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 네토리-273화 (272/428)

〈 273화 〉 성좌 계약은 신중히(4)

* * *

시원하면서 따뜻하다. 이게 말이 되는 걸까? 부드러우면서 딱딱하고 온화하면서도 험악한 기운이, 목젖을 타고 흘러내려와 아랫배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상쾌한 마나가 온몸에 퍼져 나간다.

이게… ‘소환단’의 효과일까?

기분 좋은 마나의 흐름 덕에 불쾌했던 기분이 단번에 사라졌다.

[뭐하고 있지? 어서 가부좌를 틀어라.]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름 없는 복수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내 마음이 한없이 불편해졌다. 자기 멋대로 내 몸을 희롱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내게 도움을 주겠다고?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성좌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불만이 나왔다.

“꺼져… 계약 파기야.”

[으음?]

“병 주고 약 준다고 내가 넘어갈 거 같아? 네가 내 허락도 없이 내 몸을 만졌잖아. 그거 규칙 위반이야. 상식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고.”

[하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정말로 그게 규칙 위반이었다면 너와의 계약은 그 즉시 파기되었을 거다. 하지만 우리 계약은 아직도 멀쩡한 상태지.]

“…뭐라고? 그, 그럴 리가.”

[뭐, 됐고. 그 이야긴 나중에 하지. 지금은 영약 소화가 급선무다. 설마 기껏 얻은 영약을 이대로 날릴 생각은 아니겠지? 어서 가부좌를 틀어라.]

“……흥.”

짜증이 났지만 ‘이름 없는 복수자’의 말이 맞았다. 계약 파기를 하더라도 지금은 영약을 소화하는 게 우선이었다. 합리적인 판단으로 내 감정을 추스른 나는 ‘이름 없는 복수자’의 말대로 가부좌를 틀었다.

[천천히 숨을 쉬면서 마나의 흐름을 받아들여라.]

그러자 ‘이름 없는 복수자’가 내 등에 두 손을 올리더니, 내 몸 속에 흐르는 마나의 움직임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이건…”

[소리내지 마라. 흐름에 집중해라.]

“……”

[눈을 감고 호흡하면서 네 몸 안을 관조해라. 그리고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해라. 올바른 마나의 흐름이 무엇인지, 그 흐름의 끝에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

[그러다 보면 지금 네가 가진 문제점과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자연스레 알 수 있을 거다. 너 정도의 재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그러니 지금은 마나의 흐름에 집중해라.]

…놀라워. 성좌는 성좌구나.

본능적으로 사용하던 마나 회로와는 구조부터가 다른 마나의 움직임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렇게 깨끗하고 정순하게 마나를 운용할 수도 있는 거였구나.

아랫배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온몸을 훑은 다음 제자리로 돌아오자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짜릿한 쾌감이 느껴졌다. 마치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가 깔끔하게 풀린 기분이었다. 나는 이것도 모르고 마나를 사용하고 있었구나.

과거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앞으로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거 같은 전능감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이대로 마나를 운용할 수 있다면 나의 복수도…

“아앙!”

[흐름에 집중하라고 했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라고는 안했을 텐데?]

“변태 새끼… 너, 또 내 가슴을…”

[됐으니 검을 들어라.]

“말 돌리지 마!”

[아니, 여기는 너무 비좁군. 수련장으로 가라. 급격하게 강해졌으니 지금의 부조화를 해결할 필요성이 있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의 감각이 달라져 있을 거다.]

“…가긴 갈 건데, 너… 사과라도 해야하는 거 아냐? 왜 자꾸 남의 몸을, 흐읏!”

[아니, 오히려 네가 내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유혹의 악마라도 만난다면 순식간에 무너지겠군. 성적 감각에 대한 내성이 없어도 너무 없어. 아무리 복수에 미쳐 살았다 해도 네 정도 외모라면 주변에 남자가 없지는 않았을 텐데?]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실언이다. 그만큼 네가 복수를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거겠지. 미안하다. 이건 내 잘못이군. 네 복수를 너무 가볍게 봤어.]

“그걸 사과하라는 게 아니잖아…”

[하지만 나 역시 가볍게 말하는 게 아니다. 유능제강이라는 말 아는가?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소리지. 지금의 그대는 너무 딱딱하다. 몸뿐만이 아니야, 머릿속도 그리고 마나 회로도 모든 것이 너무 경직된 상태다. 그러니 네게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나는 멈추지 않을 거다. 그것이 복수를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야, 말은 그렇게 해도 너 아까 되게 경박하게 말하지 않았어? 그냥 네가 만지고 싶어서 만진 거잖아!”

[그것 역시 내 실수다. 사과하지. 분명 여자들이 좋아하는 말이라고 들었는데 오해인 거 같더군. 그걸 가르쳐 준 놈에겐 마땅한 벌을 내렸다. 그놈은 앞으로 한 달 동안 성적 기능이 불가하니, 용서해 주길 바란다.]

“…그, 그래?”

저 말이 사실일까? 아니, 사실이겠지. 성좌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잖아. 거짓말을 할 경우 막대한 벌금을 내야 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오해를 했다는 말도 분명 사실일 거다. 그리고 굉장히 불쾌하지만… 하아, 저 무식한 성좌가 나를 위해 나를 만졌다는 것 역시 사실일 거다.

그러니 정말로 역겹지만… 후우, 이해해 줘야겠지. 극한으로 인내심을 발휘한 나는 ‘이름 없는 복수자’를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하다못해 앞으로는… 마, 말하고 만져. 그 정도는 가능하잖아.”

