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화 〉 태극음양지체(47)
* * *
“…네, 괜찮아요. 남궁 소저를 위한 일이잖아요. 후후.”
의외로 위지혜는 단번에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하루 동안 연인을 빼앗기는 건데도 말이다. 서로의 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걸까? 신기하면서도 부러운 요상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그런데 남궁 소저, 당신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네? 으음…”
이건 내가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역으로 질문을 당하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그러게 말야, 사랑은 대체 뭘까. 나는 오라버니 옆에 붙어서 재잘거리던 당소연과 제갈연화를 떠올리며 어림짐작으로 대답했다.
“상대방의… 관심을 얻고 싶은 마음?”
두 사람 다 어떻게든 오라버니와 대화하려고 애를 썼었지. 그러니, 이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관심을 얻으면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잖아.
“어머,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네요.”
“그래요?”
하지만 역시나 내 대답은 오답이었다. 그 둘은 사랑을 하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아니면 내가 너무 간단하게 생각한 걸까? 의문을 담고 위지혜를 쳐다보자, 그녀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내게 화답했다.
“단순히 관심을 얻고 싶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해요. 사랑은… 뭐랄까, 조금 더 이기적이거든요.”
“이기적이라고요?”
“상대방 역시 나의 관심을 얻고 싶어했으면 좋겠다, 이런 이기심을 말하는 거예요. 저로 예를 들면, 제가 백랑을 원하듯이 백랑도 저를 원했으면 좋겠다, 이런 거죠.”
“으으음…”
“서로의 관심이 일치가 됐을 때, 서로가 서로를 원하게 됐을 때, 그 사실이 너무 행복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그런 게 바로 사랑이 아닐까, 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렇군요…”
서로가 서로를 원하게 됐을 때가 사랑이라…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사랑은 어렵구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감이 떨어졌다.
“한 번 발상을 전환해 보세요. 요구받는 것에 기쁨을 느낀 적이 있나요? 요구받기를 원한 적이 있나요? 거기서부터 차근차근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 보세요. 후후. 그러면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은 감이 올 거예요.”
그런데… 이어지는 위지혜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항상 요구하기만 했었잖아.
보다 강한 상대
진심을 다해 맞서싸울 수 있는 상대
그럼에도 끝까지 나와 겨루어 줄 상대
그렇게 일방적으로 원하기만 했으니, 사랑을 모르는 거 아닐까? 그래서 외로움만 느꼈던 거 아닐까? 나는 한 번도 요구받은 적…
…이 없지는 않구나.
‘빈아, 내 곁에 붙어 있으렴. 저런 놈들은 상대해 주는 게 문제란다.’
‘빈아, 다른 생각하지 마. 내가 다 해결해 줄게.’
‘빈아, 나와 함께 가자꾸나. 방해꾼이 있긴 하지만 재밌는 여행이 될 거다.’
오라버니가 나를 요구했었지.
하지만 별로 유쾌한 기억은 아니다. 나보다 약한 주제에, 비무에서 도망친 주제에, 허세를 부린 거잖아. 정신을 차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로 실망스러운 모습이다.
차라리 그 남자가 훨씬…
…그러고 보면 그 남자도 나를 원했었지. 비록 비무 상대로서 나를 원하는 거지만, 이것도 사랑으로 봐야할까? 그 남자도 나를 원하고 나 역시 그 남자를 원해. 요구받는 것의 기쁨? 그야 비무를 요구받으면 기쁠 수밖에 없지. 그러니 계속 요구받기를 원하고 말야.
뭐야, 그러면 나… 그 남자를 사랑하는 거야?
생각지도 못했던 결론에 말문이 막혔다. 위지혜의 말대로라면, 나는 지금 그녀의 연인을 사랑하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걸까? 궁금했지만 나 자신도 스스로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당황해서인지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남궁 소저?”
“네에?”
“괜찮으세요?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지셨어요. 제가 괜한 말을 했던 걸까요?”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저기, 위지 소저.”
