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화 〉 성좌 계약은 신중히(28)
* * *
“거, 거짓말이지? 내가… 졌다고?”
“흐흥, 그야 당연한 결과죠! 제가 당신한테 질 리 없잖아요.”
“으으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방심했던 건 아니었는데… 그레이스는 생각보다 뛰어난 실력자였고, 기세에 휘말렸던 나는 제 실력을 드러내지 못 한 채 허무하게도 그녀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종이 한 장 차이… 정확히는 A4 용지로 30장 정도 차이인가? 다시 붙는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지만…
“이게 현실이에요!”
그러면 뭐 해. 이미 져 버렸는걸.
패배한 나는 굴욕감을 느끼며 그레이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축하한다, 그레이스. 훌륭한 솜씨였다.]
“헤헤… 완벽했죠? 아름답고, 섹시하고, 귀엽고, 매력적인 저… 그레이스 다웠죠? 흐흥, 전부 다 성좌님 덕분이에요! 감사해요.”
[그리고 시아, 아까웠다.]
“위로해 주지 마! 더 슬퍼진단 말야…”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내가 먼저 키스했는데, 내가 먼저 따먹었는데… 정실이 아닌 게 말이 돼?! 억울하고 또 억울했지만 표현을 할 수는 없었다. 원래 패배자는 말이 없는 법이잖아.
한숨을 내쉰 나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레이스를 노려봤다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이름 없는 복수자’에게 물었다.
“자지 우선권, 그거… 유효 기간 있어? 이번 한 번으로 평생 동안 우선권을 주는 건 너무 치사하잖아. 나한테도 리벤지 기회를 줘.”
[좋다. 일년에 한 번씩 기회를 주겠다.]
“뭐어?! 그건 너무 길잖아! 한 달에 한 번은 줘야지!”
“자, 잠깐만요! 한 달에 한 번이라뇨! 그건 너무 짧잖아요!”
[흐음… 그러면 분기마다 한 번씩 기회를 주는 걸로 하겠다. 의의는 없겠지?]
“네에에?! 그것도 너무 짧은데요?!”
“분기마다라, 그것도 너무 긴데... 흥, 어쩔 수 없지. 알겠어.”
좋아, 3달만 참으면 된다 이거지? 생각도 못 했던 패배로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 정도면 참을 수 있었다. 아니… 사실 그 정도도 참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뭐, 별 수 없잖아. 다음 번에는 반드시 이길 거라고 다짐하며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와아아… 대단해요! 기대하라는 말은 들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너어… 너무 사치 부리는 거 아냐? 이거 엄청 비쌀 거 같은데… 괜찮은 거야?”
[문제없다.]
“멋져요, 성좌님! 에헤헤… 여기라면 안심하고 쉴 수 있겠어요!”
“그리고 여기라면 남들 눈치 안 보고 마음껏 할 수 있겠네… 그래서 준비한 거지?”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성좌들의 눈치도 안 볼 수 있다. 이 텐트 안의 공간은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거든. 그래서 조금 비싸지만… 못 살 정도는 아니다.]
‘이름 없는 복수자’가 우리를 위해 준비했다며 허름한 텐트를 건네길래 화를 내려고 했는데, 막상 텐트 안으로 들어오니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는 거의 뭐, 호텔 아냐? 완전 대박이잖아!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카펫과 품격 있어 보이는 가구들, 그리고 마음껏 누울 수 있는 킹사이즈 침대까지. 이래서 성좌 잘 만나는 게 중요한 거구나. 오늘도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끼며 나는 침대로 다이빙했다.
“그런데 다른 성좌들의 눈치를 안 볼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평소에도 딱히 눈치를 보진 않았잖아요.”
“그러게. 걔들한테 뭐 숨길 거라도 있어? 갑자기 왜 눈치를 다 보냐.”
[그건… 이렇게 하기 위해서다.]
“…….”
“…….”
[연인이 되었는데 본 모습 정도는 보여 줘야 할 거 아닌가. 평소라면 함부로 할 수 없는 강림이지만, 이 텐트 안에서라면 아무 문제없다.]
“어, 어머… 어머머…”
“미, 미친…”
[응? 반응이 왜 그렇지? 생각보다 별로인가?]
“완전 잘생겼잖아요오!”
“존나 잘생겼잖아아아!”
이게 말이 돼? 아니 무슨… ‘성좌가 외모를 숨김’이냐고! 기대 이상의, 아니, 상상을 초월하는 ‘이름 없는 복수자’의 외모에 충격을 받은 내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이건 완전 반칙이잖아! 시우도 나름 잘생긴 편에 속했지만, ‘이름 없는 복수자’는 차원이 달랐다.
다다다닥
“뭐예요, 뭐예요, 뭐예요오! 너무 잘생겼잖아요! 진짜 얼굴 맞아요? 막 일부러 변장한 거 아니죠?! 네에?! 믿어도 되는 거죠?!”
[일부러 변장할 정도로 자존감이 없지는 않다.]
“대박… 계속 모습을 숨기시길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완전 제 착각이었군요! 멋져요… 사랑해요, 성좌니임…”
“야, 야아! 여우짓 좀 그만해!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냐?”
