 내가 네 몫까지 해 준다고 하면 분명 이해해 줄 거야.”
“……응?”
“그러니깐 아저씨랑 키스해야 한다고 너무 괴로워하진 마. 내가 책임지고 너 대신 키스할게. 친구 좋다는 게 뭐야, 히히.”
아, 아닌데… 안 그래도 되는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저를 위해서 하는 말이었지만, 오히려 저를 방해하는 말이었어요. 저 대신 키스를 하겠다니, 그러면 제가 남자의 침을 맛볼 수 없잖아요! 그런 일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어요.
“아니야! 그러지 마! 내 몫은 내가 책임질게. 응, 그럴게… 그게 맞아. 내가 할 일인데, 내가 해야지. 그걸 왜 네가 해. 안 그래? 나 때문에 괜히 무리하진 마.”
그래서 저는 횡설수설하며 하나의 배려를 거절했어요.
“무리하는 거 아닌데? 아저씨랑 키스하고 싶어서 이러는 건데? 헤헤, 엄청 좋았단 말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너 때문에 희생하고 막 그런 거 아니야. 나도 좋고 너도 좋은 거라구!”
나, 나도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라고 대답할 순 없었어요. 이유가 너무 변태같잖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어요. 사실상 5점 짜리인데, 그걸 어떻게 포기해요! 결국 저는 하나를 와락 껴안으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야만 했어요.
“내가 불편해서 그래… 너한테 피해가 가는 게 아니더라도 나 혼자 가만히 있을 순 없단 말야. 부탁이야, 하나야. 내가 마음의 짐을 덜게 해 줘. 네가 정말 나를 생각한다면… 그냥 나를 내버려 둬. 응?”
“하린아… 알겠어. 그래도 못 버티겠으면 언제든지 말하는 거다?”
“응!”
휴우, 역시 하나는 좋은 친구예요.
그렇게 하나를 설득하는데 성공한 저는 화장실에서 간단히 씻은 후 남자에게 받은 이불을 깔고 하나와 함께 자리에 누웠어요. 좀비 사태가 터지고, 부모님과 연락이 끊기고, 학원에 갇혔다가 민아 쌤이 죽고, 정말 힘든 일의 연속이었지만… 오늘 하루도 버텨냈어요.
“하린아, 잘 자.”
“응, 하나 너도 잘 자.”
앞으로도 오늘과 같은 일들이 반복되겠지만… 그래도 이겨낼 수 있겠죠? 그래도 내일,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힘이 났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