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3화 〉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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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좀비를 잡으면서 알게 된 건데, 이 세상에는 ‘포인트’라는 게 존재했다. 좀비를 죽이면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재화 같은 건데, 이걸 가지고 ‘포인트 상점’이라는 곳에서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을 살 수 있었다.
투욱
“어어어?! 도시락?!”
“으읏…”
거기서 고급 도시락을 하나 구매한 나는 아무 대가없이 여자들에게 넘겨 주었다. 거래를 하기 전에 먼저 물건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듣자 하니 벌써 이틀 째 굶고 있다고 하던데, 배가 많이 고플 거 아니야. 이 정도 고급 도시락이라면 그녀들의 흥미를 끌기 딱 좋은 물건이었다.
“도와 주긴 도와 줄 건데, 아무 대가없이 도와 주는 건 너무 호구잖아. 그러니… 우리 거래하지 않을래? 값만 쳐 준다면, 내가 뭐든지 다 챙겨다 줄게.”
“뭐… 뭐든지요? 우으으…”
내 말에 꿀꺽하고 침을 삼키는 조연 여캐. 그녀가 조심스레 나를 쳐다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내게 되물었다. 보아하니 도시락 말고도 원하는 게 있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바로 영업해 줘야겠지. 나는 포인트 상점에서 커피 한 잔을 추가로 구매했다.
“응, 뭐든지. 커피든 뭐든 말만 해. 내가 이렇게 다 구해 줄게.”
“아… 고, 고맙습니다. 그러면 혹시…”
“하나야, 잠깐만!”
“…으응?”
“저기요… 대가라는 거, 그거…! 정확히 뭘 의미하는 거예요? 거래라면서요, 그러면 가격부터 알아야죠. 예를 들어서 저 도시락… 저 도시락 하나에 얼마죠? 그거부터 미리 말해 주세요!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말고요!”
뭐야, 저 녀석. 기절한 거 아니었어? 정신을 차린 주인공이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정색을 하며 나를 방해했다. 얌전해진 조연 남캐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저러니 저 놈이 시우라는 소리를 듣지. 단번에 짜증이 났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굳이 내가 화를 낼 이유는 없었다. 여자 친구가 함락되는 걸 봐야 하는 쪽은 주인공이잖아. 나는 너그럽게 주인공을 용서해 주었다.
“가격? 그래, 가격 중요하지. 그러면 말해 줄게.”
“어, 얼만데요!”
“도시락 하나에 키스 한 번이야.”
“뭐어…… 씨발, 지금 뭐라고요?!”
명색이 시우인데 아직 키스도 안 해 봤겠지? 얼굴이 굳은 주인공을 보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고맙다 시우야. 첫키스는 내가 잘 가져갈게. 나는 욕설을 내뱉은 주인공을 바라보면서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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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남자가 사라지자 네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여우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상황이었다. 다행히 남자가 무자비한 살인마나 강간마는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그들 네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건 분명했다. 도시락 하나에 키스 한 번이라니… 그들은 마음 속으로 남자를 욕했다.
“얘들아… 어쩔 수 없었던 거 알지? 딱히 내 잘못은 아니다?”
“……”
“아, 진짜! 그러면 뭐, 도망이라도 쳤어야 했다는 거야? 너희들도 봤잖아! 손짓 한 번으로 좀비들 수십 마리가 죽어나간 거. 근데 우리가 도망칠 수 있었을 거 같아? 아니, 절대로 아니야. 도망치려다가 그냥 꽥하고 죽었을걸?”
“……”
“야, 그나마 비위라도 맞춰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러니깐 너희들… 쓸데없이 내 탓하지 마.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 나도 너희 지키려고 그 지랄 했던 거야! 그러니까 야, 한시우! 그딴 식으로 쳐다보지 마. 씨발 누구는 안 좆 같은 줄 알아?!”
“오빠, 왜 그래! 아무도 오빠한테 뭐라 안 했어!”
“아니, 저 새끼 표정이 사람 빡치게 만들잖아!”
그러던 와중, 최진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남자를 끌어들인 것에 죄책감을 느낀 그가 저도 모르게 방어기제를 펼친 것이다. 괜히 한시우만 억울해진 상황. 하지만 한시우는 그의 분노를 이해해 주었다.
최진호를 비난하기에는… 한시우가 여태껏 그에게 받은 도움이 너무 많았다.
“시우 표정이 어때서! 쟤나 하린이나 똑같잖아! 그럼 하린이한테도 욕할 거야?!”
“아니, 하나야…”
“그냥 힘들어서 저러는 거잖아. 왜 이상한 오해를 하고 그래? 오빠야 말로 사람 빡치게 만들지 말고, 진정 좀 해! 우리끼리 싸우고 있을 때야? 아니잖아! 이럴 때일수록 힘을 합쳐야지! 어른이면 어른답게 좀 행동해 봐! ”
“하아… 쓰읍, 그래… 그럴 때가 아니긴 하지…”
“그치? 우리도 오빠 마음 다 아니깐… 화내지 말고 좀 진정해. 오빠가 화낼 때마다 분위기 이상해지는 거, 나 그런 거 싫단 말야!”
“에휴…… 쯧,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시우야.”
거기서 상황을 반전시킨 건 유하나였다. 평소처럼 여자 친구에게 한소리를 들은 최진호가 깊은 한숨 끝에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녀 말대로 화를 내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잠깐의 소란 끝에 다시 조용해진 305호실. 쓴웃음을 지은 한시우가 등을 벽에 기대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강요는 안 해서 다행이에요, 형. 거절해도 된다고 하잖아요.”
