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 네토리-221화 (220/428)

〈 221화 〉 태극음양지체(24)

* * *

고약한 피 냄새, 그리고 듣기 싫은 비명소리… 타이밍이 뭐 이리도 절묘한 건지, 위지은을 배웅하고 돌아오자마자 끔찍한 사건을 목격했다. 사파 놈들이 쳐들어 와 깽판을 치는 아주 기분 나쁜 사건을 말이다.

­채애앵

­채앵!

마음을 가다듬고 급하게 정신을 차린 나는, 사파 무리들을 뚫고 들어가 가주에게 사건의 진상을 물었다. 우선은 사태 파악이 급선무였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비연대가 당했다...”

“키헤헤헤, 비릿대니 뭐니 하는 떨거지들이 날파리처럼 귀찮게 하길래 주인 얼굴 좀 보려고 왔다. 그런데 듣자하니 여기에 인간 영약이 있다고 하더라고! 키헤헤헤, 그러니 그년을 내놓는다면 그년 하나로 용서해 주겠다!”

비연대는 위지세가의 무력대로, 위지혜의 안전을 위해 하북성 주변 사파 무리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었다는 건 꼬리를 잡혔다는 거잖아. 아무래도 혜매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온 무림에 퍼져 나가면서, 비연대의 일이 제대로 꼬인 듯 했다.

“…대략 서른 명쯤 되는 군요. 돕겠습니다, 장인 어른.”

“아니, 너는 당장 혜아에게 가거라. 혜아 곁을 지키고 있는 장로님의 힘이 필요하다. 우리 둘로는 역부족이야. 얼른 가서 장로님과 자리를 바꾸거라.”

“저희 둘이선 안 되는 겁니까?”

“저 녀석은 화두쌍귀, 절정의 벽을 넘어선 사파의 고수로, 혼자인 줄 알고 덤벼들면 숨어 있는 동생이 튀어나와 역공을 가하는 비겁한 놈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두 명이서 상대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아직 네 실력이 부족하다.”

“키헤헤헤, 월야검께서 나를 알고 있을 줄이야! 이거, 영광이군!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용서해 줄 생각은 없다. 자, 얼른 네놈의 딸년을 바치거라!”

화두쌍귀? 들어본 적이 없는 별호다. 젠장, 그렇다면 하북성 근처의 사파 놈이 아니라는 뜻이잖아. 몇 주간 정말 평화롭게 지냈었는데,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간 모양이다. 앞으로도 이런 사건이 계속 일어날 거 아냐. 짜증났지만 혜매를 위해서라면 감내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다만 시작부터 절정의 벽을 넘어선 초고수가 오는 건 반칙이잖아.

천무지체가 되었다고 밸런스 패치가 엉망으로 된 것 같다. 이래서는 렙업하기도 전에 게임 오버하게 생겼다고요. 하아… 이거 쉽지가 않아 보였다.

“닥치거라! 어디 사파 잡것 따위가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백 사위! 이렇게 있을 시간이 없네. 어서 가서 장로님을 불러오게!”

“알겠습니다!”

“끼헤헤헤, 얌전히 보내줄 것 같으냐! 막아라, 이 놈들아!”

­슈우욱

­파악!

“””끄아아악!”””

“호오… 제법 검을 쓰는 놈이었구나.”

하지만 장인어른 말마따나 내가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화경의 고수가 세가에 있는데, 내가 뭐 좋다고 목숨을 걸겠나. 나는 내 앞을 가로막는 사파 놈들을 가볍게 베어준 후, 혜매의 방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인데, 내가 혜매 옆을 지켜야 하는 거잖아. 한 장로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남편 될 사람으로서 이런 일까지 맡길 수는 없었다.

­타닥타닥

­타다닥

“혜매!”

“백랑! 무사하셨군요!”

호감도를 극한으로 올릴 수 있는 귀중한 이벤트인데, 이걸 어떻게 남한테 맡기냐고. 나는 혜매가 안심할 수 있도록, 떨고 있는 그녀의 몸을 안아 주었다.

***

“끌끌끌. 빨리도 왔다, 이것아.”

“스승님! 어서 가주님을 도와줘야 합니다!”

“말 안 해도 알고 있으니 걱정 말거라. 그럼… 갔다 올 테니 혜아를 잘 지키고 있거라.”

­쉬이익

허어… 이게 화경에 발을 들인 사람의 움직임인 건가? 천무지체가 되었는데도 한 장로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확실히 저 정도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위지혜의 안위를 살폈다.

“혜매, 괜찮으십니까?”

“저는 괜찮지만 백랑이… 이 피는 설마…”

“제 피가 아니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하아… 놀랐잖아요. 정말 다행이에요…”

“혜매…”

으음, 이거 설마 그건가? 왜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본능적으로 번식 욕구를 느낀다고 하잖아. 진짜로 그래서인지 떨고 있는 혜매의 얼굴이 평소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지금 당장 덮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백랑… 하아, 백랑…”

그리고 그건 나뿐만이 아닌 건지, 위지혜가 야릇한 숨소리를 내뱉으면서 자신의 젖가슴을 내 가슴팍에 비벼 댔다. 무언가를 바라는 듯한 눈으로 나를 강렬하게 쳐다보면서 말이다.

