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 네토리-289화 (288/428)

〈 289화 〉 성좌 계약은 신중히(20)

* * *

절체절명의 순간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계약을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번에도 배신당할 줄 알았어요. 위기의 순간에 짠 하고 나타난 것도 수상하고, 제 과거를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것도 의심쩍고…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완전 제 스토커 같잖아요! 저는 ‘이름 없는 복수자’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당장 죽게 생겼는데 어쩌겠어요. 싫어도 믿어야죠. 저는 도박하는 심정으로 ‘이름 없는 복수자’와 계약했어요. 달리 방법이 없었잖아요. 그레이스 델 라피가, 아니, 그레이스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그런데…

“끄아아아아아악!”

“끼에에에엑!”

“끼에에… 끼에에에에에엑!”

이 성좌, 생각보다 제법이군요? 말도 없이 제 몸의 제어권을 가져간 건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수십 가지가 넘는 1회용 아티팩트들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걸 보니 조금은 신뢰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그리고 지금 제 몸에서 느껴지는 이 ‘마나의 흐름’… 이거 그 싸가지 없던 서민이 보여 준 흐름 맞죠? 7대 성좌의 계약자들도 따라하지 못 했던 건데, 이걸 이렇게 자연스럽게 제어하다니… 보기보다 괜찮은 성좌일지도 모르겠어요.

“흐음… 역시 괜찮은 몸이군. 움직이는 맛이 있어.”

……라고 속으로 칭찬하고 있는데, 뜬금 없이 ‘이름 없는 복수자’가 성희롱을 하기 시작했어요. 뭔가요, 이 성좌는! 감히 숙녀의 몸을 품평하다니! 괜찮은 성좌라는 말은 취소예요!

“마나 회로가 아주 투명해. 반응 속도도 좋고. 그야말로 순수한 재능 덩어리군. 이런 건 타고나야 하는 건데… 정말 축복받은 몸이야.”

…..라고 욕을 하기는 했는데, 제가 뭔가 착각을 한 거 같군요? 숙녀답지 않게 조금 성급하게 판단을 내린 거 같아요. 성좌가 계약자를 성희롱할 리 없잖아요. 아무래도 ‘이름 없는 복수자’는 믿을 수 있는 성좌 같아요.

“하지만 정말 실망스럽군. 벌써 마나 고갈인가?”

‘엣, 자, 잠깐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게!’

“가문에서 네 재능만 인정해 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정말 실망스러워. 그 누구보다 빛날 인재를 이렇게 방치하다니, 내가 다 화날 정도다.”

‘에… 그, 그 정도야? 아니, 그 정도예요?’

“네가 제대로 된 지원만 받았었다면… 아티팩트 없이 순수한 네 실력만으로 지금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거다.”

‘……그 정도라고요?!’

흉악한 기세로 저를 둘러쌌던 빌런들. 지금은 생명을 잃고 바닥과 하나가 된 쓰레기들을 가리키며 ‘이름 없는 복수자’가 제게 말해 주었어요. 제겐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재능이 있다고요.

그건 어렸을 적, 제가 아버지한테 했던 말인데… 어리광 부리지 말고 현실을 보라는 말을 듣게 만들었던 말인데… 그게 정말이었군요. 제겐 정말로… 그런 재능이 있었던 거군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인정받은 저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

“……어라? 진짜 눈물이 흐르네?”

[그래, 그 정도다. 그러니 네게, 네 재능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마.]

“아, 제어권이… 잠깐, 기회를 주겠다고요?”

[너를 지옥으로 빠뜨리려고 했던 빌런을 하나 남겨 두었거든.]

“……샤론말인가요?”

[정확히는 헤라다.]

“그래요, 헤라… 그녀를 제 손으로 처리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이름 없는 복수자’의 말을 듣고 주변을 살펴 보자, 그의 말처럼 헤라가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땅바닥을 기고 있었어요.

시험이라… 단순히 재능만 시험하려는 게 아니네요, 이건. 저를 속였다고는 하나 어렸을 적부터 저와 함께 해 왔던 저의 하나뿐인 친구를… 제 손으로 직접 죽일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거죠?

“아하하… 당연하죠.”

그런데 괜한 걱정이에요. 제가 망설일 거 같나요? 저를 마신의 노예로 만들려고 했던 헤라인데… 제가 주저할 리 없잖아요.

“보여드릴게요. 당신이 바라는 것을.”

저는 ‘이름 없는 복수자’가 보여 주었던 마나의 흐름을 떠올리면서, 주변의 마나를 제 것으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처음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전했던 마법을 회상하면서 자그맣게 읊조렸어요.

“파이어 볼.”

***

“하아… 지쳤어요.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숙녀한테 모든 일을 떠넘기시다니! 신사답지 못하잖아요!”

[투정 부리지 마라. 사건을 뒤처리하는 능력도 길러야 한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거 아니었나?]

“그건 그렇긴 한데… 우으, 이것저것 조사받는다고 밥도 굶었다고요!”

[그래도 기대보다 잘해 주었다. 역시 내가 고른 계약자더군.]

“하읏… 저, 정말요?”

[정말이다.]

“흐응… 그렇구나, 헤, 헤헤… 역시 저인 거네요.”