[알겠다. 그럼 지금 네 젖꼭지를 만지겠다.]

“햐읏, 야, 야아! 아니, 수련장으로 가라며!”

[장난이었다.]

“씨발, 장난으로 남의 젖꼭지를 만지는 성좌가 어딨어!”

용서해 준다는 말은 취소다.

***

­부웅, 붕

몸과 검이 따로 노는 듯한 느낌. 정말로… 어색하다. 처음으로 검을 쥐었을 때 같아. 어린 나이에 들기에는 굉장히 커다랬던 검. 아버지의 검을 들고 빌런을 베어 넘겼을 때처럼 끔찍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엔 검이 내 몸을 따라오지 못 하고 있다는 거다.

­부웅, 부웅

이 검이 이렇게나 가벼웠나? 마치 장난감을 휘두르는 듯한 기분이다. 그 탓에 자세가 비틀어지며 검로가 끝도 없이 흔들렸다. 이래서야 완전 초보자가 된 거 같잖아. 호흡을 가다듬고 눈을 똑바로 떠도 도통 나아지지가 않았다.

“와… 장난 아니다. 저 정도는 돼야 특별 입학하나 봐.”

“그러게… 씁, 비교되네. 야, 딴 데 가자.”

“푸흡, 저걸 보고 감탄한다고? 하여튼 모자란 것들은 눈도 모자라네.”

“완전 허접이었잖아. 흥, 괜히 쫄았었네.”

시끄러워, 너희들한테 보여 주려고 이러는 거 아니거든?

나는 주변의 소음을 무시한 채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한두 시간 수련해서는 몸과 검의 간극을 해결하기 어려워 보였다.

“후우…”

하지만 뭐 어때. 그러면 수련 시간을 늘리면 된다. 두 시간으로 안 되면 네 시간. 그걸로도 모자라면 여덟 시간. 휘두르다 보면 언제가 답을 알게 된다. 항상 그래 왔거든. 남의 험담에 휘둘릴 이유는 없었다.

“흐읏?!”

[완전 허접이라는 말이 딱 그대로다. 도대체 스승한테 뭘 배운 거지? 아니, 애초에 가르침을 받기는 한 건가? 마나는 무시한 채 제멋대로 검만 휘두르고 있군.]

그래, 휘둘릴 이유는 없는데…

‘이름 없는 복수자’가 또 다시 내 몸을 희롱하더니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몸에 힘을 빼라. 그리고 내게 몸을 맡겨라. 검을 알려 주겠다.]

“후으읏…”

[마나의 흐름을 관조해라. 흐름에 맞춰 팔을 뻗어라. 흐름에 맞춰 손목을 휘둘러라. 분명 아까 네게 가르쳐 줬을 텐데? 그 흐름에 검이 추가 되었을 뿐이다. 네 재능이라면 어렵지 않을 터.]

­슈우우욱

그러고는 멋대로 내 몸을 조종하여 검을 휘둘렀다.

“아…”

[알겠나? 두 번은 없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자, 이제 네 차례다.]

그걸 따라하라고?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베기’. 손끝을 타고 흘러오는 경쾌한 감각. 마치 검이 하나가 된 것 같은 자연스러운 움직임. 그렇기에 느낄 수 있는 아찔한 쾌감. …그걸 내가 지금 할 수 있을까?

[무엇을 망설이지? 벌써부터 복수를 포기할 생각인가?]

아니, 나는 못 해.

복수를 포기하지 못 한다고.

­슈웅

­슈우웅

­슈우우욱

번뇌를 극복한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를 수 있었고 세 번째 시도만에 ‘이름 없는 복수자’의 ‘베기’를 따라할 수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베기’였다.

“……쳇, 기만이었냐? 완전 가지고 논 거네.”

“하아, 욕 나오네. 괜히 봤어. 앞으로 계속 생각날 거야.”

흥, 이것도 너희들한테 보여 주려고 한 거 아니거든?

그래도… 기분은 좋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성취감. 성장을 가로막던 벽을 부수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간 나는, 기분 좋게 기지개를 폈다.

그래도 꼴에 성좌라고 도움이 되기는 하구나. 규칙 위반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지만, 그래도 ‘이름 없는 복수자’와 계약을 맺은 게 그렇게 실수 같지는 않다. 적어도 ‘복수’에는 진심이잖아. 말이 안 통하는 성좌는 아닌 거 같으니까 앞으로를 기대해 봐도 좋을 거 같다.

[네 가슴을 주무르겠다.]

“잠깐, 읏!”

[마무리 운동 없이 수련을 끝내면 몸이 경직될 수밖에 없다. 기초적인 습관부터 고쳐 나가야겠군. 그리고 오늘의 성장으로 만족할 생각은 하지 마라. 앞으로 매일 오늘과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

“이대로 끝낼 생각 아니었, 잠깐만… 거긴!”

[역시 고관절이 딱딱해져 있군. 설마 스트레칭을 경시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맞긴 한데, 하읏!”

[그대는 특히 젖꼭지가 만져지는 걸 굉장히 불쾌해 하더군. 앞으로 그대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나 내 수련을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 그대의 젖꼭지를 꼬집는 걸로 그대를 체벌하겠네.]

“씨발, 체벌로 남의 젖꼭지를 꼬집는 성좌가 어딨어!”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다는 말은 취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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