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 태극음양지체(23)
* * *
“부탁이 있어요, 사제.”
“부탁이요?”
“네, 들어주실 거죠?”
여느 때처럼 수련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 가려는데, 위지은이 나를 부르더니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이다.
그 모습이 참 귀여웠던 나는, 흔쾌히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그래서 어떤 부탁입니까?”
“사제가 알려준 그 수련법의… 성과가 나온다면 저도 연애라는 걸 하게 될 텐데… 그때를 대비해서 남자에게 조금은 익숙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 왜… 손을 잡거나 그런 걸 하게 될 텐데… 그럴 때 어색한 모습을 보여주면 조금 그렇잖아요.”
“흐음, 알겠습니다. 그게 걱정이 된다 이거군요.”
그러니까 나로 연습을 해 보고 싶다 이건가? 이것 참, 호박이 넝쿨째 굴러왔다는 게, 딱 이런 상황이 아닌가 싶다. 가만히 놔둬도 나를 의식하게 될 텐데, 이렇게 되면 무조건이잖아.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먼저 스킨십을 해 보고 싶다고 말하는데, 이걸 고추달린 남자로서 어떻게 거절하냐고. 시우가 아닌 이상 위지은을 도와주는 게 당연했다.
“네, 그래서 그때를 대비해서 사제에게 도움을 받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죄송합니다. 사저의 생각은 알겠지만 제게는 혜매가 있는지라… 혜매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그것도 그녀의 동생인 사저에게는, 도움을 드리기 힘들 거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아니, 원래 이런 거는 밀당이 중요하잖아. 부탁한다고 곧바로 도와주는, 싸 보이는 듯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사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형부고 어른이잖아. 여기서는 조금 묵직한 모습으로 올곧은 자세를 보여주는 게 맞았다.
“네에…?”
“사저가 양해를 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
“…사저?”
“…다 말할 거예요.”
“네?”
“안 도와주면, 그날 저한테, 그 ‘변태’ 같은 수련법을 알려 줬다고, 언니한테 다 말할 거라고요! 알겠어요?”
그런데 위지은의 반응이 내 예상 밖이었다.
조금 더 매달리면 못 이기는 척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협박을 하다니…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얌전한 아이는 아니였지. 위지은이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자기 딴에는 용기를 내서 부탁한건데, 내가 단칼에 거절해서 삐진 건가?
볼을 부풀린 채 화났다고 어필을 하는 위지은이 너무 귀여워서 미칠 것 같았다. 나름 심각한 상황인데 저렇게 귀여운 짓을 하니까 자꾸 웃음이 나와서 큰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군요.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그녀의 부탁을 곧바로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
“정확히 어떤 걸 하고 싶으신 겁니까?”
“…몰라요.”
“네?”
“남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는데, 제가 어떻게 알고 말해요. 흥, 사제가 적당히 생각해서 도와주세요.”
은아야, 그러면 도와줄 수가 없어. 너처럼 그렇게 틱틱거리면 도와줄 수가 없다고.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건지, 위지은이 내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위지은이 처음에 말했던 대로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렇게 말입니까?”
“꺄앗… 흐흥, 그… 그렇게가 아니라.”
“정확히는 이렇게 말이군요. 연인처럼, 깍지를 끼고 싶으신 거지요?”
“하으… 네, 네에…”
그러자 위지은의 얼굴이 석양보다 붉어졌다.
“아니, 제가 실수했군요. 마주보고 손을 잡는 게 아니라, 이렇게 옆에서 깍지를 끼고 싶었던 거지요? 어깨를 맞댄 채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요.”
“하, 하읏…”
“아닌가요?”
“마, 맞아요… 역시 잘 아시네요. 흥… 꺄앗?!”
“그리고 이렇게 손을 비벼대면서 둘만의 신호를 보내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저기 저 모퉁이에서 몰래 입을 맞추고 싶다든가, 아니면 오늘밤 아침까지 함께하고 싶다든가, 등등의 뜻을 담아서 말입니다.”
“…혜아 언니한테도 그렇게 해요?”
“혜매에게는… 이렇게 귓가에 속삭이지요.”
“하으읏?!”
