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 태극음양지체(20)
* * *
할 말이 있다고…? 서, 설마… 들킨 거야? 아, 아아… 아니지?
갑작스러운 언니의 이야기에 심장이 콩닥콩닥 날뛰기 시작했다. 아무도 못 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일을 언니가 눈치챘다고 상상하니, 두 다리가 갓 태어난 염소처럼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굉장한 일이 일어났거든!”
“굉장한… 일?”
“그래! 백랑이… 무려 환골탈태를 한 거 있지!”
“화, 환골탈태? 정말이야?”
그런데… 언니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뭐야, 들킨 게 아니었잖아.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때의 색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굉장히 아파하고 있었지… 나를 끌어안고 나서부터는 비교적 얌전해 졌었지만, 처음에는 진짜 죽어 가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왜 그러나 싶었는데… 환골탈태라면 이해가 갔다. 잠깐, 그런데 나는 환골탈태 중인 사람한테 안겨서 그런 짓을 한 거야…? 우으… 진짜 정신이 나갔었나 봐… 자괴감이 배로 늘었다.
“응응!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야. 글쎄… 환골탈태를 하면서 천무지체가 되었대! 하늘의 축복이라는 그 천무지체 말야!”
“…뭐? ……뭐어어?”
“대단하지? 대단하지! 역시 백랑이라니까!”
“처… 천무지체… 가 되었다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천무지체가 무슨 거리에 있는 객잔 이름도 아니고 무림 역사에서도 찾기 드문 굉장히 희귀한 신체잖아. 그런데 그 색마가 천무지체가 되었다고? 말도 안 돼. 이렇게 치사한 일이 어디 있어!
배로 늘어난 자괴감과는 별개로, 무인으로서의 질투심이 생겨났다.
내가 정말로 힘겹게 익힌 월하검법도… 천무지체면 아무 고생도 없이 익힐 수 있을 거 아냐. 10년 넘게 수련한 지난 날들이 새삼 허무해졌다.
“후후… 그런데 있지, 천무지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백랑이 뭐라고 말한 줄 알아? 반드시 천하제일인이 되어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대!”
“하… 그래?”
“응응! 정말 멋지지?”
“……그렇네.”
하아… 그런데 이게 뭐야. 이러면 언니한테도 질투심을 느껴야 하잖아.
항상 꿈꿔 오던 낭만적인 연애를 그 누구보다 즐기고 있는 언니를 보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누구는 가슴이 납작해서, 소꿉친구한테도 남자 취급을 받고 있는데… 누구는 가슴이 커다래서, 저렇게 사랑을 받고 있다니… 씨이, 미안하다고 생각했던 거 취소할 거야!
후우… 언니와 이야기할수록 진이 빠지는 기분이다.
“응? 은아야 혹시 어디 아파?”
“아니… 그게, 조금 피곤해서. 아하하…”
“어머, 그래? 미안해. 언니가 괜히 방해를 했나 봐. 그럼 나가볼 테니까 은아는 푹 쉬어. 알겠지?”
“응… 잘 자, 언니.”
“은아도 잘 자.”
드르륵
탁
“하아… 잠이나 잘래.”
***
“……대련이요?”
“끌끌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내 제자로 삼았으니, 사저 될 사람으로서 불만이 생겼을 수도 있지 않느냐. 그러니 대련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내가 사저… 아니, 그게 아니라, 천무지체라면서요. 그러면 그게 끝이죠. 뭘 또 대련을 하래요. 그런 거 없이도 인정할 거예요.”
천무지체가 되었는데 한 장로님이 가만히 놔둘 리 없잖아. 장로님이 저 색마를 제자로 받아들인 건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렇게 아침부터 얼굴을 보게 될 것도 알고 있었고 말이다.
그래서 연무장에 오기 전부터 그 대비를 단단히 해 놨었다. 혹시나… 저 남자가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 나는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변명을 준비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대련이라니!
다행히 남자는 어제의 일을 모르는 눈치였지만,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일이 떠올라서 나는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 상태로 대련을 하라고? 나는 장로님의 배려를 극구 사양했다.
“하하, 사저 혹시 겁 먹으신 겁니까?”
“…뭐라고요?”
“그게 아니면 뭘 그렇게 빼십니까. 꼴사납게.”
“…꼴사납게?”
