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 태극음양지체(38)
* * *
아침부터 나는 위지 자매와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장인어른과 진 히로인의 비무가 있는 날이거든. 소검귀라 불리는 진 히로인의 실력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분명 재밌는 시간이 될 거다.
“오, 좋은 아침일세.”
“음.”
…지금의 고비만 넘긴다면 말야.
해맑은 표정으로 내게 인사하는 근친충의 얼굴을 보자, 속에서 참을 수 없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저 새끼는 또 친한 척이네. 초장부터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백 대협! 좋은 아침이에요. 날씨 좋죠? 히히, 비무하기 딱 좋은 날씨예요!”
“아, 남궁 소저. 좋은 아침입니다. 과연, 땀 흘리기 좋은 날씨군요.”
아니, 팍 상해버릴 뻔 하다가, 옆에 있는 남궁빈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다.
남매인데 어째 저리 다를까, 헤실헤실 웃고 있는 그녀를 보자, 속에서 참을 수 없는 행복이 치밀어 올랐다. 역시 진 히로인이구나. 방심했다간 빠져들 것만 같다.
“그럼, 먼저 가 있겠네.”
“나중에 봐요!”
“음.”
새끼, 질투하는 거냐? 이번 기회에 이야기 좀 나누려고 했는데, 남궁진이 동생을 데리고 잽싸게 떠나 버렸다. 하여튼 시우는 시우라니까. 속이 좁은 놈의 행동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백랑? 후후, 둘이 친해 보이네요.”
“친하다니요, 오해입니다. 제가 저 놈과 친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남궁빈을 말하는 거예요, 오라버니. 둘이 뭐 있었어요? 저 애가 저렇게 활짝 웃는 건 처음 봤어요.”
“하하… 그것 역시 오해입니다. 사실 남궁 소저와 비무를 하기로 했거든요. 그러니 저와 칼을 맞댈 생각에 신이 난 거겠지요.”
“아하, 괜히 소검귀가 아니네요.”
“언니! 여자한테 검귀라고 하면 안 된다며!”
“…마음이 바뀌었어.”
그런데… 혜매 역시 질투를 한 모양이다.
평소와 다르게 웃음을 잃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 괜시리 죄책감이 느껴졌다. 메인 히로인이라서 본능적으로 진 히로인을 경계하는 걸까? 나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두 손으로 그녀들의 가슴을 주물러 주었다.
“혹시 착각하실까봐 미리 말씀 드리는 건데… 제겐 혜매와 은아 아가씨뿐입니다.”
“백랑… 후후, 그렇네요.”
“아잉, 오라버니…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떡하려고…”
“……꺄앗!”
이런, 말이 씨가 됐네.
***
“소연아, 그게… 헤헤, 모르는 척 해 줄래?”
“어… 어어…”
“백랑도 참, 이제 그만 놓아 주세요.”
“하하, 알겠습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들켰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당소연이 봐 봤자 뭘 하겠어. 변태처럼 얼굴을 붉힌 당소연이 한 발 물러났다가, 은아의 말을 듣고는 천천히 다가와 우리에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백 대협, 혜아 언니, 그리고 은아야. 조, 좋은 아침이에요.”
역시 아직도 숙맥이구나. 가슴 애무가 그렇게 충격이었는지, 당소연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이거, 연습 수위를 빨리 높여야 겠는걸? 머릿속으로 커리큘럼을 수정한 나는 그녀의 인사에 화답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당 소저.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히익… 그걸 어떻게… 아, 아니, 그게… 먼저 가 볼게요!”
타다다닥
…잠을 잘 못 잤나 보지?
한층 더 얼굴을 붉힌 당소연이 황급히 자리에서 도망쳤다. 저년 저거… 밤에 자위라도 한 거 아냐? 어제의 일을 생각하면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아… 헤헤, 소연이가 왜 저럴까… 언니, 오라버니. 제가 따라가 볼게요.”
타다닥
그리고 은아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당소연에게 달려갔다. 친구를 놀릴 생각에 신난 거겠지. 그 모습이 귀여워서 슬쩍 웃고 있자
“……꺄앗!”
이번에는 제갈연화가 등장했다.
***
“어머, 제갈 소저! 좋은 아침이에요. 몸은 좀 괜찮아 지셨어요?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호호… 덕분에 많이 좋아졌답니다.”
“좋아진 거 맞습니까? 안색이 영 별로입니다.”
정말로 많이 아팠던 걸까? 좋아졌다는 제갈연화의 말과 달리, 그녀는 상당히 심각해 보였다. 꼴만 보면 중병에 걸린 것 같았다. 저러니까 하루종일 안 보였지.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서 말을 걸었더니, 제갈연화가 깜짝 놀라며 내게서 멀어졌다.
“…아앗, 배, 백 대협…”
“네?”
“하아… 그, 그게… 아아아아아! 죄송해요오오!”
