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 네토리-236화 (235/428)

〈 236화 〉 태극음양지체(39)

* * *

아쉬움 따윈 없다. 이길 거라 생각도 안 했다. 즐거웠으면 됐다. 최선을 다했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비무를 끝낸 나는 만족감에 미소 지었다.

“빈아!”

베인 곳이 조금 아프기는 하지만, 큰 상처는 아니다. 저렇게까지 걱정해 줄 필요는 없는데 말야. 민망함에 아무렇지 않은 척,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아니요. 져 버렸네요.”

“아픈 곳은 없냐는 말이다!”

하아, 아직도 나를 애 취급 한다니깐. 비무 중에 다칠 수도 있는 건데, 오라버니는 그걸 모른다. 완벽해서 그런가? 여전히 괴리감이 느껴지는 사고방식이다. 이제 좀 남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주면 좋을 텐데... 아쉬움을 삼킨 난 괜찮은 척 연기하며 오라버니를 떼어 내려 했다.

“왜 뒤로 물러난 겁니까.”

그런데 그 순간, 뜻밖의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이봐,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남궁 소저, 어째서입니까.”

“이보게!”

저 남자는 왜 저러는 걸까. 백이라는 사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대답을 요구했다. 왜 뒤로 물러났냐는, 엉뚱한 질문을 하면서 말이다.

왜 그랬긴, 피하려고 그랬지. 우문현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내가 미처 소리를 내기도 전에 남자가 한 번 더 질문했다.

“어째서 지려고 했던 겁니까.”

“……네?”

“마지막 순간, 한 발 내딛는 대신 뒤로 물러난 저의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이보게, 백!”

뒤로 물러난 저의가 뭐냐고?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

아무리 신공이라고 불리는 제왕검형이라고 해도 물러날 경우는 있는 거다. 모든 공세를 맞받아치는 건 오만이고 교만이다. 하물며 상대가 그 월야검 어르신…

……잠깐, 한 발 내딛었어야 했다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 그 생각을 못 했던 거지?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내 실책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만이고 교만이기에 제왕검형, 패기 있게 맞서싸워 누가 위에서 군림하는 지를… 아니, 아니야. 그럴 경우 더는 오라버니와 함께… 는 또 무슨 소리지? 나는 지금 내 검술에 제약을… 읏, 으윽. 머리가…

“아앗…”

“빈아! 역시 상처가 깊은 거냐!”

어지럽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괴롭고 아프고 외롭… 그래, 이 감정은 외로움이지. 오랜만에 느끼는 외로움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싫어… 오라버니마저 내게서 멀어지면, 아, 아니야… 그럴 리 없잖아.

불안하지만 안심이 되고, 그러면서도 두려워진다.

겨우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린 기분이다. 그러면 안 되는데, 계속 잊고 있어야 하는데… 거친 숨을 고르며 나는 눈을 감았다. 자고 일어나면 분명 모든 걱정이 다 사라져 있겠지?

“저와의 비무에선 진심으로 나오셔야 할 겁니다.”

남자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그렇게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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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미쳤지.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남궁빈에게 화를 낸 다음이었다.

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나조차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장인어른이 무시당해서? 아니면 남궁빈에게 실망해서? 무엇이 됐든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건데, 그 선을 넘어 버렸다.

훈수질이라니, 틀딱 꼰대나 할 짓이잖아.

남궁빈도 내가 혐오스러웠는지, 눈을 감고 기절한 척을 했다. 젠장, 이러면 나가린데. 공략을 시도하기도 전에 진 히로인의 호감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거, 이러다가 네토리에 실패하는 거 아냐?

“저와의 비무에선 진심으로 나오셔야 할 겁니다.”

걱정이 되었던 나는 남궁빈에게 나와의 비무를 상기시켰다. 별호가 소검귀잖아. 검을 맞댈 수만 있다면, 조금이라도 호감도를 올릴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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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진을 바라보는 게 좋다. 그의 미소를 보면 안심이 되고, 그와 대화를 나누면 웃음이 나온다. 이게 바로 사랑이겠지. 그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에서 참을 수 없는 기쁨이 느껴진다. 이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

나는 남궁진이 내 운명의 상대라고 생각했었다.

