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로맨스 판타지(34)
* * *
제발 뭔가 계획을 세웠으면 먼저 나한테 말을 해주면 좋을텐데… 나는 약혼 이야기를 꺼낸 세실리아에게 당황스러운 얼굴로 설명을 요구했다.
“약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도 오베르 양에게 마음이 있지 않나요? 치료를 빌미로 그 분을 만져댄 것도 그 때문이잖아요.”
“그건…”
“후훗. 오베르 양도 아버지를 사랑하세요. 그런데 지금 그 일로 서로 약간은 어색한 사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두 분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줄 생각이었답니다. 바로 이번 방학 때 오베르 가문의 저택으로 놀러가는 거지요!”
“놀러 가자고?”
“네에! 거기서 두 분의 사랑도 확인하고 내친김에 가주님에게 약혼도 허락받는 거에요! 어떤가요? 후후 괜찮은 생각이죠? 고작 둘째 부인 때문에 이런 수고를 한다는 게 조금 괘씸하긴 하지만… 그래도 오베르 가문의 힘을 얻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귀찮음이에요!”
으음, 약혼이라… 나쁘지 않은데? 어차피 루이나 오베르를 곁에 둬야 하는 상황에서 약혼은 꽤나 괜찮은 선택지였다.
세실리아와 결혼할 때까지 루이나 오베르에게 접근하는 날파리들을 처리할 수도 있고 세실리아의 말처럼 약혼을 통해 오베르 가문의 지원을 얻을 수도 있다.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볼 게 없는 장사였다.
그렇다면 이게 가능하냐의 문제만 남은 건데…
“루이나 양과 이야기는 된 거야? 둘째 부인은 또 무슨 소리고.”
“후훗. 당연히 오베르 양과 이야기를 끝내고 드리는 말씀이에요. 오베르 양은 이미 아버지께 푹 빠져있답니다. 그러니 그 누구보다 나서서 가주님을 설득할 거에요.”
“그, 그래?”
“그리고 당연히 제가 첫째 부인이니 오베르 양은 둘째 부인이 되는 거죠.”
“하지만 그걸 가주님이 받아들이실까? 자기 딸을, 애도 있는 아저씨의 둘째 부인으로 만드는 거잖아. 말을 꺼내자마자 노발대발할 거같은데… 첫째 부인은 누구로 할 생각이기에 비어두냐고 화도 낼 거고…”
“후후후, 괜찮아요. 아버지잖아요. 가서 가주님께 보여주세요. 아버지가 얼마나 멋진 남자인지를요. 그 분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면 인정하시겠죠. 이 남자라면 믿고 오베르 양을 맡길 수 있겠다고요!”
내가 머뭇거리며 걱정을 담아 의문을 표하자 세실리아가 상냥하게 웃으며 나를 치켜세웠다. 내가 거절당할 거라는 의심은 하나도 하지 않는 신뢰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솔직히 양심이 찔렸다. 약간… ‘해줘’ 마인드였거든.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도와달라는 의미에서 꺼낸 걱정의 말이었다.
아니, 오베르 가문의 가주면 왕도에서 딸바보로 유명한 사람이란 말야. 그리고 빙의 전의 ‘덕배 아실’과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란 말야. 그러니 생각을 해 봐. 옛 친구가 갑자기 찾아와서 자기 딸이랑 결혼을 약속하겠다는데 그걸 참아? 그리고 첫째 부인도 아니고 둘째 부인이라는데? 어우, 상상만 해도 끔찍하잖아.
……하지만, 그렇게 변명하고 도망치는 것도 참 못 할 짓이었다.
세실리아가 이렇게까지 나를 믿고 사랑해주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찌질하게 살 생각이야. 꼴사나운 모습 좀 그만 보여주자고.
생각해보면 항상 시우를 욕한 주제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매번 시우처럼 행동했던 나였다. 소심하고 줏대없고 남한테만 기대고… 이건 좀 아니잖아.
이제는 바뀌어야지.
그럴만한 능력도 얻었고 여유도 생겼다.
달라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알겠어.”
이번의 일도 내가 책임지는 게 맞았다. 결국 한꺼번에 두 명을, 아니 그 이상을 품겠다고 결정한 건 나잖아? 그러니 내가 나서야지. 딴 사람에게, 특히 세실리아에게 맡기는 건 정말 꼴불견이었다.
“리아, 보여주고 올게.”
“후훗, 믿고 있을게요!”
대답을 마친 나는 환하게 웃고 있는 세실리아를 품에 안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내 딸이 나를 응원해주고 있잖아, 그러니 실망시킬 순 없지. 그녀를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계속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나는 결심했다.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지금 당장 오베르 가문의 가주를 설득할 자신은 없었다. 내가 뭐 가진 게 없잖아. 능력치도 제한당한 상황에서 무력을 뽐낼 수도 없고 인맥은 좀 있었지만 결국 몰락한 귀족인데 그 유명한 오베르 가문의 여식과 맺어지기에는 급이 많이 낮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세실리아도 얘기했던 건데, 공주를 함락시키면 모든 게 해결되었다.
