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 네토리-300화 (299/428)

〈 300화 〉 혼돈, 파괴, 망가(1)

* * *

B등급인 게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뭐… 재밌었잖아. 충분히 만족한 나는 아무 미련도 없이 ‘보너스 찬스’를 끝마쳤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미련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보너스 찬스’라고 계속 거기에 있을 순 없잖아.

두 히로인들과의 3P 플레이를 끝으로 스스로와 타협한 나는 B등급에서 만족한 후 약속했던 ‘강제 복귀권’을 얻어 냈다. 위지혜를 만나러 갈 수 있는 ‘강제 복귀권’을 말이다.

따라서 이제 남은 것은 위지혜를 만나, 그녀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분명 세 번째 한계 돌파 조건은 히로인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듣는 거였지? 내가 다른 세계관에서 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게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위지혜라면 틀림없이 활짝 웃으면서 나를 받아 줄 거다.

그래, 웃으면서 말이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위지혜 앞에서 고백하려고 하니 쉽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아니, 어쩔 수가 없는 게… 진짜 고백하기 난감한 주제잖아.

자칫하면 어디 한 대 맞아서 정신이 나간 거 아니냐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여기는 고지식한 무협 세계관이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위지혜를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백랑? 제 말 듣고 있나요?”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 용기를 낸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모든 것을 위지혜에게 털어 놓았다.

***

“굉장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네요. 하지만 백랑이 하는 말이니, 분명 허언이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믿을게요. 백랑의 진짜 정체가 무엇이든, 저는 당신이라는 사람 그 자체를 사랑하니까요.”

“혜매…”

역시… 위지마망은 위지마망이었다. 괜히 걱정했잖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말을 믿어 주는 위지혜 덕분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런 게 바로 사랑인 건가? 감동을 받은 나는 그 즉시 달려 나가 위지혜를 안아 주었다.

­타앗

그런데 그녀가 내 품에서 벗어나더니 정색을 하며 내게 말했다.

“혹시 은아나 남궁 소저에게도 말할 건가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두 사람의 이름을 듣고 보니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위지은도 그렇고 남궁빈도 그렇고 둘 다 엄청 매력적인 히로인들이잖아. 특히 남궁빈은 절세가인이니 현실에 데려와서 꾸미는 재미도 있을 거 같았다.

“…은아 아가씨나 남궁 소저요?”

“말하지 마세요.”

“네에?”

“말하지 마시라고요!”

“혜매…”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 하니 당분간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게 좋아 보였다. 언제나 자애로운 미소를 짓던 위지혜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백랑이 아닌 당신의 진짜 정체 정도는 제가 독차지 하고 싶어요. 제가… 제가 정실이잖아요!”

말로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못내 아쉬웠던 건지 울먹이던 위지혜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생각해 보면 나는 진짜 쓰레기 중에 쓰레기였다.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그녀의 동생인 위지은이나 제갈연화, 당소연, 거기다 남궁빈까지 내 여자로 만들었으니… 사실 욕을 먹는 게 정상이었다.

하아… 그런데도 욕심을 부리는 자신이 밉다며 스스로를 자책하다니, 앞으로 더 잘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한 번 위지혜를 안아 주었다.

“두 사람에겐 비밀로 하겠습니다.”

“백랑… 고마워요.”

“한데 그으… 제가 한두 곳을 다닌 게 아니라… 혜매 말고도 다른 정실들이…”

­뿌득

“끼에에에엑!”

그런데 내가 괜한 말을 덧붙인 건지 좋았던 분위기가 단번에 심각해졌다.

***

누군가가 말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그 격언을 믿은 나는 지체없이 내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아니, 더는 속일 수 없잖아. 모든 것을 밝히기로 했으니 다른 세계관에도 내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야만 했다.

“와아… 여기가 백랑의 세상이군요!”

그리고 그 격언은 사실이었다. 차가운 표정으로 내 허리를 부서뜨리려 하던 위지혜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내 방을 둘러보았다. 마치 난생 처음 북경을 구경하는 촌뜨기처럼 말이다.

처음 보는 광경에 화가 풀린 걸까? 역시 소환하기 전에 미리 그 사실을 고백한 게 정답이었다. 순서가 반대였다면 이렇게 상황을 반전시킬 수는 없었을 거 아냐. 뭐, 그렇다 하더라도 위지마망이니깐 금방 화를 풀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허공에 나타난 반투명 알림창을 확인했다.