“네, 말씀하세요.”
“제 이야기는 아닌데요, 그러니까… 제 친구 이야기인데요. 걔가 백 대협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그쪽으로는 지식도 경험도 없는 친구거든요.”
“으음, 곤란한 질문이네요. 하지만 답은 간단해요. 그냥 백랑에게 고백하시면 돼요. 그분의 사랑이 진심이라면 백랑이 알아서 호응해 줄 거예요. 조금 짜증나지만, 그런 쪽으로는 백랑이 선수거든요.”
“그, 그렇군요.”
“아, 그리고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첩이 늘어나는 것 정도는 용서해 주기로 이미 합의가 된 상태랍니다. 후후.”
“아하… 조언 감사드려요.”
하지만 내 마음이 진짜라면, 위지혜의 말대로 하면 되는 거겠지? 조금은 안심이 된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사랑은 성교예요. 성교.”
“……네?”
“사랑은 성교라고요. 자, 따라해 보세요. 사랑은 성교다.”
“사, 사랑은…”
“따라하시라고요. 자, 사랑은 성교다.”
“사랑은 성교다…”
언니와 동생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는 건가? 위지은을 찾아간 나는 일각(一?)이 채 되기도 전에 후회하고 말았다. 다짜고짜 성교라는 말을 하게 되다니, 어이가 없었다. 이 여자, 보기와는 다르게 음란하잖아. 속으로 한숨을 삼킨 내가 방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자, 그녀가 나를 붙잡더니 진지한 얼굴로 속삭였다.
“백 오라버니한테 배운 거예요.”
“……정말요?”
“이건 비밀인데, 제가 오라버니와 이어질 수 있었던 건 다 성교 덕분이거든요.”
“저기, 그게…”
“이걸 속된 말로 떡정이라고 부르는데요, 아무튼 성교 한 번이면 상대방의 사랑을 얻을 수 있어요. 물론 상대가 오라버니처럼 상냥하고, 책임감 강하고, 성격이 올바른 경우에만 가능한 거지만요.”
“위지 소저? 제가 알고 싶었던 건 사랑을 얻는 방법이 아니라… 사랑이 무엇인가예요. 그러니 민망한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 그러니까 말씀 드렸잖아요. 사랑은 성교라니까요? 사랑이 성교니까 사랑을 얻는 방법도 성교가 되는 거죠. 이 단어에 담긴 철학을 아시겠어요?”
“아니요, 모르겠어요…”
이 여자, 강하다. 무섭다. 뭐야 진짜… 이렇게까지 수세에 몰린 건 정말 오랜만이다. 마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기분이다. 성교에 담긴 철학을 물어보다니, 어느 도사의 가르침이라도 받은 걸까? 단순히 음란한 걸 넘어서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후우, 그러니까 잘 들으세요. 남자한텐 자지가 있고, 여자한텐 보지가 있어요. 서로가 필요로 하는 걸 서로가 가지고 있는 거죠. 자, 여기까지 이해가 되세요?”
“……”
“모르시나? 남자는 보지를, 여자는 자지를 원하잖아요. 이건 상식인데… 아무튼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건,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됐을 때, 즉 성교를 할 때,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게 된다는 거예요.”
“……아.”
“사람인 이상 누구나 완벽할 순 없어요. 저마다 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사랑을 한다면 그 약점을 해결할 수 있어요. 혼자서는 불완전하더라도 둘이서는 완전해질 수 있다는 뜻이에요.”
음란한 걸 넘어서는 음탕하고 저질스러운 이야기였지만… 듣고 보면 핵심을 관통하는 이야기였다. 사람인 이상 불완전하기에 외로움을 느끼나, 그렇기에 둘이 되어 완전해질 수 있다니, 그야말로 철학적인 이야기였다. 역시 어느 도사에게 배운 게 맞구나. 그녀가 다르게 보였다.
“그래서 사랑을 성… 서, 서…”
“성교라고요, 성교. 한 번 더 따라해 보세요. 사랑은 성교다.”
