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 로맨스 판타지(30)
* * *
[……그러니 제게 힘을 빌려주시겠어요? 당신의 친구로서 당신의 능력이 필요해요. 대가없는 부탁은 아니니 부디 도움을 주시길 바라요.]
마리 크로젯, 내게 아카데미 추천장을 써 준 그 공작 부인이 내게 보낸 편지에 적힌 내용이다. 그녀는 지금 당장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있다면서 내게 왕진을 요청했다. 깔끔한 복장에 잘생긴 얼굴을 한 기사를 통해서 말이다.
으음, 원할 때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말은 했지만 이렇게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너무 갑작스럽네.
“그럼 이대로 당신을 따라가면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크로젯 부인의 부탁을 거절 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안내해주세요.”
“그럼 모시겠습니다.”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지. 크로젯 부인은 몇 안 되는 내 소중한 인맥 중 하나인데 절대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베르 가문 정도는 아니지만 크로젯 가문도 충분히 이름 있는 가문이라고. 호감 스택을 만들어 두는 게 무조건 이득이다. 그리고 보상이 없는 것도 아니라잖아? 분명 귀중한 선물을 줄 터… 그러니 무조건 하는 게 맞았다.
“좋습니다. 바로 가시지요. 저는 이 가방만 들면 준비 끝입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의사치고 굉장히 간단한 차림새입니다만… 단순한 진료만을 위해서 가는 게 아니란 걸 제대로 알고 있는지요.”
“물론이지요. 저를 평범한 의사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그 때문에 저를 찾은 거 아닙니까.”
“이런, 실례했습니다. 제가 주제넘었군요.”
“아닙니다. 걱정이 되면 의심을 할 수도 있는 일이지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과연… 아실님은 소문 대로의 분이시군요.”
내가 적당히 입에 발린 소리를 해주자 미남 기사가 눈웃음 지으며 크게 감탄했다. 새끼, 얼굴 좀 치네. 이거… 얘도 꽤 비중이 있는 조연인 건가? 관측으로 정보를 캘 수 없는 것도 그렇고 잘생긴 얼굴도 그렇고 무언가 심상치가 않다. 크로젯 가문의 저택에서 잠깐 지낼 때는 보지 못했던 기사인데, 아무래도 위중하다는 환자와 관련된 사람인 거같다.
잠깐, 그렇다면 지금 만나러 갈 환자도 꽤나 중요한 인물이라는 건데… 이거 마음의 준비를 제법 단단히 해놔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실님. 양호실 보안이 생각보다 엉망이군요.”
“음? 그렇습니까? 딱히 보안에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진심으로 드리는 충고이니 치료가 끝나면, 보안팀을 불러 한 번 검사를 해보시길 바랍니다. 분명 문제가 있을 겁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신경 써서 나쁠 건 없지요. 충고 감사합니다.”
근데 얜 갑자기 왜 이러냐. 보안에 문제가 있다니 말이 안 되는데? 세실리아라는 감시망이 있는데 보안에 문제가 있을 리가 없잖아. 아마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낸 쓸데없는 말이겠지. 기사라서 그런지 언변이 부족한 듯 보였다.
***
아… 이건 뭔가 잘못된 거같은데. 나를 부른 사람이 얘라고? 음…
기사의 안내를 받고 크로젯 저택의 별관으로 들어갔더니, 모두의 위에서 만인을 내려다보는 태양처럼 강렬하고 붉은 머리카락과 자신이 고귀한 핏줄이라는 걸 알려주는 금빛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당당한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공주님께서 저를 찾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 만났지만 얼굴을 보자마자 그녀가 공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왕국의 왕자와 공주는 쌍둥이거든. 아카데미 안에서 흉흉한 소문이 도는 그 인간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모르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얘가 왜 왕도에 있지? 후계자 경쟁에서 밀린 이후, 왕도를 떠나 그때 생긴 스트레스를 이민족 사냥으로 푼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내가 의문을 담아 인사를 건네자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게 대답했다.
“아실, 만나서 반가워요. 그 유명했던 당신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는군요.”
“저야말로 만나서 영광입니다. 과연 왕국의 보석이시군요. 눈부신 미모에 눈이 멀 거같습니다.”
“그만. 아첨을 별로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라. 그보다 상황이 급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실례했습니다.”
