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 태극음양지체(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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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 기연이 발동되었다는 알림을 보고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한 장로가 나의 맥을 짚고 있고, 그 옆에선 장인어른과 혜매가 노심초사하는 얼굴로 말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흐음…”
“장로님, 어떤가요?”
“이건…”
뭐지, 이 상황은? 나한테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혜매가 두 사람을 불러온 건가? 으음… 고맙기는 한데, 이러면 우리가 섹스 중이었다는 걸 두 사람이 눈치챘을 거 아냐… 나는 참을 수 없는 민망함을 느끼며 조심히 장인어른과 한 장로의 눈치를 보았다.
“천, 처처처, 천무지체!”
“네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세요?”
“자, 장로님, 천무지체라니요!”
“틀림없어! 이 기운은 천무지체의 기운이야!”
그런데… 갑자기 한 장로가 기겁을 하더니, 천무지체라는 말을 남발하며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인어른이 뒤따라 나의 맥을 짚더니, 이내 곧 박수를 치며 한 장로와 함께 폴짝폴짝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장인어른? 장로님?”
“백랑! 정신이 드세요?”
“혜매… 이게 대체…”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글쎄… 백랑 몸에 이상이 생겼던 게 아니었대요! 놀랍게도… 백랑의 몸이 환골탈태를 한 거래요! 그리고, 더 놀랍게도! 백랑의 몸이 천무지체가 되었대요!”
“천… 천무지체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천무지체요!”
천무지체라면… 무협지 먼치킨 주인공들의 기본 소양인… 모든 무공들을 극성으로 익힐 수 있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신체 아닌가. 그런데 내가 그 천무지체가 되었다고? 진짜로?
“끌끌끌. 거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 처음부터 쓸모가 있어 보였대도!”
“껄껄껄. 저도 말만 그렇게 했지, 처음부터 좋게 보고 있었습니다. 얼굴도 잘생겼지, 심성도 곱지, 혜아한테도 잘하지, 정말 최고의 사위 아닙니까!”
““끌끌끌! 껄껄껄!””
아니, 진짠가 보네? 진심으로 기뻐하며 서로를 얼싸안는 두 사람을 보자, 그제서야 실감이 갔다. 저 정도의 찐텐이라면 절대 거짓일 수가 없거든.
이것 참… 솔직히 말하면 환골탈태를 했다곤 하는데, 팔다리가 조금 길어진 거 말고는 딱히 달라진 점이 없어 보여서 실망을 했었다. 그런데 실망은 개뿔, 초장부터 대박이 터졌다. 천무지체라니, 이대로 수련만 한다면 천마랑도 맞다이가 가능할 거 아닌가.
“백랑,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혜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세이브&로드의 두 번째 슬롯에, 지금의 순간을 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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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혜매… 안아줘요.”
“아으… 글쎄, 난 언니가, 하읏…”
“혜매, 날 두고 가지 마세요.”
“으으, 하으으… 잠깐, 잠깐만… 하아… 이 색마가…”
시집도 안 간 처녀의 몸을 이렇게 마음껏 껴안다니… 역시 이 남자는 색마가 분명했다. 기댈 수 있는 듬직한 가슴팍과 안심이 되는 튼튼한 팔 근육을 가지고 있지만… 어쨌거나 여자의 몸을 함부로 희롱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위지은은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를 비난했다.
“사랑해요, 윽, 혜매…”
“하으읏… 그렇게 바로 옆에서 속삭이면… 흣, 으으…”
“혜매, 하아, 오늘도 부드럽군요…”
“어, 어, 어디다가 손을 대는 거야! 하앙…”
감미로운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이는 것도, 부드럽게 엉덩이를 어루만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남자의 ‘혜매’가 아니지 않는가. 곧 있으면 처제가 될 여자의 엉덩이를 애무하는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위지은은 남자에게 저항을 해야만 했다.
“……근데 진짜 제가 언니로 보여요?”
“으그극, 혜매…”
“……으응.”
