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로맨스 판타지(33)
* * *
설마… 테러라도 일어난 건가?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끔찍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공주가 왕도에 들어온 것을 노리고 그녀의 정적이 수작을 부린 걸지도 몰랐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나는 미사를 데리고 재빨리 건물 밖으로 달려갔다.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던 공주가 위험했다.
“미사님! 저는 괜찮으니까 먼저 가서 공주님을 지키세요!”
“응! 알겠어!”
지금 이 저택엔 공주 개인의 호위 기사단도 있고 크로젯 가문의 기사단도 있다. 무력만 놓고 봤을 땐 현재 여기가 왕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안전한 장소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눈 뜨고 코 베이듯 공격을 허락했다는 건 분명 한 두명이 쳐들어온 게 아니란 뜻이었다.
젠장, 아직 손도 못 대봤는데… 이대로 공주를 잃을 순 없다. 이제 막 빌드업에 들어갔는데 이런 식으로 기회를 놓치게 되면 너무 억울하잖아.
그러니 막아야 한다. 아직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진 모르겠지만, 그 누구도 공주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 그래야 그녀를 따먹을 수 있다.
타닥타닥!
나는 공주를 함락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온 힘을 다해 달려나갔다.
***
그래, 그렇게 열심히 달려나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랬는데… 현장에 도착한 나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놀랍게도 침입자는 단 한 명으로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아…! 아버지! 무사히 계셨군요!”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고 있어야 할 세실리아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카데미 밖으로 왕진을 나가는 건 한 두 번 있던 일이 아니었다. 내가 의사가 되었다는 소문이 왕도에 퍼지면서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기에, 인맥과 금전을 위해 이미 여러 번 출장을 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과 같은 일은 내게 평범한 일 중 하나였다. 절대 이렇게 세실리아가 찾아와 난리를 피울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그걸 세실리아도 분명 잘 알텐데… 그럴텐데… 오늘의 그녀는 조금 이상했다. 평소라면 양호실이나 내 방에서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텐데, 오늘은 마치 내가 납치라도 당한 것처럼 폭주를 했다.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달려온 세실리아를 안아주며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가 만들어낸 참상을 구경했다.
마당 곳곳에 생겨난 구덩이, 이리저리 널브러진 건물의 파편, 참혹하게 망가진 정원의 꽃과 나무… 왕도에서 아름답다고 유명한 크로젯 가문이 완전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날 내게 찾아온 란스라는 기사와 아카데미로 찾아온 미남 기사를 필두로 각각의 기사단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마치 전쟁이라도 겪은 것처럼 말이다.
그 탓에 즐겁게 티타임을 가지던 크로젯 부인은 창백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했고 호위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공주는 정색을 하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곁에 있는 미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꼴을 만든 게 세실리아 혼자라는 거지? 당연히 테러집단이 쳐들어온 건 줄 알았는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세실리아보다 그녀 혼자서 이 끔찍한 상황을 만들었다는 게 더욱 충격적이었다. 강하다는 왕국의 두 기사단도 그녀 앞에선 어린 아이나 다름 없었다.
우리 딸 엄청 강했구나. 아빠는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단다. 이제 다 컸구나.
감동을 해야 하는 건지,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칭찬을 해야 하는 건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 포기하고 현실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상황이 말도 안 되게 복잡했다.
“아버지… 다행이에요! 정말로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그래… 무사하다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지. 왜 그렇게까지 걱정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걱정해줘서 정말 고맙단다. 그런데 아무래도 계속 걱정을 해줘야 할 거같아. 자칫하다간 공주의 목숨을 노렸다는 걸 빌미로 반역죄로 처단당하게 생겼거든.
내가 상당히 좆됐음을 감지하고 이걸 어떻게 해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분.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공주였다.
***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정말 다행히도 아무런 문제 없이 넘어갔다. 말도 안된다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알고보니 서로가 잘못한 점이 있었기에, 그리고 앞으로 서로 척지어서 좋을 게 전혀 없었기에 극적으로 타협된 결과였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나를 찾아온 미남 기사, 그 새끼가 이 사건의 원흉이었다. 왜 그 놈이 보안 얘기를 하지 않았나. 그게 바로 세실리아가 만든 감시망을 부서뜨리면서 한 말이었다. 에라이 썩을 놈.
