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화 〉 성좌 계약은 신중히(2)
* * *
성좌가 보는 건 오로지 개인의 능력과 재능뿐. 계약 대상의 과거나 소망, 그리고 희망 따윈 고려하지 않는다, 라는 게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이건 대체 뭐지? 내 개인사를 알고 있다고?
[그대와 헤어진 동생을 납치한 후 실험 끝에 폐기 처리한 조직을 알고 싶은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기억, 반쪽짜리 복수만으로 만족해야 했던 내 과거를 ‘이름 없는 복수자’라는 성좌가 언급했다. 한광 그룹의 막내 아들을 조사해 봐라, 라고 미처 내가 알지 못했던 정보까지 말해 주면서 말이다.
이걸… 믿어야 하는 걸까?
아니, 애초에…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성좌들이 바라는 건 자신들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계약자만을 신경쓰지, 지구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름 없는 복수자’는 지구에 대해서, 그것도 나에 대해서 아는 게 많아 보였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아니, 그 전에… 이 정보가 과연 사실일까?
한참을 고민한 난 결국 ‘이름 없는 복수자’의 메시지에 손을 올렸다. 대화를 나눠 보면 어떻게든 감이 오겠지. 우선 그가 알려 준 정보가 진짜인지를 파악해야 했다.
[‘이름 없는 복수자’의 메시지를 선택하셨습니다.]
[‘이름 없는 복수자’와의 협상이 시작됩니다.]
***
“여, 여긴…”
눈앞이 암전되었다가 다시 밝아지자, 무너진 건물들로 폐허가 된 장소가 나타났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나의 고향이 말이다. 천안… 이제는 재건된 도시의 과거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반갑다. ‘이름 없는 복수자’라고 한다.]
내가 ‘그날’의 일을 회상하며 침울해하고 있자, ‘이름 없는 복수자’가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연화’의 신입생, 신시아예요.”
[좋은 이름이군. 그럼 협상을 시작해 볼까?]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얼마든지.]
“당신 정말… 성좌 맞나요? ‘그날’의 천안을 도대체 어떻게 재현한 거죠? 제 동생에 관한 건 어떻게 알았고요.”
[한 가지가 아닌데? 하지만 좋아. 제약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모든 걸 대답해 주지. 먼저 성좌가 맞냐고? 그래, 성좌가 맞다. 눈앞의 메시지를 보고도 나를 다른 존재로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확실히 그렇네요. 우문이었어요.”
[그 다음으로 이 장소를 어떻게 재현했냐고? 간단하다. 그건… 음, 이건 말할 수 없는 건가. 아니지, 그래. 내 기억에 있는 장소라 재현할 수 있었다. 내게도 그리고 네게도 의미가 있는 곳이라 재현했지.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나? 그리고 네 동생에 관한 건 내가… 쳇, 이것 역시 제약에 걸리는 건가. 미안하군.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은 침묵으로 대신하겠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마라. 네 복수가 한광 그룹의 막내 아들과 관련이 되어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답, 감사합니다.”
대답을 들었지만 오히려 그 덕에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이름 없는 복수자’에게 의미가 있는 곳이라고? 계약자가 아닌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는 성좌라니, 이런 경우도 있는 걸까? ‘이름 없는 복수자’에 관한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 이상으로 그의 마지막 말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정말로 한광 그룹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성좌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어떻게 그 정보를 알고 있는 거죠?”
[반대로 내가 왜 그 정보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나는 성좌다.]
“아, 그렇네요…”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한광 그룹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는 계약자가 있는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한광 그룹에서 일하고 있는 계약자가 있는 걸지도 몰랐다. 뭐가 되었든 나한테는 좋은 상황. 복수할 대상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남은 건 쓰레기들에게 지호의 복수를 해주는 거다.
“……그런데 그걸 왜 제게 알려 주시는 거죠?”
[그대와 계약하기 위해서다.]
“제가 이 정보만 듣고 다른 성좌랑 계약할 수도 있잖아요.”
[다른 성좌? 네 복수에는 관심도 없는 성좌 말인가? 그들이 원하는 건 너를 검의 화신으로 만드는 것. 그 과정에서 네 복수가 방해된다면,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네 소망을 배반하겠지. 그래도 좋다는 건가?]
“당신은… 다르다는 건가요?”
[내가 원하는 것은 복수. 오로지 복수뿐이다.]
“당신이 원하는 복수와 제가 원하는 복수는 다를 텐데요.”
[아니. 본질적으로 같다. 그렇기에 너를 선택했다. 너라면 나의 복수를, 그리고 너의 복수를 해낼 수 있을 거다. 네겐 그럴 만한 능력과 재능이 있다.]
과연, 그래서 이름 없는 ‘복수자’인 건가. 성좌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저 말은 사실이겠지. 복수를 원하는 성좌라… 어째서인지 호감이 간다. 하지만 호감만으로 성좌 계약을 할 수는 없다.
내게 필요한 건 복수를 위한 힘.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성좌가 내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당신은 제게 뭘 줄 수 있죠?”