“쓰읍, 그렇긴 한데… 그것도 먹을 걸 구해 왔을 때의 이야기지, 당장 배고파 죽겠는데 그게 강요가 아니면 뭐냐. 그냥… 당분간은 그 새끼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거 같다. 더럽고 치사해도 어쩌겠냐… 우리가 을인데.”
“네? 아니, 진심이세요?!”
“일단은 그래야 하지 않겠냐? 지금쯤 좀비들도 다시 바글바글해졌을 텐데, 솔직히 그거 우리가 어떻게 뚫고 들어가냐. 그 새끼면 몰라도.”
“그, 그치만…”
최진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듣기 싫었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설득력이 높은 주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시우는 그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하린이가 그 새끼랑 키스를 해야 한다고? 분노한 한시우가 주먹을 불끈 쥔 채 입을 열었다. 그는 최진호를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하나야, 당분간 신세 좀 질 수 있을까?”
그러나 소리를 낸 건 최진호가 먼저였다.
“……그게 무슨 뜻이야, 오빠?”
“아니… 말했잖아. 지금 당장 먹을 걸 구해 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그래서, 그… 우리 먹을 것도 좀 챙겨 주면 안 되냐? 키스한다고 뭐 닳는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하게 될 키스, 한 번 더 해서 내 밥도 좀 챙겨 주라. 응?”
“오빠, 미쳤어?!”
듣다 못한 유하나가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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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 하나야. 화내지 말고 내 이야기 좀 들어 봐. 계속 그렇게 얻어 먹겠다는 소리가 아니야. 그게… 포인트 상점이란 게 있거든? 좀비를 죽이면 포인트를 얻을 수 있는데, 그 포인트로 여기서 뭘 살 수 있냐면…”
터무니없게 느껴졌던 진호 오빠의 이야기였지만, 듣다 보니 설득력이 있었어요. 포인트를 벌어 능력치, 그러니깐… 근력이나 지구력 같이 생존에 필요한 능력들을 키울 수 있다는 것, 그걸 바탕으로 더 강해져서 더 많은 포인트를 벌 수 있다는 것. 진호 오빠의 말에 따르면 긍정적인 선순환이 가능했어요.
“그래서… 강해질 때까지 나보고 부양해 달라는 거야?”
“응, 얼마 안 걸릴 거야. 아까도 내가 좀비 한 마리 잡았잖아. 그래서 5포인트 벌었거든? 그렇게 열 마리만 잡아도 도시락 하나야. 간단하지?”
“간단은 무슨… 그러다가 민아 쌤처럼 좀비한테 물리면 어떡해!”
“걱정 마. 자신 있어. 목표가 다르잖아. 뚫고 가는 거는 불가능해도, 한 마리씩 유인해서 잡는 것 정도는 할만 해. 너도 봤잖아. 좀비 새끼들 존나 느린 거.”
“우으으…”
물론 포인트니, 상점이니… 정말 비현실적인 이야기였지만… 그렇게 따지면 좀비부터가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5포인트짜리 빵을 직접 눈으로 확인까지 한 상황에서, 진호 오빠의 말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어요.
“알겠어. 알겠으니깐…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하나야! 믿어 줘서 고마워!”
“에휴… 그런데 너희는 어떡할 거야? 너희라고 다를 건 없잖아. 하린아, 너 그 남자랑 키스할 수 있겠어? 너 그런 거 되게 싫어하잖아.”
“나, 나는…”
그래서 저는 잠시, 아주 잠시 망설였다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하나도 하는데 제가 안 할 순 없잖아요. 애정도 없는 키스… 정말로 하기 싫었지만, 시우를 위해서라면 감내할 수 있었어요.
“절대 안 돼! 하린아, 내가 어떻게든…”
“야, 한시우. 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 너 내려갔다가 좀비한테 물리면…하린이는 어떡하라고! 어리광 부리지 말고 현실을 보고 말해. 너 혼자서 먹을 거 구해 올 수 있어? 구해 올 수 없으면… 억지 부리지 마!”
“으윽…”
시우가 저를 말렸지만 저는 애써 괜찮다고 대답해 줬어요. 진호 오빠 말대로 입술이 닳는 것도 아니잖아요. 물론 그 말에 동의를 할 순 없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러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는걸요…
태연을 가장한 저는 살며시 손을 뻗어, 떨고 있는 시우의 손을 잡아 주었어요. 따뜻한 그의 체온이 느껴지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어요. 하아…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깍지를 낀 저희는 자연스레 서로의 어깨에 몸을 기댔어요.
“괜찮아, 시우야. 너무 걱정하지는 마.”
“하린아…”
지금이면… 계속 미뤄 왔던 첫 키스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용기를 낸 저는 슬그머니 시우에게 신호를 보냈어요. 하나와 진호 오빠가 옆에 있었지만… 더는 기회가 없잖아요. 무시무시한 남자와 키스를 하러 가기 전에 먼저 시우와 하고 싶었어요. 평생 동안 기억할 제 첫 키스를…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 인마! 표정 좀 풀어. 그래 봤자 고작 키스잖아. 첫 키스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심각한 척이야. 앞으로 하린이가 배우되면 몇 번이고 찍을 게 키스 신인데, 미리 대비한다고 생각해.”
“하, 하하… 그렇긴 한데…”
그런데… 좋았던 분위기를 진호 오빠가 다 망치고 말았어요. 그래 봤자 고작 키스라뇨, 저희는 아직 해 본 적도 없단 말이에요. 당황한 시우가 깍지를 풀더니 제게서 멀어졌어요. 저는 그래도 하고 싶었는데… 조금 상처를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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