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초야권을 행사하는 영주님(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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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 불안한 표정으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아곤을 본 저는, 범죄를 들킨 죄인처럼 깜짝 놀라 읽고 있던 영주님의 편지를 황급히 안주머니에 숨겼습니다. 저렇게 피곤한 얼굴로 걱정을 하고 있는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가 보낸 편지에 가슴 설레어하다니요… 저는 정말 아내 실격입니다. 이래서는 안되는 건데…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은 저는 매일같이 기다리고 있겠다는 영주님의 말을 애써 무시하고는 표정 관리를 한 채 마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러자 아곤이 제게 달려와 아플 정도로 저를 가득 안아주었습니다.
“로지나… 로지나! 흑, 흐윽… 로지나아! 미안해… 흐으윽… 내가 정말 미안해…”
“아곤… 흑, 아고온…”
“다시는 너를 힘들게 만들지 않을 게… 로지나, 정말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당신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저는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을 가졌었답니다. 당신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요… 그러니 제게 미안해 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사과를 받을 자격이 없어요. 당신의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다른 남자를 생각한, 못난 여자란 말이에요… 그러니 제발 울지 말아요…
잠도 못자고 저를 위해 기도를 했을 아곤을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그리고 하루 사이에 야위어 버린 아곤을 보니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영주님께 깔려 앙앙거리며 아양을 떨 때 아곤은 밥도 못 먹고 저를 걱정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저를 사랑해주는 남자를 두고 흔들렸다니… 어쩜 이렇게 더러운 여자가 있을 수가 있나요. 저는 참을 수 없는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울지마 로지나… 너는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다 내 잘못이야. 흑, 으으… 로지나!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절대, 절대로…!”
하지만 제 사정을 모르는 아곤은 그저 자신이 잘못했다고 거듭 사과를 하며 저를 더욱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아아… 이건 마음까지 더럽혀졌던 저에 대한 벌인 거겠죠.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던 저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가슴을 할퀴는 괴로움을 받아들였습니다.
***
짐을 풀겠다는 핑계로 방으로 들어간 저는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영주님의 편지를 마구 구겼습니다. 다시는 그분을 떠올리지 않겠다는 저 나름의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아곤이 있는데… 더는 다른 남자를 생각하면 안되는 거니까요. 아곤이 없을 때 몰래 버리기 위해, 옷장 구석에 구겨진 편지를 숨긴 저는 너무나 평범한 일상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걸어나갔습니다.
그러자 아곤이 저를 위해 준비했다며 제가 좋아하는 애플파이를 대접해주었습니다. 아곤… 못난 저를 위해 이런 것까지 챙겨주시다니… 감동을 받은 저는 무척 기뻐하며 애플파이와 어울리는 홍차를 준비했습니다.
“미안… 이런 것밖에 준비하지 못해서.”
“아곤. 미안이란 말은 이제 그만하기로 해요.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요. 아니, 더는 생각하기 싫으니까요. 그러니 우리 이제 어제의 일은 잊고 앞으로만 생각하기로 해요.”
“로지나… 응! 그러자! 내가 반드시 행복하게 해줄게!”
어제의 일을 생각하면 또 흔들릴 수도 있으니까요… 아곤을 생각해서라도 더는 떠올리지 않는 게 좋겠지요. 제가 밝은 표정으로 미래에 대해 얘기하자 조금은 마음이 풀렸는지 아곤 역시 기쁜 얼굴로 제게 화답해주었습니다.
“그럼… 우리 우울한 얘기는 그만하고 티타임이나 가질까?”
“네에! 그게 좋겠어요!”
“으음. 역시 애니네 가게의 애플파이야. 언제 먹어도 맛있다니까.”
“으음? 그… 그렇네요. 아하하… 오랜만에 먹어서일까요. 더 맛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던 애플파이인데…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곤이 저렇게 맛있게 먹는 걸 보면 애플파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텐데… 이상하게도 저는 맛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로지나를 생각해서 더 맛있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어머, 그랬어요? 어쩐지… 아하하…”
그리고 사실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크하하! 알렉스의 요리는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왕도에서도 통할 요리사가 나를 위해 일해주는 건 고용인으로서 정말 행복한 일이지!’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그렇게나 맛있었던 음식들을 불과 하루 전에 만끽했었으니… 제 혀가 이 애플파이에 만족을 할 리가 없지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정말… 맛있어요. 고마워요 아곤.”