“흥! 패배자는 거기 가만히 누워 계세요. 우선권은 저한테 있다는 걸 잊으셨나요? 앞으로 세 달간은 항상 제가 먼저라고요!”
“씨발…”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열심히 싸우는 거였는데…
활짝 웃으며 ‘이름 없는 복수자’를 끌어안는 그레이스를 보자 속이 불편해졌다. 완전 죽 쒀서 개 준 꼴이잖아. 그때 화만 안 냈어도 내가 쟤를 독차지하는 건데… 하아, 후회하기 싫어도 후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
“흐흥, 알겠어요? 그러니 성좌님과 키스를 하는 것도 제가 먼저랍니다!”
“알겠다고…”
화가 났지만 나는 ‘이름 없는 복수자’ 앞에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들고 있는 그레이스를 바라만 봐야 했다. 정말로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말이다. 키스를 하는 것도 구경만 해야 한다니, 내 처지가 너무 처량했다.
“츄웃, 하아아… 츄릅, 우음… 마주 보면서, 츄웁, 츗… 하는 키스으… 너무 좋아요. 성좌님은 눈을 뜨고 키스를 하는, 츄릅, 하아… 타입이셨군요.”
“……”
“우읏, 하앙… 마음껏 감상해 주세요오… 츗, 츄릅… 성좌님이라면 얼마든지 보셔도 괜찮답니다, 츄웃, 츕… 흐흥…”
“씨바아아알!”
아니, 그런데 저건 좀 선 넘은 거 아니야? 키스를 할 거면 키스에만 집중할 것이지, 그레이스가 자꾸만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마치 티배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름 없는 복수자’의 가슴팍을 어루만지는데…
정말이지 부러워서, 아니, 죽이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제발 좀 적당히 하라고! 우선권을 가진 거지 독점권을 가진 게 아닌데 그레이스가 하는 짓이 너무했다.
“하아앙… 그러면 이제 슬슬… 벗겨도 되죠? 성좌님의 모든 곳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자지도요… 에헤헤.”
“지랄.”
“거기 구경꾼은 입 다무세요. 패배자 주제에 참 말이 많네요. 자위하는 것 정도는 허락해 드릴 테니깐, 자위나 하고 계시라고요!”
“너어…! 자꾸 그렇게 싸가지 없게… 꺄아아앗!”
“어, 어머어! 이, 이게 바로 성좌님의 발기 자지…”
그런데… 진짜 너무한 건 따로 있었다.
야동에서 나오던 자지랑은 비교도 안 되잖아!
‘이름 없는 복수자’의 자지는 그야말로 폭력적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여자를 미치게 만드는 흉악한 크기와 음란한 생김새! 몇 번이나 몸을 섞었기에 그 크기를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또 달랐다.
저게 내 보지 안에 들어왔었다는 거야?
꿀꺼억…
그 광경을 상상하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와아… 성좌님의 자지는 이렇게 생겼었군요… 엄청나요… 이렇게 대단한 자지랑 섹스를 했었다니… 제 자신을 못 믿겠네요.”
[너 때문에 발기한 자지다. 책임질 수 있겠지?]
“다, 당연하죠… 자아, 직접 벗겨 주시겠어요? 저는 그 동안 저 때문에 흥분하신 성좌님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을게요. 흐흥.”
“야, 주접 부리지 말고 빨리 하기나 해. 기다리고 있는 거 안 보여?”
“아하하… 정말 서민답게 주제를 모르시네요. 패배자는 자위나 하고 계시라니깐요? 어차피 패배 자위에는 익숙하실 거 아니에요.”
“너어어! 그, 그걸 어떻게!”
“어머, 역시나였나요? 혹시나 했는데 진짜였네요. 푸흐흐!”
“야이 씨발년이!”
[그만.]
“으읏…”
“…흥.”
갑자기 정색을 하며 조그맣게 속삭이는 ‘이름 없는 복수자’. 그 덕에 시끄러웠던 그레이스가 조용해졌다. 그러게 적당히 좀 하라니깐. 기분이 좋아진 내가 그레이스를 약 올리려고 하자, 뜬금없게도 ‘이름 없는 복수자’가 내게 다가왔다.
…자지를 덜렁거리면서 말이다.
[동료가 될 사이이니, 그리고 함께 내 연인이 될 사이이니, 더는 싸우지 않았으면 한다. 시아… 너라면 내 부탁을 들어주겠지?]
“네, 네에…”
[하하. 그렇다고 존댓말을 쓰라는 건 아니다.]
“으응… 아, 알았어. 안 싸울게.”
[고맙다.]
아니이… 갑자기 그렇게 다가오면 내가 당황하잖아. 그런 식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부탁하는 건 반칙이라고오… 다른 남자였다면 코웃음 칠 상황이었지만, ‘이름 없는 복수자’가 해서인지 전혀 웃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부끄러워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게 진짜 사랑인 건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나는 떠나가는 ‘이름 없는 복수자’의 손가락을 붙잡으면서 그에게 살포시 소곤거렸다.
“안 싸울 테니깐, 빨리 돌아와 줘어… 나도 너한테 사랑받고 싶단 말야아…”
그러자 그레이스가 싸가지없는 말투로 내게 화를 냈다.
“참 나… 진짜 여우는 당신이었네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