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화 〉 성좌 계약은 신중히(7)
* * *
진정하자… 진정해.
숨을 크게 들이쉰 나는 천천히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봤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아니, 그렇지 않아.
나는 그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오해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름 없는 복수자’의 자지를 입으로 물려고 했던 건 어디까지나 수련의 과정이었다. 절대 내가 변태라서 그런 짓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물론 진심으로 펠라치오를 할 생각이었고, 자지의 맛이 어떨지 순간적으로 궁금해 하기는 했었지만… 맹세컨대 그건 내 본심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메소드 연기… 그래, 메소드 연기. 방금 일은 연기에 너무 집중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일어난 하나의 사고였다. 내가 저질도 아니고 그런 일을 하려고 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 단언컨대, 방금 그건 사고…
[그대여, 침이 흐르고 있다.]
“아아아아아아악!”
씨발, 눈치 좀 챙겨. 네 자지 빨려다가 이렇게 된 거잖아!
기껏 진정시킨 내 마음을 다시 날뛰게 만드는 ‘이름 없는 복수자’의 지적에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뭐? 침이 흐르고 있다고? 그거야 당연하지. 마른 입으로 자지를 빨 수는 없잖아. 그것도 모르고 내게 말을 거는 ‘이름 없는 복수자’의 머리통을 한 대 세게 때려 주고 싶었다.
“야이, 새끼야! 해도 해도 너무 하잖아! 진짜로 치한당하는 줄 알고 쫄았었단 말야!”
[미, 미안하다. 진지하게 해야 효과가 좋을 거 같아서…]
“내가 중간에 멈추라고 계속 말했잖아!”
[나는 당연히 그대가 연기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 착각이었군. 그대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 한 나의 잘못이다. …정말 미안하다.]
“씨발,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할 말이 없어지잖아, 이 쓰레기야!”
하아, 저 씨발 성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축 처진 목소리로 내게 사과하는 걸 듣고 있자, 온몸에 힘이 다 빠졌다. 어쩜 저렇게 짜증날 수가 있지? 나도 수치심을 아는 사람인데… 제발 부탁이니, 배려를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지금 같은 경우도 내가 선을 넘으려고 했던 것 정도는 알 테니, 그냥 모르는 척 해 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데 끝까지 침 얘기를 꺼내…
아니, 잠깐… 설마 그것도 모르는 건가?
[내가 부족한 게 너무 많군. 계약자의 도움을 받아서 미연시라는 걸 클리어하고 와야할 거 같다. 하루 정도면 충분할 테니 내일은 자습 시간을 가지도록.]
“머, 멈춰!”
배려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였어?
아니, 애초에 배려가 필요한 건지도 모르는 거였어?
이제야 ‘이름 없는 복수자’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그러고 보면 쟤 동정이었지. 복수밖에 모르는 놈이니, 계속해서 어이없는 모습만 보여 주는 게 당연했다. 여자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을 거 아냐.
보지가 만져지는 게 얼마나 민망한 일인지, 자지를 빨려고 했던 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감각이 없으니 내가 왜 화를 내는 지도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미연시는 절대 안 돼!”
하지만 그렇다고 미연시를 하게 놔둘 순 없지. 갑자기 오타쿠가 돼서 이상한 걸 시킬 수도 있잖아. 그러니 이렇게 된 거 내가 하나하나 알려 줘야 할 거 같은데… 하아, 귀찮은 일이 생겨 버렸다.
[크흠… 아무래도 미연시라는 게 금단의 기술 같은 건가 보군.]
“그래, 미연시는 절대 금지야.”
[하지만 이대로 수련을 이어갈 수는 없다. 분명 또 그대와 트러블이 생길 거다.]
“그래서 말인데…”
[그래서 말인데… 음? 하하, 말이 겹쳤군. 그대가 먼저 말을 하도록]
“아, 아니야. 할 말 있으면 네가 먼저 해.”
[좋다. 먼저 하지. 혹시 그대의 친구에게 도움을 구할 수는 없는가?]
***
“내… 친구?”
[그렇다. 그대에게는 박시우라는 친구가 있지 않은가. 그 친구라면 흔쾌히 도움을 줄 거 같은데 말이지.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우한테… 여, 여성 호르몬 자극을 부탁하라고?!”
[여성 호르몬이라는 게 성적으로 흥분할 때도 생기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도 생기는 거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봤을 때, 그대는 박시우라는 친구를 사랑하고 있는 거 같단 말이지. 그러니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분명 지금보다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거다.]
“저, 절대로 안 돼! 미쳤어? 이거 완전 싸이코 아냐!”
미친 성좌 새끼. 태연한 목소리로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당황한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이름 없는 복수자’에게 소리쳤다. 안그래도 할 때마다 부끄러워서 죽을 거 같은데, 그걸 시우한테 부탁하라고? 내가 미쳤냐? 시우가 내 몸을 만진다고 상상하니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물론 시우를 좋아하고는 있지만…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단 말야.
언젠가 경험하게 될 일이었지만 지금은 너무 일렀다. 그런 건 먼저 사귀고 나서, 아니, 결혼을 약속하고 나서나 할 일이라고… 으으으, 충격을 받은 나는 연신 고개를 저으면서 ‘이름 없는 복수자’의 제안을 거절했다. 시우한테 몸을 맡기는 것 보단 차라리 지금처럼 ‘이름 없는 복수자’한테 맡기는 게 훨씬 더…
응? 잠깐…
……‘이름 없는 복수자’ 쪽이 더 좋을 거라고?
