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세실리아
* * *
“…리아?”
어쩐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더라. 지금 꿈 속인 거지? 현아가 세실리아의 이름을 꺼낸 것도 그렇고, 현실에서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그렇고, 지금이 꿈 속이라면 다 이해가 가는 일들이었다. 하하, 뭐 이런 꿈을 다 꾸냐.
“후훗. 맞아요. 아버지의 딸, 세실리아랍니다. 흐음, 여기가 바로 아버지께서 살고 있는 세계인 거군요?”
……라고 현실도피를 해보려고 했지만, 등 뒤에서 나를 안아주는 세실리아의 따뜻한 체온과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체향이,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이거 진짜 실화냐. 이게 다 실제상황이라고…?
‘히로인 네토리’ 속의 인물이 현실에 등장한 것도, 그리고 그 인물을 완전히 제3자인 현아가 알고 있는 것도, 다 진짜라고? ……이게 말이 되나?
“얘가 세실리아에요?! 뭐야. 외국인이잖아… 응? 근데 뭐…? 아버지? 오빠, 애 있었어요?!”
“현아야, 잠깐만…”
“잠깐이고 뭐고 빨리 대답해요! 오빠 돌싱이었어요? 도대체 몇 살 때 애를 만든 거에요! 이건… 어, 어어? 뭐냐고요 진짜아…!”
아니, 현아야… 지금도 충분히 혼란스러우니까 좀 가만히 있어주면 안될까? 사고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해서 뇌정지가 온 상황에서, 나 이상으로 쇼크를 받은 듯한 현아가 신발도 벗지 않고 내게 달려드는 바람에, 뒤에서는 세실리아에게 그리고 앞에서는 현아에게,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얘들아 좀 생각할 시간을 주라. 나도 아직 상황파악이 다 안 되었다고.
“흐음… 꽤나 시끄러운 분이네요. 아버지, 처리할까요? 이쪽 세계에서도 당연히 여자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아버지께 무례한 여자라면 용서할 수 없어요.”
“리아야, 잠깐만…”
“뭐, 뭐어? 야, 너! …가 아니라… 아, 이럴 땐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우으, 그, 세실리아? 잠깐 좀 나가있을래? 너네 아버지랑 얘기를 좀 해야겠거든?”
“후후… 나가있어야 할 분은 그쪽인 거 같은데요? 눈치도 없이 아버지와 딸의 시간을 방해할 생각인가요?”
아니아니, 분위기는 또 왜 이래? 안그래도 어지러워 죽겠는데, 이러면 나 곤란해. 여기서 싸우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에휴, 일단 어떻게든 멘탈을 붙잡고, 무슨 일이 터지기 전에 상황 정리를 좀 해봐야겠다.
“자, 둘 다 그만! 우리 차분하게 대화로 풀어보자. 응? 다들 지금 너무 흥분해 있어.”
“흥분 안 하게 생겼어요?! 오빠 여자 없다면서요! 없었다면서요! 그런데 얜 뭐냐고요…!”
“어머, 혹시 기억력이 없으신 가요? 제가 아버지의 딸, 세실리아라는 말을 분명히 들으셨을 텐데… 가엽게도.”
“너, 너어! 오빠 딸이라고 말 함부로 하는데, 새엄마 될 사람한테 말 그렇게 하면 너만 손해야!”
“……아버지, 이 분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요. 새엄마요? 후, 후훗, 후후후후… 망상증 환자이기라도 한 걸까요?”
얘들아… 침착하라는 내 말이 안 들렸니…? 어떻게든 둘을 진정시키려는 내 노력은 단번에 물거품이 되었고, 나를 두고 양쪽에서 기싸움을 하는 두 사람 덕분에 기절이 마려웠다.
세실리아야. 그렇게 비꼬는 건 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니. 아빠는 그런 걸 가르친 적이 없어요. 그리고 현아야. 너 지금 흥분해서 말이 헛나온 거 같은데 새엄마라니, 누가? 너가? 우리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 제발 정신 차려…
……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 했다. 솔직히 조금 쫄렸거든. 서로를 향한 공세가 내게 집중된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둘 다 진정하래도… 현아야, 다 얘기해줄 테니까 우선 신발부터 벗고 오자. 응? 그러면 전부 다 말해줄게. 그리고 리아야, 현아는 아빠 지인인데 그렇게 예의없이 굴면 안 되지. 응? 나를 생각해서라도 그러지는 마.”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었기에, 차례대로 두 사람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마주보며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얌전히 좀 있으라고 말이다.
“오빠는 가만히 계세요! 얘기 중이잖아… 아으, 으…? 하으으…”
털썩
으음… 그런데 얘는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 쓰러지라는 말은 안 했는데…급작스럽게 쓰러지는 현아를 안아준 다음 이유를 묻기 위해 뒤를 돌아보자, 세실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다시 한 번 내게 안겼다.