귀엽기는. 내가 귓속말을 해 주자 위지은이 깜짝 놀라더니 허둥지둥 내게서 멀어졌다. 역시 괴롭히는 맛이 있는 아이라니까. 예상대로 행동하는 위지은이 참 사랑스러웠다.
“하앗… 하아…”
그런데… 내가 조금 심했나? 숨을 쌕쌕거리면서 나를 경계하는 그녀를 보자, 시작부터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과를 하려고 했는데…
“대충 알겠어요… 연인끼리는 이런 걸 하는 거군요… 그러면 익숙해질 때까지 부탁할게요. 오늘은 일단 속삭이는 것까지 해 봐요.”
위지은이 다시 내게 다가왔다.
역시 위지세가의 핏줄은 조금 다르다니까. 상당히 개방적인 그녀의 태도에 감동한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에게 도움을 주었다.
***
“사저?”
“쓰읍…”
“저기, 사저?”
“하아…”
“듣고 있습니까?”
위지은과의 교습은 그 이후로도 계속 되었다. 하루만 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매일같이 나를 협박하더라고. ‘오늘은’ 이라고 말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설마가 사람 잡았다.
“쓰읍… 핫, 네에?”
“시간이 다 됐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지요.”
하지만 나쁠 건 없었다. 어쨌거나 귀여운 사저랑 재미난 시간을 보내는 거잖아. 혜매한테 들킨다면 조금 곤란한 일이 생겼겠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오늘도 사저와 함께 연인 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
“그, 그치만… 아직 포옹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는데요?”
“오늘 거의 한 시진 동안 제 품 안에 계셨으면서도 말입니까?”
거의 이 주일 동안 이렇게 공략 아닌 공략을 했으니, 위지은은 거의 끝났다고 봐도 되겠지? 이 정도면 그녀를 둘째 부인으로 맞이할 때까지 안심하고 놔둘 수 있을 거 같다.
이제 와서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반할 일은 없을 거 아냐.
“그, 그치만… 익숙해지지 않는 걸 어떻게 해요! …느껴지시죠? 아직도 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잖아요. 저도 노력 중인데 쉽지 않다고요, 이거.”
“그래도 일단 오늘은 여기서 그만두시지요. 시간이 늦었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연인의 귓속말 해 주세요. …복습이 필요해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잘 자’ 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아뇨… 오늘은 시내에 나갔다 올 거라… ‘사, 사랑해요’ 라고… 해 주세요. 언니한테 하는 것처럼 최대한 다정하게, 애정을 듬뿍 담아서요…”
이렇게까지 부탁하는 위지은이 나를 떠나간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다. 그리고 내가 시우도 아니고 잡힌 물고기를 풀어 줄 리가 없잖아. 여기까지 온 이상 위지은은 함락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사랑해요, 사저.”
“헤, 헤헤… 저도, 사랑해요…”
“이제 됐습니까?”
“……흥! 끝까지 최선을 다 하라고요! 뭐예요 그게, 칼같이! 제가 떠날 때까지는 연인처럼 해 달라고요!”
와락
“미안해요, 사저. 속상했어요?”
“하으읏… 조금요.”
“제가 사랑하는 거 알죠?”
“네, 녜에…”
“날이 추운데 몸 조심하시고, 제 생각하면서 주무세요. 알겠죠?”
“네에… 헤, 헤헤… 헤헤헤.”
쉽구만.
랜덤 기연으로 천무지체가 된 이후로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 같다. …혹시 그것까지 포함해서 천무지체인 걸까? 음,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이렇게 평화로운 날만 이어지는 걸 보면 말이다.
***
“끄으윽… 가주님, 죄송합니다… 저희 비연대만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푸슉
털썩
“키헤헥, 너네 세가에 걸어 다니는 영약이 있다고 들었다. 냉큼 내 놓는 게 좋을 거다. 끼헤헤헤헤헤!”
…라고 생각한 게 바보였다. 따지고 보면 무협지 주인공들은 천무지체임에도 사건사고에 휘말리잖아. 난데없이 쳐들어온 사파 무리를 본 나는 드디어 무언가가 시작됐음을 직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