오베르 가문의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왕족 아래잖아? 그런데 만약 그 왕족이 내 아래에 있다? 그러면 나를 쉽게 무시할 수 없게 되는 거다.
거기다 만약 세실리아의 말대로 공주를 내 셋째 부인으로 만들게 되면 둘째 부인이 될 루이나 오베르가 공주 보다 더 위에 서게 되는 건데, 그걸 오베르 가문의 가주가 싫어할 리가 없었다.
따라서 나는 무조건 공주를 내걸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우선 미사부터 완벽하게 함락시켜야겠지.
일과를 마친 나는 오늘도 기사의 안내를 받고 크로젯 저택으로 향했다. 그리고 설레는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미사를 데리고 밀실로 들어갔다.
조교의 시간이었다.
***
어제의 일도 있었기에 조금은 어색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미사는 오히려 어제보다 더욱 경계가 풀린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공주와 같은 편에 서기로 약속을 해서 그런지 나를 굉장히 신뢰하는 듯했다.
“아실! 기다리고 있었어!”
덕분에 그녀의 꼬리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데 그게 정말 귀여웠다. 이게 반가움의 뜻이었나?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꼬리를 만지자 미사가 귀여운 소리를 내뱉었다.
“하우웃! 꼬리는… 안되는데…”
“아, 실례했습니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손을 떼려고 했더니 미사가 재빨리 내 손목을 잡고는 깜찍한 말을 꺼냈다.
“아실은 특별히 만지게 해줄게… 내 주치의니까 말야!”
같은 편에 서기로 한 거지 주치의가 된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는 이번 기회에 미사의 꼬리를 만끽했다. 적당히 부드러운 털과 뭉특한 그립감에 하루종일 만지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햐앙… 조금 더 세게… 만져도 되는데… 흐으으읏.”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미사가 조금 가버리고 말았다. 설마 꼬리가 성감대 중 하나인 건가? 관측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하아… 아실의 손… 너무 좋아…”
아하, 그냥 거의 함락당해서 그런 거구나. 발정했을 때 내 손에 잔뜩 가버린 걸 몸이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공주 함락까지의 첫 단계는 오늘 안에 깰 수도 있을 거같다.
***
“하복부에 퍼진 저주는 어제 모두 해주를 했습니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상처를 치료하는데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어…? 으응, 알았어.”
나는 잔뜩 만져댄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치료에만 집중했다. 우선 상처를 완전히 치료해야 박을 수 있었기에 치료가 급선무였다. 꼴린다고 먼저 박아대다가 상처가 덧나면 일이 더 귀찮아 질 수 있었다.
“하으… 저기, 그럼 계속 이렇게 여기만 만지는 거야?”
“이제 다른 곳을 치료할 필욘 없으니까요.”
“그렇구나…”
그리고 여기엔 또 하나의 효과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애태우기다. 역시 줬다 뺐는 게 효과가 가장 좋은 법이거든. 몸이 기억하고 있는 짜릿한 자극을 주지 않으면 않을수록 미사는 더욱 더 내가 주는 자극을 원하게 될게 분명했다.
“으음… 근데 또 저주가 퍼지진 않았을까? 하루 사이에 퍼졌을 수도 있잖아.”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아까 다 확인을 했는데, 저주가 다시 넘친 곳은 없었습니다.”
“아쉽, 이 아니라, 다행이네…”
이렇게 말이다.
혹시나 하는 그녀의 기대가 무너지자 미사의 표정도 무너졌는데, 그녀의 강아지 귀도 함께 축 처지는 게 정말 귀여웠다. 이거 넷째 부인도 생각을 한 번 해봐야겠는 걸? 마스코트 같은 느낌으로다가 말야.
……잠시 생각을 해봤는데, 나쁘지 않은 거같다.
“혹시 미사님…”
“어, 으응? 왜?”
“어제처럼 그곳을 만져주길 원하시는 건 아니겠죠? 분명 저는 어디까지나 치료라고 말씀 드렸는데도 말이지요.”
“아,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렇습니까? 흐음, 그럼 알겠습니다. 혹시 원하셨다면 민망함을 무릅쓰고 만져드릴 의향도 있었지만, 그런 건 아니었군요.”
“뭐어?! 사실 거짓말이야!”
그런데 이건 뭐, 제대로 애태우기도 전에 이미 함락당한 상태다. 수인이라서 그런건지 성욕이 상당히 강한 듯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끄는 건 고문에 가깝겠지. 나는 애태우는 걸 멈추고 질질 끌던 상처를 단번에 치료한 후 미사와의 본방을 준비했다.
“음? 사실이 거짓말이라니요. 꽤나 철학적인 이야기군요.”
“그게 아니라! 그게… 실은 만져줬으면… 해서…”
“음?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듣질 못했습니다. 조금 더 크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어제처럼 만져달라고!”
“이렇게 말입니까?”
“햐아아앙! 맞아… 그렇게에!”
당연하게도 그녀의 보지는 이미 잔뜩 젖어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