“제가 진정시켰어요. 후훗. 잘했죠?”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 기절시키는 세실리아…
무서운 아이…
***
[업적달성: ‘조연의 호감도 300 돌파’]
[조연 ‘세실리아 아실’의 호감도가 300을 초과하여 ‘세실리아 아실’을 현실에서 소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루 최대 1시간까지 소환 가능, 1분 당 1000포인트 소모) (세계관이 완결날 경우 시간 제한이 사라지고 소모 포인트가 1/100으로 줄어듭니다.)]
이게 영향을 준 건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알림창을 읽은 나는, 그제서야 세실리아가 꺼낸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영혼이 이어졌다고?”
“하아… 정말이랍니다? 아버지께서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신 후, 하으… 그 찰나의 순간에 아버지와 영혼이 이어진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어떻게 찾아왔냐는 나의 물음에 영혼 이야기를 꺼내길래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히로인 네토리’의 능력으로 세실리아를 소환할 수 있게 되면서 그녀와 영혼이 결속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세실리아가 내 좌표를 확인하고 이곳으로 차원이동을 할 수 있었고 말이다.
“하아… 아버지이…”
세실리아가 너무 천재라서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싶다. 정말 누구 딸인지 대단하다니까. 어깨가 절로 들썩여졌다.
“그럼 언제까지 있을 수 있는 거야?”
“으응… 이대로 아침까지는, 버틸 수 있어요. 후후… ”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건 아니었는데, 세계의 억제력인지 뭔지 때문에 거기에 마력을 쏟아부어야만 현실에 남을 수 있어서, 현재 보유중인 마력을 다 쓰면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아쉽네. 여기저기 구경시켜주고 싶었는데.”
“후훗. 이번이 끝이 아니잖아요? 하아… 아버지의 능력으로도 저를 부를 수 있다고 하니까… 하려던 일을 끝내면 꼭 불러주세요.”
“응... 물론이지.”
그런데 내 생각이 맞다면 이번에 세실리아가 로판 세계로 돌아갈 경우, 지금처럼 다시 자기 힘으로 찾아오지는 못할 거다. 내가 떠나 있는 동안은 세계가 정지되니까 마력을 다시 채우지는 못할 거 아냐.
따라서 세실리아를 현실에서 보려면 다음 부터는 내가 포인트를 써서 불러와야 한다는 건데… 이거, 로판 세계의 끝을 볼 이유가 생겼다. 하루에 한 시간이면 너무 적잖아. 감질맛 나서 어떻게 견디냐고…
빨리 생각했던 것 만큼 강해진 다음, 로판 세계로 돌아가서 S등급을 찍어야겠다.
“그런데, 리아. 지금 얼굴이 그렇게 좋아?”
“하아… 그럼요… 젊은 아버지라니, 너무 좋아요… 중후한 매력도 정말 좋았지만 이렇게 야성적인 매력도… 하읏, 죄송해요. 얼굴을 보는 속물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지금의 아버지는 반칙이에요…”
지금처럼 평소보다 훨씬 흥분한 채로, 나에게 달라 붙은 다음 거친 숨을 내쉬면서,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세실리아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
좋아 이제 가장 큰 의문점은 해결이 되었으니, 다음 의문점을 해결 할 차례인데… 세실리아에 의해 쓰러진 현아가 일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이거, 뭐 큰일난 거는 아니지?
“후후, 걱정 마세요. 정신이 불안해보여서 잠시 수면을 취하게 한 것뿐이에요. 강제로 깨울 순 있지만… 하아, 조금만 더 이렇게 아버지와 붙어있고 싶어요. …안 될까요?”
혹시나 싶어 세실리아에게 물어보려고 했더니, 그녀가 묻기도 전에 대답하고는 글썽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이거야말로 반칙이잖아. 이러면 거절을 못 한다고.
“리아… 착하지? 이 일만 끝내면 아침까지 사랑해줄 테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서 도와주렴.”
“싫어요… 1분 1초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내게 올라탄 다음 내 품에 안겨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세실리아가 정말 귀여우면서도, 고집을 부리며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내 딸이 걱정스러웠다. 사춘기인가? 뒤늦게 반항기가 온 거야? 이런 적은 없었는데…
하지만 다행히도 이어지는 내 말을 들은 세실리아는, 다시 착한 효녀로 돌아와 기쁜 마음으로 현아를 깨워주었다.
“리아가 현실에 있는 동안 네 동생이 되어줄 사람인데, 언니가 양보해야지. 안 그래? 그러니까 아빠 말 좀 들으렴. 응?”
언니 취급 해주니 좋아하는 세실리아…
귀여운 아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