과연 성격이 호쾌하고 남자답다더만 소문대로네. 대놓고 칭찬을 해도 표정하나 안 바뀌고 말야. 쿨한 모습에 호감이 갔다. 근데 진짜 이쁜데 말야. 로판 세계의 왕족답게 외모가 열일하는 중이라고. 어쩌면 외모 칭찬을 너무 많이 들어서 무덤덤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실. 당신의 소문을 듣고 단숨에 왕도로 돌아왔어요. 당신의 능력이 필요해요. 저를 도와줄 수 있으신가요?”
“물론입니다. 공주님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공주로서의 부탁이 아니에요. 그대가 바라는 왕족의 호의를 드릴 수는 없어요. 이건… 엘리제로서의 부탁이에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하하. 저를 너무 속물로 보는 거 아닙니까? 보상이 무엇이 됐든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주님께서 챙겨주시지 않아도 크로젯 부인이 챙겨주실 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과연… 대모님의 말대로군요. 좋아요. 그럼 잘 부탁드려요.”
보상? 물론 중요하지. 근데 그것 보단 왕국의 공주를 만질 수 있다는 게 더 중요하다. 그것도 합법으로 말이다. 이 쿨한 공주님의 입에서 달콤한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다른 건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아, 기대되네. 오랜만에 설레는 순간이다.
“미사 이제 나와도 돼. 이 사람이 너를 치료해주실 거란다.”
“아, 이 분은…?”
“제 소중한 친구입니다. 그런데 이번 원정에서 그만 큰 상처를 입어서… 급하게 의사나 힐러들을 찾아봤지만 아무도 이 아이를 치료하지 못하더군요. 그러다 아실, 당신의 소문을 듣고 이렇게 찾아오게 된 겁니다.”
그러고보니 공주가 아프다는 소리는 한 마디도 안했었지… 너무 흥분해서 착각해버렸다.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네… 그래도 미사라는 여자 아이도 공주 못지않은 미인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순수하고 커다란 눈망울과 딱 봐도 말랑말랑해보이는 깨끗한 피부, 그리고 갈색 머리카락 위에 솟은 강아지 귀… 강아지 귀?! 잠깐, 얘 수인이야? 다급히 시선을 아래로 돌리자 땅으로 축 처진 꼬리가 보였다. 진짜 수인이잖아! 이 세계에 존재한다고 말은 들었지만 왕국에선 보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설마 공주가 데리고 있었을 줄은… 정말 충격의 연속이다.
“혹시 수인이라고 생각이 바뀌었다든가 하는 건 아니죠?”
이런, 당황해서 표정관리를 못했더니 공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니 딱히 거절할 생각은 없는데 말이지. 차별이라도 많이 당해서일까? 지레짐작으로 실망한 기색이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공주님의 친구분이신데요. 으음, 호오…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상처 안에 리치의 저주가 담겨있군요. 정말 고통스러울텐데 아픈 기색 하나 보이지 않으시다니 미사님도 대단한 분이셨군요.”
“그런…! 과연 대모님이 추천해주신 분 답네요. 설마 환부를 직접 보지 않고도 거기에 담긴 저주까지 알아차리실 줄은… 믿음이 갑니다.”
그야 얘가 아파서 그런 건지 너랑 다르게 관측이 통하거든. 하복부에 있는 자상과 거기서 흘러나오는 새까만 리치의 저주가 내 눈엔 똑똑히 보인다. 이거… 치료하면서 재미 좀 보겠는걸? 치료 대상이 공주가 아니라 실망했지만 수인이라면 또 다르지.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하하. 별 거 아닌 재주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치료도 가능하신 겁니까? 이래 봬도 이 아이는 제 전속 호위 기사, 다시 전선에 나설 수 있을 정도로 온전한 회복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귀엽게 생긴 아이가 호위 기사라고? 수인이라서 전투 능력이 뛰어난 건가? 전혀 강해보이진 않는데… 하지만 여긴 로판 세계잖아. 생긴 거로 능력을 판단해선 안 된다. 치료 중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마음껏 만져대려고 했는데… 적당히 눈치를 보면서 만져봐야 겠다.
“물론입니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이 정도의 상처와 저주라면 충분히 치료하고 해주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아… 신이시여…”
이보세요. 신이 아니라 나한테 감사해야죠.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치료가 가능하다는 얘길 들어서인지 공주가 무릎을 꿇더니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미사라는 아이가 안아주더니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뭔가 그림이 재밌네. 내 앞에서 무릎꿇은 공주와 그녀와 함께 기뻐하는 수인이라. 기회만 됐다면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성스러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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