“하아…”

허나, 내 처음을 가져간 건 백이었고, 나는 그와의 성교에 빠져 버렸다.

“백, 더 세게… 아앙…”

배려도 없고 애무도 없는, 그저 성욕만을 위한 성교. 한 치의 저항도 용납하지 않는 그는 마치 폭군처럼 나를 암컷으로 만든 후, 내 자궁 안에 가득 사정을 하며 내게 노예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야말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강간.

그럼에도 나는 그 사실에 희열을 느끼며 그에게 박힌 채 복종을 맹세한다. 이게 바로 사랑이겠지. 그의 자지에게 범해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속에서 견딜 수 없는 환희가 느껴진다. 이보다 더한 쾌감이 있을까?

백이라는 사내 역시 나의 운명의 상대였다.

“더, 더! 하아, 아아아! 제바알!”

허나, 그렇기에 고민이 되었다.

나는 여기서 어떤 사랑을 선택해야 할까?

내 본능은 당장 백에게 달려 가 보지를 벌리라고 소리치고 있지만, 내 이성은 나와 제갈세가의 미래를 위해 남궁진과 이어지라고 외치고 있다. …둘 다 함께할 수는 없는 걸까?

“아, 아아아앙!”

자위를 끝낸 나는 깊어져 가는 고민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고민 상담… 이라도 받아 볼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자위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내 마음을 정해야 했다.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당소연으로 찾아갔는데

“하앗, 하아… 잠시만요… 으으응!”

놀랍게도 그녀의 방에서 야릇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핫, 하아아… 어째, 서, 아앙.”

… 설마, 남궁진을 유혹한 거야?

둘 사이가 이렇게까지 가까워질 거라곤, 미처 상상도 못 했었다. 당소연은 경쟁자도 아니었는데… 어이없게도 그녀 덕분에 선택지 중 하나를 잃고 말았다.

후우, 어쩔 수 없네. 이렇게 된 이상 안심하고 백에게…

“백 오라버니, 하아앙!”

…뭐? 무슨 오라버니?

“정말로, 하앗… 아무 짓도 안 하고 계신 거 맞죠?”

“정말입니다.”

“그치만 자꾸 엉덩이에서… 핫, 하아… 이상한 느낌이…”

남궁진이 아니라… 백이었다고? 거, 거짓말… 거짓말이지?

“잘 보시지요. 제 손은 여기 있습니다..”

“그건 아는데… 핫, 하아… 자, 잠깐… 이건 왜 이렇게 딱딱해진 건데요…”

“아아, 이건 생리적인 현상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 때문에… 발기한 거예요? 와아…”

말도 안 돼… 진짜 백이라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지금 당소연을 안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나의 주인님이었다. 싫어… 어째서... 내가 너무 늦었던 걸까? 하루라도 빨리 내 모든 것을 바쳤어야 했는데, 망설이던 바람에 내 운명이 어긋나 버… 아니, 아니야… 애초에 주인님에겐 본 처가 둘이나 있는 걸. 다른 여자가 하나 추가 되었다고 해서 내가 물러날 이유는 없었다.

“잠깐 물러 나시지요.”

“아, 아뇨… 괜찮아요.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으니까 연습해 놔야죠.”

“…정말 괜찮겠습니까?”

“네에… 그러니까 빨리 다시 안아 주세요…”

그리고… 뭐? 연습? 보아하니 내가 무슨 착각을 한 것 같다.

아무래도 주인님의 진면목을 알게 된 당소연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 같은데, 나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이게, 주인님 자지 맛도 모르는 게 까불어? 나였으면 주인님의 자지가 발기하자마자 입으로 빨아 드렸을 거다.

하아, 이거 더는 안 되겠어.

의미없는 고민을 하고 있었단 걸 깨달은 나는, 속곳을 적신 채 주인님의 방으로 걸어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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