[또 내가 실수를 했나 보군… 후우, 그대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군.]
“…불쌍한 척 하지 말지? 애초에 실수를 안 하면 되잖아!”
[하하. 그 말이 옳다. 앞으로 더 조심하도록 하겠다.]
“…흥,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 줘. 어떻게 된 게 매일같이 혼날 수가 있어?”
[미안하다… 그런데 그대가 말하려고 했던 건 뭐지?]
“아, 그건…”
‘이름 없는 복수자’에게 여자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이름 없는 복수자’가 세심함을 갖도록 만드는 것. 그게 내 원래 계획이었지만…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무시해.”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 보니 차라리 여자에 대해서 무지한 게 더 낫겠더라고.
시우한테 강한 거부감을 느낀 건 내 몸을 만지고 흥분할 시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름 없는 복수자’는 아무 감정도 없이 그냥 의무적으로 만지잖아. 그러니 만져지는 입장에선 ‘이름 없는 복수자’ 쪽이 더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어.”
그래서 나는 ‘이름 없는 복수자’를 이 상태 그대로 놔두기로 결심했다.
괜히 알려 줬다가 둘 사이가 어색해지면 어떡해. 그냥 지금처럼 무지한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게 훨씬 더 나았다. 그래야 내 컬렉션도 마음놓고 공개할 수 있을 거 아냐. 쓸데없이 오해 받아서 야동이나 모으는 변태 소리를 들을 바에야 조금 답답한 게 마음 편했다.
[알겠다. 그러면 아까 멈췄던 수련을 이어가도록 하지.]
“뭐어?! 자, 잠깐만! 설마 지금 네 자지를 빨라는 뜻이야?!”
[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이제 소환단을 먹고 마나를 순환시킬 차례다.]
“아……… 아아아아아아악!”
[그대여?]
“씨발, 너 일부러 그랬지? 네가 유도한 거잖아아아!!”
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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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델 라피가, 세계를 지배하는 5대 가문 중 하나인 라피가 가문의 막내딸, 그녀는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가문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귀여운 외모와 훌륭한 재능. 그녀는 라피가 가문의 공주였고, 그녀를 만나는 사람들은 웃음꽃을 피우며 그녀의 인생을 축복했다.
‘부탁이에요… 제발 그런 눈으로 저를 바라보지 마세요!’
하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의 삶을 저주했다.
비상한 두뇌로 서른도 되기 전에 ‘델 라피가’의 부회장 자리에 오른 그녀의 첫째 오빠, 눈부신 재능으로 아카데미 졸업과 동시에 SS급 영웅이 된 그녀의 둘째 오빠, 바로 그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저도…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이미 뛰어난 인재를 둘이나 갖춘 라피나 가문. 그들이 그녀에게 바라는 건 그저 예쁘게 자라는 것뿐이었다. 최고가 되지 못 하는 그녀의 어중간한 재능 따윈 그들에게 있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도… 아버지의 딸이잖아요!’
그렇기에 가문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녀에게 기대라는 걸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독이 되어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녀는 라피가 가문의 영애로서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그것을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뭘 갖고 싶니? 말만 하렴. 뭐든지 사주마.’
‘제발… 저에게도 믿음을 주세요. 저도 오라버니들처럼 할 수 있어요! 저도 라피가 가문의 사람이잖아요. 제발 저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굳이 네가 험한 길을 갈 필욘 없단다. 네가 무엇을 하든 넌 라피가 가문의 공주야.’
‘그런 허울뿐인 공주가 되고 싶진 않아요!’
‘그레이스, 내 딸아. 대체 왜 그러니? 네 인생에 도대체 뭐가 부족하다고 그러는 거니? 나는 도통 네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단다.’
‘저도… 오라버니들처럼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라피가 가문의 영애가 아니라, 그레이스라는 사람 그 자체로서요!’
‘그레이스… 너는 후회할 수밖에 없단다. 네 재능엔 한계가 있어. 물론 영웅이 되어 남들의 부러움을 살 수는 있겠지. 하지만 네 오빠들처럼 정점을 노리기에는 네 재능이 너무나도 부족하단다. 그런데도 너는 도전하고 싶단 말이니?’
‘그건 모르는 거잖아요! 하기도 전에… 패배를 인정할 순 없단 말이에요!’
‘후우… 알겠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아카데미 입학을 허락한 것이다. 졸업하기 전까지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릴 것, 그것이 바로 허락의 조건이었다.
“흑, 흐으윽… 이럴 리가 없어… 흐윽, 윽… 이래서는 가문으로 못 돌아간단 말야!”
“아가씨, 눈물 그치세요. 지금 되게 보기 흉합니다.”
그러나 입학과 동시에 그녀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당연히 7대 성좌와 계약하게 될 거라던 기대와 달리 그 어떤 성좌와도 계약하지 못 한 것이다.
“그치마안… 흑, 무계약자라니… 라피가 가문의 수치잖아!”
“걱정 마세요. 저도 무계약자입니다.”
“그치만 샤론, 너는 네가 계약을 파기한 거잖아! 흐윽, 흐으윽… 나한텐 아무도 안 찾아왔단 말야아아! 으아아아앙!”
진심으로 서러워하며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그레이스 델 라피가.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녀의 시녀, 샤론이 눈물을 흘리는 그레이스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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