타다다닥
그리고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면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깜찍한 비명을 지르면서 연무장으로 도망쳤다. …이게 그 유명한 0고백 1차임인가? 아니, 당소연까지 합쳐서 0고백 2차임이구나.
어이가 없어서 내가 멍하니 멈춰 있자, 옆에서 혜매가 중얼거렸다.
“혹시 식사에 문제라도 있었던 걸까요? 다들 상태가 안 좋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것 참, 혼돈의 카오스다.
***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쳤지만 비무는 정상적으로 시작되었고, 나는 육포를 씹으며 장인어른의 진짜 실력을 구경할 수 있었다.
채앵
챙, 채채챙, 채앵!
칭! 챙!
“잠깐!”
“응? 왜 그러시나요?”
채애앵!
“휴…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깜짝이야. 잠깐 당황했던 나는, 다시 비무에 집중했다.
“장인어른에게 왜 월야검이라는 별호가 붙은 건지를 알겠군요.”
“후후, 신기하죠?”
같은 월하검법인데도 나와는 수준이 달랐다. 분명 극성으로 익힌 것은 같을 텐데, 장인어른의 검에선 달빛이 느껴졌다. 아침인데도 말이다. 저게 경험이고 연륜인 건가? 괜히 위지세가의 가주가 아니었다.
“남궁 소저도 대단하군요. 끊임없는 검기를 다 파쇄하다니.”
“흥… 하지만 이길 거 같진 않네요. 벌써 지쳤잖아요.”
남궁빈이 의외로 선전하며 자신의 진가를 보여 줬지만, 역시 장인어른을 이길 순 없었다. 절정에 들어선 것 같기는 한데… 육신이 따라주지 않아서인지, 매 경합마다 조금씩 뒤처졌다.
…이거 아쉬운데? 실력이 나쁘진 않은데, 기대했던 소검귀의 모습은 아니었다. 저 정도면 그냥 훌륭한 후기지수 수준이잖아. 특별할 것 없는 그녀의 모습에 내가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하아… 역시 월야검 어르신은 대단하네요.”
“허허, 몸풀기는 끝났느냐?”
“조금 과하게 풀기는 했지만… 이제 준비 됐어요!”
“좋구나. 이제 제대로 놀아 보자꾸나.”
갑자기… 연무장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콰아앙!
쾅! 쾅!
콰가가가강!
“…이게 무슨.”
충격이었다.
본격적으로 두 사람이 검을 맞대자, 조금 전의 승부가 애들 장난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쉴틈없이 검기가 부딪히며 굉장한 폭음을 냈고, 천지가 흔들리며 사방에서 흙먼지가 휘날렸다.
저건… 제왕검형이잖아.
잊을 수 없는 근친충의 검술을 목격한 나는, 혜매와 은아를 감싸주며 비무를 지켜 보았다. 관측과 천무지체를 가진 내게 지금의 비무는 둘도 없는 배움의 기회였다.
콰아아앙
콰가강
“으음…”
완벽, 나는 그녀의 검술을 훔쳐보면서 감히 완벽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 이상 적합한 표현이 또 있을까? 한 치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에 대한 방어조차 용납하지 않는, 모든 무인의 머리 위에서 근엄하게 군림하는 제왕의 품격. 남궁빈의 제왕검형은 그야말로 신공이었다.
“배, 백랑… 그래도 아버지가 이기시겠죠?”
“흐음… 지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혜매를 안심시키며 머릿속으로 그녀의 동작을 따라했다.
쉽지 않은 시도였지만, 불가능한 시도는 아니었다. 지나치게 완벽했기에, 오히려 따라갈 수 있었다. 가장 이상적인 움직임이, 곧 그녀의 움직임이었다.
채채챙
느리지만 정확히, 한 발 내딛으며 적에게 다가가되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
콰가가강!
조금 속도를 내서, 멈추지 않고 공격을 이어가되 반격 따윈 허락하지 않는다.
콰아앙!
이윽고 몸을 겹쳐서, 쉴 새 없이 몰아치며 장인어른을 위협한다. 계속해서 나의 턴, 나의 턴, 나의 턴! 상상 속에서 그녀와 하나가 된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녀와 함께 검을 휘둘렀다.
“하아아아앗!”
“하하하! 많이 늘었구나!”
채앵!
콰가가가가강!
그러나 장인어른 역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완벽해 보이는 검을 맞받아치며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나와 남궁빈에게 다가왔다. 그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검기를 휘날리며, 마치 아직 멀었다고 소리치듯이 우리를 윽박질렀다.
콰가가강!
콰앙!
허나,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모든 것은 제왕의 아래인 것을. 아무렇지 않게 장인어른의 검을 흘려보내며,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모든 자연의 순리 대로, 단순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격을 내려찍었다.
콰아아아아앙!
그러자 상상 속의 장인어른이 쓰러짐과 동시에
“빈아!”
남궁빈이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그녀는 내 상상과 달리 한 발 뒤로 물러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