“하읏, 하아…”

이거… 각인가?

화경의 고수가 나서서 세가도 안전해 졌겠다, 혜매의 마음을 진정시킨다는 목적도 있겠다, 이대로 혜매와 잠시 사랑을 나누면…

“끼흐흐흐, 이거 임자가 있는 년이였군. 하지만 뭐 구멍만 있으면 상관없겠지. 어이 거기 버러지, 죽기 싫으면 그 년을 내 놓는 게 좋을 거다.”

아, 뭐야. 분위기 좋았는…

아니 진짜 뭔데. 아까 그놈이잖아. 장인어른이랑 한 장로는 대체 뭘 한 거야. 절정의 벽을 넘었다는 고수를 통과시키면 어떻게 하냐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식은땀이 났다. 이번 ‘히로인 네토리’가 끝날 수도 있는 위기였던 것이다.

“흥, 너야 말로 죽기 싫으면 당장 꺼지는 게 좋을 거다.”

당황한 나는 우선 혜매 앞에 서서 검을 들고 놈을 노려보았다.

“끼흐흐흐, 사랑이꾼이구만. 여자를 위해서 죽고 싶은 거야? 좋아. 네 소원 들어주지. 끼흐흐흐!”

그리고 그러다가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 새끼… ‘키헤헤헤’가 아니라 ‘키흐흐흐’ 하고 웃잖아. 거기다 자세히 보니까 곡검 생긴 것도 다르고… 혹시 이거, 아까 봤던 그 놈이 아닌 거 아냐? 장인어른이 말했던 동생 쪽인 거 아니냐고.

그럴듯한 추리를 하고 나자 근거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적어도 몰래 기습을 할 동생 놈은 없다는 거잖아. 절정의 벽을 넘었다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일대일이라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흥, 나야말로 네 소원을 들어주지. 혜매! 잠시 물러 서 계세요. 금방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배, 백랑… 믿을게요!”

“키흐흐흐! 네가 보는 앞에서 저년을 따먹어 주마!”

“너는… 곱게 못 죽을 거다.”

“키흐흐흐!”

“죽어어어!”

***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키흐흐흐… 키흐흐…”

­털썩

나의 승리였다.

무림인 대 무림인으로 싸웠다면 나의 필패였겠지만, 나한테는 ‘히로인 네토리’에서 얻은 스킬들이 있었다. 관측이나 염력 같은 개사기 스킬들이 말이다.

“키흐… 괴상한 놈… 그런 이상한 사공을 쓰다니…”

그러니 웬만해서는 일대일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뭐야, 이게 끝이야?

­타다다닥

“백 사위! 무사한가!”

“끌끌끌. 과연 내 제자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이 되는 전투를 끝내자마자, 장인어른과 한 장로가 혜매의 방으로 돌아왔고, 적지 않은 시간 끝에 우리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백랑, 멋져요… 다시 한 번 백랑에게 반했어요!”

“운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묘하게 기분이 찝찝했는데, 무언가를 잊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 굉장히 불편했다. 상황이 좋게좋게 끝났는데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에 ‘내 동생이 복수할 거다…’ 라는 쓸데없는 말을 들어서 그런가? 뒷맛이 구렸다.

“백랑? 혹시 어디 다쳤어요? 안색이 안 좋아요.”

“아뇨 괜찮… 이 아니라, 아앗!”

“…백랑?”

“혜매! 그리고 두 분! 은 사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그 불편함의 정체을 알게 되었다.

집에 돌아왔어야 했을 은아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벌써 해도 졌는데 말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나는 혜매를 장인어른에게 맡긴 후, 한 장로와 함께 세가 밖으로 수색에 나섰다.

“제자야, 나는 왼편을 찾아 볼 테니, 너는 오른편을 찾아 보거라!”

“알겠습니다!”

쳐들어 온 사파 무리들은 모두 제압하거나 죽였다. 그러니 은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가능성은 적었다. 하지만 ‘내 동생이 복수할 거다…’ 라는 놈의 마지막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본인이 동생일 텐데… 마치 세간에 숨기고 있던 또 다른 동생이 있는 것처럼 말하니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찾지 못한 사파 놈이 하나 더 있다는 소리잖아. 그러니 걱정이 되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푸슉

­촤아악…

“키호호호, 꿩 대신 닭이라고 너라도 죽여야 형님들 몫을 기리겠구나. 잘 가거라. 키호호호!”

그런데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꾸엑?! 네놈은…”

“사, 사저, 정신 차리세요! 사저!”

으슥한 골목길에서 찾은 위지은은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다.

“사저… 은아야! 은아야! 눈 좀 떠 봐!”

간발의 차이로 말이다.

***

“……로드.”

하아…세이브 해 놔서 정말 다행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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