하지만 놀랍게도 위지은은 그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언니의 행세를 하며, 동경하던 연인의 모습을 흉내냈다. 남자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 큰 착각을 하고 있으니, 그녀로서는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소설에서 나오던 남녀의 사랑을 따라할 기회 말이다.
“……그, 그래요, 제가 혜매예요.”
“하아, 혜매… 윽…”
“평, 펴펴, 평소처럼… 마, 만져… 주실래요? 꺄아…”
“으음? 뭔가 빈약…”
“거, 거기 말고 엉덩이! 오늘은 엉덩이를 주물러 주세요!”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위지혜’가 되어 남자와 애정어린 몸짓을 교환했다.
소설 속의 여자 주인공처럼 남자에게 안겨 그의 체온을 느꼈고, 남자의 손에 애무당하며 야릇한 소리를 내뱉었다. 남자의 가슴팍에 자신의 젖가슴을 비벼 댔고, 남자의 쇄골을 핥으며 남자의 체액을 맛보았다.
“하아… 읏, 하아, 하앙…”
“혜매…. 윽…”
“배, 백랑… 하, 아앙… 츄, 츄읍… 하아…”
남자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대었고, 남자와 입을 맞추며 타액을 교환했다. 남자의 자지를 슬그머니 어루만지기 시작했고, 남자의 여자가 되어 그를 사랑해 주었다.
남자는 그녀가 정말로 싫어하던 색마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그녀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츄릅, 하아, 하… 백랑… 나 사랑해요?”
“으윽, 사랑합니다.”
“아, 아아, 백랑…”
“그래서 더는 못 참겠습니다!”
“꺄아앗?!… 아, 안돼요!”
….하지만 성욕으로 범벅이 된 남자가 그녀를 덮치려고 했을 때, 남자는 다시 끔찍한 색마가 되었고, 그녀는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미쳤어… 지금까지 대체 무슨 짓을… 어, 언니… 나 어떡해…”
호기심에 잠깐만 장난을 치려고 했던건데 입술까지 내주게 되다니… 경악한 위지은은 남자를 제압한 후 급히 자리를 떠났고, 그와 동시에 가주와 장로를 데리고 온 위지혜가 자신의 방에 도착했다.
***
“하아… 미친년, 미친년! 이래서는 내가 색마잖아…!”
방으로 돌아온 위지은은 조금 전의 사고를 떠올리며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잘 알지도 못 하는 남자에게… 그것도 임자가 있는 남자에게… 마치 연인인 것처럼 달라 붙어, 아양을 떤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자 손도 못 잡아 본 처녀가 성욕에 미친 색마처럼 행동하다니…! 자괴감으로 정신이 붕괴된 위지은은 침상에 누워 스스로를 자책했다.
“언니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해… 생각해 보면 그 남자, 아파서 끙끙거리던 환자였잖아… 그런데 그렇게 막… 그… 안겨서…”
“자… 자지를 만지고… 혀를 섞고… 서로 사랑한다고…”
“아니, 미친 소리 좀 그만해! 잠깐 홀렸던 거야! 그래 그랬던 거야. 그 남자가 상상을 초월하는 색마라서! 가까이 가면 음란해지는 거라고! 맞아, 그러면 이해가 가. 그러니까 그렇게 자지도 크고… 굵은 데다가…”
“아아아악! 진짜 정신 좀 차려어어!”
하지만 자책하는 것도 쉽지가 않은 일이었다. 처음 경험한 남자와의 음란한 행위가 계속해서 생각이 나 미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위지은은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산책을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드르륵
“은아야, 잠깐 시간 돼?”
그런데 그때, 지금 그녀가 두 번째로 만나기 싫은 사람이 그녀를 찾아왔다.
“어, 언니? 으응, 나 시간 많아.”
“후후, 그러니? 그럼 잠깐만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
“으응? 어, 어어… 당연하지… 그런데 무슨 할 말 있어…?”
“응. 백랑에 관해서야.”
“콜록콜록, 콜록, 케엑… 미, 미안… 뭐라고?”
“조금 전에 있었던 백랑의 일에 대해서 말할 게 있어서 말야.”
“………으응.”
위지은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언니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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