하지만… 그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습니다. 저를 위해 고생했을 아곤을 위해서라도, 저는 아무 맛도 없는 애플파이를 맛있다고 연기해가며, 입 안에 들어온 밀가루 덩어리들을 씹고, 또 씹어야 했습니다.
“너가 기뻐해서 다행이야…”
“아곤…”
영주님… 당신은 이것까지 예상하고 제게 그런 대접을 했던 건가요? 아니… 아니겠죠. 당신도 아곤처럼, 그저 제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싶었던 거겠죠. 하지만 어쩌죠…? 당신 때문에 앞으로의 제 일상이 망가질 것만 같아요… 떠올리기 싫어도 자꾸만 떠오르게 될 거 같아요… 다시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했었는데 말이에요…
짧다면 정말 짧았고, 길었다면 정말 길었을 영주님과의 하루가… 한여름 밤의 꿈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저는 제 삶 곳곳에 파고든 영주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들었던 이 옷이 더는 예뻐보이지 않는 것도, 행복한 미래를 꿈꾸게 만들어줄 이 집이 작게만 느껴지는 것도… 모두 영주님 탓일 게 분명하니까 말입니다.
“사랑해요…”
하지만 저는 무시하기로 했습니다. 저를 바라봐 주는 아곤은 여전히 사랑스러웠고,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 저는… 행복했으니까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제게 아곤이라는 축복이 온 것만 해도 엄청난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이상을 바라는 주제 넘은 생각 따윈… 하지 않을 겁니다.
작은 집에 있어도, 사치를 부릴 수는 없어도… 저를 사랑해주는 아곤만 있다면 저는 충분하니까요. 그러니 영주님에 대한 마음은… 고이 접어, 당신께 돌려드릴 겁니다.
***
더는 영주님을 떠올리지 않을… 좋은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영주님께 물들어진 제 몸을 아곤의 색으로 다시 칠하는 것입니다. 아곤의 사랑을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져서 다른 생각은 나지 않을 게 확실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영주님과의 섹스도 그렇게 기분이 좋았는데… 서로 사랑하는 아곤과 하는 섹스라면… 그보다 훨씬 더 기분 좋을 게 분명하잖아요? 그러니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는 영주님이 생각나지 않을 겁니다. 저에겐 아곤이 있으니까요.
똑똑
“로지나… 그… 들어가도 될까?”
“네… 들어오세요…”
먼저 몸을 씻은 제가 작은 침대에 앉아서 아곤을 기다리고 있자, 얼마 후 샤워를 끝낸 아곤이 방으로 찾아왔습니다. 타월로 하반신만 겨우 가린 채로 말입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대담한 아곤의 모습에 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습니다.
“그… 어차피 곧 벗을 거니까 말야…”
“그, 그렇네요… 아하하…”
하지만 동시에 조금, 아쉬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곤의 몸이 너무… 허약해 보였던 것입니다. 근육 하나 없는 왜소한 몸이 귀엽게도 느껴졌지만, 전혀 듬직하지 않아서… 조금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대로 몸을 맡겨도 되나… 하고 말입니다. 영주님께 안길 때는 정말 안심이 되었었는데… 초라해 보이는 아곤의 몸을 보니…
라니, 제가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남편과의 정사를 앞두고 다른 남자를 떠올리다니… 제가 정말 미친 걸까요? 무시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자꾸만 생각하게 되는 영주님이 원망스러우면서도, 자꾸만 아곤을 그분과 비교하게 되는 자신이 역겨웠습니다.
“그러면 저도 벗을게요…”
“으응… 그, 그래…”
그래서 저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아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정사를 시작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마지막으로 팬티를 벗고 있을 때… 제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아곤이 제게 달려들었습니다.
“미안, 로지나! 더는 못 참겠어!”
“아곤?! 자, 잠시만요…”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제대로 된 전희도 없이 자신의 자지를 제 보지 안으로 찔러 넣었습니다. 그 탓에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아랫배에서 느껴져 저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아아악! 잠시, 흑… 아악! 아파요… 아곤, 기다려요!”
아곤과의 섹스가 기분이 좋을 거라 생각했던 건… 저만의 착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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