“…사랑은 성교다.”
“그래요. 이제 아시겠죠? 사랑이란 상대방이 당신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것, 그리고 당신이 상대방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 그리하여 하나가 되는 것. 그렇게 생각하시면 편할 거예요. 뭐, 저도 사랑을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요.”
덕분에 머릿속이 명쾌해졌다. 우리는 서로 사랑을 하고 있었구나. 지난 사흘간 쉬지않고 비무를 한 것, 그럼에도 웃음이 그치지 않은 것, 그렇게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준 것, 아아… 그것은 사랑이었다.
“위지 소저에게 부족한 건 무엇이었나요? 혹시 가르쳐줄 수 있으신가요?”
“저요? 저 같은 경우엔 자지였죠.”
“……네?”
“언니가 하는 걸 몰래 엿본 다음부터 계속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운 좋게 오라버니랑 하게 되어서 기회를 잡았죠. 제 보지로 오라버니의 자지를 놓아주질 않았거든요. 그런데 다행히도 오라버니에게 부족한 점도 보지더라고요. 언니만큼은 아니지만, 저 역시 오라버니의 운명의 상대였던 거죠. 헤헤.”
“어… 네? 엣?”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그 남자가 원하는 건, 그 남자에게 부족한 건, 비무 상대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고? 진짜로 그 남자에게 필요한 건 보… 보… 보지였다고? 거짓말… 위지은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다 좋은데 정력이 강해도 너무 강해서… 보지 한 개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저로서는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런데 문제는 보지 두 개 가지고도 힘들다는 거예요. 오라버니를 상대해 줄 화경 급의 여자 무인이 있다면 편할 텐데… 그건 너무 욕심이겠죠?”
하지만 이어지는 위지은의 말에 모든 것을 깨닫고 말았다.
나를 요구하던 건 그런 의미에서였구나. 나와의 비무를 즐기던 것, 패배하더라도 비무를 포기하지 않던 것, 그것의 진짜 목적은 내 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자신과의 성교를 버틸 수 있는지 알고 싶었을 테니 말이다.
“그, 글쎄요…”
“아무튼, 상담은 여기까지예요. 재밌는 나들이 되시길 바랄게요.”
그렇게 저질스러운 생각을 안고 있었다니…
허나 이상하게도 그 남자가 싫어지진 않았다. 적어도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는 않았잖아. 누구처럼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잖아. 백이라는 사내는 남자로서 당당하게 나를 요구해 왔다. 아득한 재능의 차이를 보여줬음에도 나를 원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나를 괴물이 아닌 한 명의 여인으로서 바라봐 주었다.
나의 부족함을 채워 주면서 말이다.
“아, 잠깐만요! 그… 제 이야기는 아니고 제 친구 이야기인데… 그 친구가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성교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그 친구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 성교에 대한 걸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을까요?”
“…아하, 그 친구가 곧 성교를 해야 하나 봐요?”
“그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혹시 모르는 거니까요. 아직 자기 마음도 모르는 거 같지만 만약 그게 사랑이라면… 상대방의 부족함을 채워줘야 하니까… 성교를 해야할 수도 있어요.”
“그래요? 그러면 도움을 드려야죠. 제가 특별히 오라버니와의 경험을 살려서 교육시켜 드릴게요. 오라버니의 자지를 기준으로요.”
“아, 그러면 더 좋죠!”
“흐음… 오라버니는 진짜 나한테 감사해야 해.”
“네?”
“아뇨아뇨. 혼잣말이에요.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해 볼까요?”
그러니까… 혹시 모르니까… 미리 배워 두는 게 좋겠지? 그 남자가 나와의 잠자리를 요구할 수도 있잖아. 물론 그렇다고 쉽사리 허락할 생각은 없지만,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니까… 나는 위지은의 가르침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정말 순수하구나. 친구 이야기라니까 다 믿어 주는 것 봐. 위지 자매들과 가족이 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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