[그래, 역시 그레이스 너다.]

“헤헤헤…”

이걸로 확신했어요. ‘이름 없는 복수자’는 아니, ‘이름 없는 복수자’님은 정말로 좋은 성좌예요. 이렇게 따스하게 저를 쓰다듬어 주시는 것 좀 보세요! 아, 물론 성좌라서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느낄 수는 있잖아요!

하아… 포근해.

‘이름 없는 복수자’님과 계약할 수 있었던 저는 행운아인 걸지도 몰라요.

“꺄앗… 으응?! 자, 잠깐만요! 손이 이상한 곳에 닿았어요!”

[이상한 곳이 아니라 젖가슴이다.]

“네에에에?! 꺄아아아아아! 서, 성추행범이야!”

……가 아니었어요!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건가요?! ‘이름 없는 복수자’님이 제멋대로 제 소중한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어요! 아아, 결국 이렇게 배신을 당하는 건가요! 절망에 빠진 저는 ‘이름 없는 복수자’님께 안겨 달콤한 소리를…

으응? 달콤한 소리?

어라… 뭔가 이상하네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죠? 분명 성추행을 당하고 있는데… 몸과 마음이 푸근해져서, 자꾸 웃음이 나오고… 헤에, 헤헤… 에헤헤…

[성추행이 아니라 특별 마사지다. 내가 무리하게 강신하는 바람에 몸의 균형이 망가져 있더군. 이대로는 크게 다칠 수도 있어서 내가 직접 마사지를 해주는 거다.]

“흐읏, 거, 거짓말이죠!”

[하아… 그만둘까?]

“……네에?”

[너를 위해서 내가 서비스를 해 주는 거지, 에프터 케어는 내 의무가 아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멈춰 주마.]

“엣? 진짜? 정말요?”

[정말이다. 그럼 마사지는 여기까지 하고…]

“자, 잠깐만요! 정말 믿어도 되는 거죠?!”

[그레이스… 이런 건 교육을 잘 받았다고 해야 하나? 확실히 아름다운 네 외모만 보고 접근하는 쓰레기들이 많을 테니, 언제 어디서나 의심을 하는 건 좋은 태도다.]

“헤헤… 제가 좀 예쁘긴 하죠?”

[하지만 나는 너와 계약한 성좌다. 성좌와 계약자 사이에선 거짓말이 불가능하지. 물론 막대한 벌금을 낸다면 거짓말이 가능하긴 하다만… 너는 내가 벌금을 내면서까지 변태짓을 할 성좌로 보이나?]

“아니요! 그으… 죄송해요. 성좌님을 믿었어야 했는데…”

어쩐지, 뭔가 이상했어요. 성추행 치고는 굉장히 정성스럽게 만져 주시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딱히 불쾌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져서… 저는 제가 음란해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다 저를 위한 마사지여서 그랬던 거군요!

“에헤헤… 그러면 계속해 주시겠어요? 다시는 의심 안 할게요!”

[후우… 알겠다.]

반성한 저는 안심하고 ‘이름 없는 복수자’님께 제 몸을 맡겼어요.

“으읏… 하아, 으응… 거긴, 하아앙!”

“하아… 그렇게, 하앙! 거칠게… 어째서 기분이… 흐으응!”

그런데… 갈수록 특별 마사지의 수위가 세지더니, 어느샌가 ‘이름 없는 복수자’님께서 제 보지를 만지기 시작하셨어요. 씻을 때 말고는 저도 만져본 적 없었던 제 보지를 말이에요…

이거, 하읏… 굉장히 부끄럽지만… 아앙, 그래도 믿어야하는 거겠죠?

“하아아아앙!”

그래야 하는데…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그만 가 버리고 말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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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보야! 하앗, 으응! 하아… 이 쓰레기! 하아… 아아앙! 빨리 돌아와서, 하아… 박아달란 말이야아아아!”

발끈해서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이름 없는 복수자’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한테 푹 빠져서 나만 바라보는 멍청이잖아. ‘이름 없는 복수자’는 내가 다치는 게 정말 싫었을 거다. 그래서 복수를 포기하라는 말도 한 거고 말이다.

하지만… 그 마음은 고맙지만… 그렇다고 복수를 포기할 순 없었다. 가족과 친구들의 원수란 말야. 아직도 그때의 그 끔찍한 순간들이 떠오르는데… 나 하나 좋자고 그들의 복수를 포기할 순 없었다.

“하아… 으읏, 흐응… 손가락으론 부족해애… 하아, 아앙… 바보, 바보, 바보야아!”

“사과할 테니깐, 빨리 돌아 오라고오! 하아… 으응…”

그러니… ‘이름 없는 복수자’가 돌아온다면 차근히 그를 설득할 생각이다. 최대한 안 다치게 조심한다고 하면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을까? 걱정이 많은 ‘이름 없는 복수자’지만 내가 매일 펠라치오를 해 준다고 약속하면…

“아아, 답답해서 미칠 거 같아! 자위로는 만족이 안 된단 말야아!”

“어차피 너도 혼자 딸이나 치고 있을 거 아냐!”

“됐으니까 빨리 돌아와서 박아 달라고오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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