그 의문을 담아 ‘이름 없는 복수자’와 협상을 시작하자
두웅, 두웅, 두웅
[어스름 불꽃]
[아티팩트, 소유자의 마나 회복 속도를 300% 향상시킨다.]
[검혼의 목걸이]
[아티팩트, 장착 후 검술 수련 시 숙련도가 200% 증가한다.]
[영구 귀환석]
[아티팩트, 하루에 한 번 지정한 장소로 귀환할 수 있다.]
그가 내게 시작부터 3개의 아티팩트를 내밀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대의 복수를 돕겠다. 이건 그 시작에 불과하다. 그대에게 필요한 게 있다면 절대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제, 제게 바라는 거는요?”
[그대가 복수를 포기하지 않는 것.]
“뭐라고요?”
[나와 계약하겠는가?]
그건… 너무 쉽잖아. 도와주지 않아도 복수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 그 대가로 내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성좌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 또한 분명 사실이라는 소리…
“네. 계약하겠어요.”
그렇기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름 없는 복수자’와 성좌 계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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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히로인을 네토리하세요.]
[팁: 반박귀진 스킬을 사용해 성좌명을 바꾸세요. 그렇지 않으면 히로인들과는 계약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아주 커다란 원룸. 이런 걸 미니멀리즘이라고 하나? 최소한의 가구만이 존재하는 방의 한 쪽 벽면에, 수십 개의 모니터가 달려 있다. 아니, 모니터가 아니라 스크린이라고 해야 하나? 가히 SF적인 모습에 내가 감탄하고 있자, ‘히로인 네토리’가 내게 팁을 전해 주었다.
반박귀진을 사용하라고?
그 말에 의문을 가진 내가 상태창을 열어 보니, 어이없게도 내 성좌명이 ‘유흥과 쾌락의 중독자’로 되어 있었다. 딱히 중독은 안 됐는데 말이다.
“쓰읍, 이거 봐꿔야겠네.”
유흥과 쾌락의 중독자라니, 히로인들이 경계하기 딱 좋은 성좌명 아닌가. 성좌명을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낀 나는, 적절한 성좌명을 찾기 위해 1000만 포인트짜리 ‘히로인 사용 설명서’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히로인 사용 설명서: 각 히로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 그리고 공략 포인트가 담겨 있습니다.]
“으음… 참 불쌍한 캐릭터네.”
그렇게 파악한 메인 히로인, 신시아의 스토리는 정말 안타까웠다. 마신에게 부모를 잃고 동생마저 빌런들에게 납치당하거든. 그 탓에 가슴 속에 복수를 품고 사는 캐릭터인데, 가여워서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얘가 ‘연화’라는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고 거기서 성좌와 계약하는 게 프롤로그인 건가? 그렇다면 당연히 그 기회를 놓칠 순 없지. 그녀와 계약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반박귀진 스킬을 사용해 성좌명을 ‘이름 없는 복수자’로 수정했다.
“으음?”
그런데… 나한테 그 기회가 오기는 하나? 설명서에 따르면 아카데미 강당에서 성좌와 계약한다는데, 모니터는 다 꺼져 있고, 아무런 연락도…
띠링
[‘연화’ 커뮤니티에 초대되었습니다.]
[공지: 곧 있으면 ‘연화’에서 예비 계약자들과의 교류식이 열릴 예정입니다.]
[공지: 훌륭한 인재들이 대기중이니 많은 참석 바랍니다.]
아, 왔다.
이런 식으로 볼 수 있구나.
갑작스러운 알림과 함께 모든 스크린이 켜지더니 ‘연화’의 강당으로 보이는 장소가 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운데에 있는 가장 큰 스크린에는 성좌들끼리 대화할 수 있는 채팅창이 생기더니, 많은 성좌들이 나타나 자기들끼리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성좌라기엔 조금 격이 떨어져 보이는 시스템 같았지만, 뭐, 이게 이번 세계관에서의 성좌의 모습인 거겠지. 나는 스크린 조작법을 익히면서 메인 히로인, 신시아의 모습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얼마 후 딱 봐도 메인 히로인스럽게 생긴 쿨뷰티 미소녀를 찾아냈다.
검은색 단발에, 당장에라도 검을 휘두를 것처럼 차가워 보이는 인상,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예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미모. 저게 신시아구나.
이윽고 모든 스크린의 화면을 신시아로 고정한 나는, 교류식이 시작되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복수를 품고 사는 캐릭터니까 절대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 하겠지?
‘그대의 복수를 도와주겠다. 그 대가로 절대로 복수를 포기하지 마라.’
대충 이런 식으로 언질한다면 나와 계약할 게 분명하다.
“크크크…”
하지만, 사실 복수라는 게 굉장히 추상적인 거거든.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는 말도 있잖아. 그러니 내게 함락되어 행복한 섹스 라이프를 즐기는 것도, 세상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리려는 빌런들에 대한 복수가 되지 않을까?
“크크크크크.”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꼬우면 성좌 계약을 신중히 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내게 협상 요청을 보낸 신시아를 내 심상 공간으로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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