[업적달성: ‘메인 히로인의 호감도 200 돌파’]

[메인 히로인 ‘위지혜’의 호감도가 200을 초과하여 메인 히로인 ‘위지혜’가 속한 세계관에 아무런 비용 없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관이 완결난 경우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업적달성: ‘메인 히로인 호감도 300 돌파’]

[메인 히로인 ‘위지혜’의 호감도가 300을 초과하여 메인 히로인 ‘위지혜’를 현실에서 소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분당 10포인트를 소모합니다.)]

1분당 10포인트면 1시간에 600포인트, 하루에 1만 4400포인트지? 아직 세계관이 완결나지 않은 세실리아의 경우와 달리 굉장히 저렴한 비용이었다. 거기다 신경이 쓰였던 하루 최대 1시간 제한도 사라져 있었다.

그렇다는 건… 포인트만 있다면 평생 동안 현실에서 함께할 수 있다는 거잖아.

이거… 세실리아가 속한 세계관도 빨리 완결내는 게 좋아 보였다. 원래라면 하극상을 일으켜서 세실리아와의 관계를 모두에게 인정받을 생각이었지만, 이제 그럴 이유가 사라졌잖아.

현실 소환이 가능해 졌으니 빨리 엔딩을 보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백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내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위지혜가 설레어하며 내게 다가왔다. 어쨌거나 위지은도 남궁빈도 아닌 오직 자신만이 선택 받았다는 사실에 크게 만족한 눈치였다.

물론 세실리아를 소환하면 또 달라질 표정이겠지만, 웃고 있는 위지혜를 보자 나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네? 아, 잠시 계산할 게 있어서요.”

“흐음… 설마 저를 앞에 두고 다른 여자를 생각한 건 아니겠죠?”

“에이, 설마 제가 그랬겠습니까? 하하하.”

“으음… 그런데, 후후… 머리가 짧은 백랑도 역시 매력적이네요. 의복이 달라서 더 그런 걸까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멋져 보여요. 근육도 더 커진 거 같고요…”

“현실에서 보는 혜매도 몇 배는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후후… 정말요? 제 어디가 그렇게 아름다운가요? 얼굴? 다리? 그게 아니라면… 백랑이 맨날 만져 대는 제 젖가슴? 그것도 아니라면… 후후, 말로는 못 알아 듣겠으니깐, 백랑이 직접 만져서 알려 주세요. 네에?”

위지혜가 스스로 옷을 풀어헤치면서 은근슬쩍, 아니, 대놓고 나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색다른 내 모습에 그녀가 흥분을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넘어가 줘야 남자지. 나는 살포시 그녀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 놓고서는…

“으으음냐… 오빠아, 하아… 오빠아…”

속곳을 벗기려고 했는데, 옆방에서 잠꼬대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과연, 저 말고 다른 정실이랑 동거를 하고 계셨군요?”

“그으… 현아랑은 아직 사귀는 사이가 아니긴 한데…”

“콜록콜록… 사귀는 사이도 아니라고요?!”

내가 미쳤지. 옆방에서 자고 있는 현아를 그만 잊고 있었다. 원래라면 현아가 일어나는 대로 고백을 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저런 일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깜빡했었던 것이다. 진짜 쓰레기구나, 나란 놈은.

그 덕에 다시 한 번 좋았던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그게… 현아는 제 동료인데… 동거하는 건 아니고 오늘만 잠시…”

“변명하지 마세요. ’아직’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면서요. 그러면 마음은 있다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정실 맞잖아요!”

“크흠… 동거하는 건 아니지만 서로 좋아하는 사이이긴 한데… 고백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제 비밀을 공개하기가 부담스러웠거든요. 그래서 ‘아직’은 사귀는 사이가 아닙니다.”

“자, 잠시만요. 그러면 제가 백랑의 비밀을 들은 첫 번째 정실인가요?!”

“그, 그건 또 아닙니다… 그으, 세실리아라고, 제 딸이 있는데…”

“딸이요? 백랑 유부남이었어요?! 아니, 잠깐… 지금 자기 딸보고 정실이라고 한 거예요?! 도, 도대체가…”

“그으… 그것이…”

아, 미치겠네. 차분히 설명을 하려고 했는데 한번 말리도 보니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러다가 위지혜한테 차이는 거 아냐?

에라 모르겠다.

­파아아앗

“어머, 아버지?”

머릿속이 하얘져서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거 같았던 나는 세실리아라는 아주 착하고 예쁜 조력자를 소환했다. 세실리아는 똑똑하니깐 이 상황을 정리해 줄 수 있겠지?

“누구죠, 이 가슴만 큰 아줌마는?”

……어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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