그 덕에 시야에서 사라진 내가 납치당했다고 오해한 세실리아가 나를 구하러 왔고, 흉흉한 기세의 그녀를 위험인물이라 착각한 공주의 기사단이 그녀를 막으려 들다가 싸움이 일어난 것이었다. 크로젯 가문의 기사단은 상황을 중재시키려다 휘말리게 된 거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공주의 부하가 먼저 잘못을 저질렀기에 세실리아의 폭주는 어느정도 참작이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떻게 그게 잘못이냐며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 감시망을 설치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는 공주의 의문이 있었지만, 효녀니까 당연한 거라는 크로젯 부인의 의아한 변호 덕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당연한 건가? 잘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었다.
다만 여전히 공주가 반역죄를 걸고 넘어지면 귀찮아질 수 있는 상황, 거기서 공주는 오늘의 일을 없던 일로 해주는 대신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저질스러운 오라버니가 이 나라의 왕이 되어선 안 되는 거잖아요. 도와주세요.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제게 힘이 되어주세요!”
듣자하니 왕자가 게이라는 소문이 왕도에 퍼지면서 후계자를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귀족들 사이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 기회에 자신의 세력을 늘려 왕자에게서 후계 자리를 뺏어올 생각이라고 했다.
자기도 레즈면서 말이다. 이거 완전 내로남불아냐.
아무튼 그래서 일단은 알겠다고 했다. 위기는 넘기고 봐야지. 그렇게 어느 정도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의견을 주고 받은 끝에 오늘의 사건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만들고 끝낼 수 있었다.
***
“죄송해요 아버지… 제가 오해하는 바람에 큰일이었죠?”
“죄송할 게 뭐 있어. 걱정해서 그런 거였잖아. 오히려 고맙지.”
“하지만 저 때문에 공주님의 부하가 된 거잖아요… 차라리 다 죽일까요? 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명령을 받는 건 싫어요. 그냥 이대로 짜증나는 것들을 다 없애고 떠날까요?”
아니 그건 좀… 숨기고 있던 힘을 들켜서인지 세실리아가 상당히 과격해졌다. 이제 내숭없이 전력을 다해 나를 사랑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무서운 말을 꺼내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세실리아의 말랑한 볼을 어루만져주면서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괜찮아. 공주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있거든.”
“…역시, 아버지! 그 훌륭한 자지로 공주님마저 정복하실 생각이시군요!”
어…? 어떻게 알았지. 그, 맞긴 한데. 그렇게 대놓고 말하니까 조금 그렇네. 귀여운 얼굴로 당당하게 훌륭한 자지라고 말하는 걸 보니 묘한 배덕감이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대단하세요! 공주님까지 노리다니! 공주님을 자지의 노예로 만들고 그 분의 힘으로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가실 생각인 거죠? 역시…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알고 계셨군요.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자리를요!”
“으응…?”
“그렇게 저희의 사랑을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자리에 올라가서 저희의 결혼을 선언하려는 거죠? 아아… 로맨틱해! 아버지의 사랑에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너무나도 행복해요…!”
아니 뭔, 오늘 진짜 왜 이래. 공주를 함락시키고 부하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세실리아가 그 이상의 것을 말했다. 오히려 내가 공주의 도움을 받고 왕이 되라고? ……내가 왕이 될 상인가?
…평소였으면 개소리라고 넘어갔을텐데, 오늘 세실리아의 무력을 보고 나자 마냥 헛소리만은 아닐 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진짜 가능한 거 아냐? 공주 말마따나 후계가 개판이 된 상황에서 귀족들의 지지만 얻을 수 있으면 가능한 거 아니냐고.
공주의 세력을 흡수하고 반대하는 귀족들을 세실리아가 처리하면… 아, 이거 뭔가 느낌이 오는데. 생각보다 할 만하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후훗. 안그래도 아버지와 오베르 양의 약혼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잘됐군요. 공주님을 셋째 부인으로 만든다는 얘기를 들으면 오베르 가문의 가주님도 오베르 양을 둘째 부인으로 만드는 것에 동의하실 거에요!”
아니 근데 약혼은 또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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