그런데… 저 색마가 왜 저러는 거지? 어제는 언니가 사람 속을 뒤집어 놓더니, 오늘은 색마가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연인끼리 나를 가지고 노는 거야?
아무리 천무지체라고는 하지만 어제 각성을 했고 아직 아무런 무공도 배우지 못 한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나한테 이렇게 덤빈다고? 여전히 부끄럽기는 했지만 무인으로서 이 도발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니면 내기라도 하는 게 어떻습니까. 지는 쪽이 이기는 쪽의 부탁을 들어주는 걸로요.”
“내기라… 그거, 좋네요. 당장 붙죠!”
흥, 이기는 쪽의 부탁을 들어주자고? 나야 좋지. 앞으로 다시는 길거리에서 색마 같은 행동을 하지 못 하도록, 내가 명령해 주겠어!
…라고 마음먹었었는데…
“끌끌끌. 방심했구나.”
쇄골이 다 보이는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는 건 반칙이잖아…! 수련복이 뭐 저렇게 야하냐고. 땀에 젖으면 속이 다 비쳐서… 꼭지가 다 보이잖아…! 거기다가 땀냄새를 맡으니까 그때 생각이 나서… 우으…
“하하. 제 부탁을 들어 주셔야겠군요.”
“……칫.”
아, 안 돼… 색마니까, 야한 걸 부탁할 생각이지? 이 변태… 분명 그때처럼 내 엉덩이를 노리고 있는 걸 거야. 저 표정 좀 봐. 완전 음란하잖아. 그, 그게 아니라면 혹시 또 나와 입을 맞출 생각인 걸까? 그, 그것도 아니라면 서, 서서, 성교를 원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색마니까… 이번에야 말로 내 처녀를…
“그러면 제가 요리하는 걸 도와주시겠습니까?”
“……엥?”
***
탁탁탁
보글보글보글
지글지글지글
“휴우, 완성했습니다. 한번 맛 봐주시겠습니까?”
“……맛있네요. 그것도 엄청.”
“다행입니다. 혜매도 기뻐하겠군요.”
……뭐, 그런 변태 같은 걸 부탁할 사람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어. 이 남자… 색마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언니만 바라보는 남자잖아. 의식을 잃었을 때도 언니만 찾던 남자가 나한테 그런 걸 요구할 리가 없지.
나는 기가 막히게 맛있는 남자의 요리를 맛 본 다음,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농담 아니에요. 어지간한 객잔 요리 보다 맛있었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혜매에게 대접할 요리라고 생각했더니, 맛있게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저.”
“흥… 내가 도와준 게 뭐 있어요. 재료만 꺼내주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요리는 또 왜 이렇게 잘하는 건데. 짜증나지만 보면 볼수록 못 하는 게 없는 거 같다. 언니는 어디서 이런 남자를 만난 거지. 그 짓거리를 보고 오해를 하기는 했지만, 그리 나쁜 남자 같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좋은 남자라고 봐야겠지? 한 사람만 사랑해 주고, 그 사람한테 모든 걸 맞춰 주는 남자가 또 어디 있겠어. 생각해 보면 정말로 연애 소설의 남자 주인공 같은 남자다.
“…그런데 진짜 이걸로 끝이에요? 부탁이라길래 뭐 거창한 걸 생각했을 줄 알았는데… 따로 부탁할 건 없어요?”
“아 그게 말이죠… 요리를 도와달라고 한 건 핑계고, 조금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네?”
“혜매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사저가 신경 쓰는 일이 있는 거 같은데 자기한테는 알려주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대신에 이렇게… 상담 같은 걸 해 드릴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뭐야, 그런 거였어? …후우, 역시 언니라니까.
무엇을 숨기고 있는 지는 알아차리지 못 한 눈치지만, 무언가 감추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차린 모양이다. 옛날부터 그랬었지. 묘하게 눈치가 빠르다니까.
“음… 상담이요?”
다만… 숨기고 있는 게 뭔지 알았으면, 제 아무리 언니라도 이렇게 나오지는 않았을 거다. 자기 몰래 자기 남자랑 그렇고 그런 짓을 했는데 가만히 있겠어? 그러니 그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그러면 있잖아요…”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칠 수도 없었다. 다른 고민이 있기는 하잖아. 남들한테 꺼내기는 굉장히 민망한 고민이었지만… 언니만 바라보는 이 남자라면 의지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시지요.”
“남자들은 가슴이 작은 여자를 싫어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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