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로맨스 판타지(29)
* * *
“응흐흥~ 흐흥~”
“루이나?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응? 후후… 그냥. 정말 아름다운 날이잖아.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이런이런. 남자친구가 생긴 이후로 흘러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서 정말 큰일이다. 항상 교양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자꾸만 나도 모르게 웃게된단 말이지… 후후.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더니 정말 말 그대로다.
하지만 참기 너무 어려운 것도 팩트라고.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그렇게 바랐었던 첫 남자친구인데… 이렇게 매일 설렐 수밖에 없잖아. 모솔탈출이라구!
가만히 있어도 계속 그이의 얼굴이 떠오르는데 웃음을 어떻게 참아… 생각만 해도 행복한데 말야. 그러니 당분간은 어쩔 수 없지만 바보 모드다.
“응. 그건 그렇네. 날씨 되게 좋다.”
“그치? 후후.”
“저기… 날씨도 좋아서 말인데… 오늘 수업 끝나고 시간 있어?”
“응? 아니.”
“어? 그, 그래?”
“응.”
이제 막 남친이 생긴 여자한테 시간이 있겠니? 당연히 약속이 있지. 또 한 번 양호실 데이트를 할 예정이라구. 그걸 위해서 오늘은 직접 도시락도 준비했다? 후후 아마 엄청 좋아하실 거야. 최고급 재료로 만들었거든.
“……치료는 어제 아니었어?”
“치료 아니야. 근데 너가 알아서 뭐하게. 네 일 아니니까 신경 끄렴.”
“어… 으응…”
근데 얘는 진짜 자꾸 질척거리네. 아직도 감이 안 오나? 매일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하는데 아직도 눈치를 못 챘나? 나 너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어. 아니 있긴 한데 호감보단 불호에 더 가까워. 그러니 이제 좀 거리를 두면 안 되겠니? 이러다 오해라도 사면 어떡해. 그이가 착각할텐데. 괜한 일로 걱정하는 그이의 모습을 보고싶진 않다구.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안녕.”
“으응… 잘가.”
흐으으음, 한 번만 더 들이대면 그냥 밝혀버릴까? 설마 남친이 생겼다는 걸 듣고 나서도 저러진 않을 거 아냐. 그래도 사람은 착하니까 말야.
그래 그래야 겠다.
***
물론 지금의 관계가 비정상적인 건 나도 안다. 이용당하기 위해서 사귀는 거잖아? 분명 끝이 좋지 않을 거다. 결혼한다고 해도 그 마녀가 그이를 독차지 할 거고 나는 밖에서만 그이의 아내 행세를 하게 될 거다.
하지만, 그래도 그이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걸… 그 독한 마녀의 암시도 극복할 정도로 나를 생각해주는 걸. 그러니 이겨낼 수 있다.
그리고… 모두에게 서로 사랑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건 그 마녀가 아니라 바로 나잖아? 후후후. 그러면 된 거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기죽지는 말자. 눈앞의 세실리아 아실이 무섭기는 하지만 겁 먹을 이유는 없잖아. 어쨌거나 한 배를 탄 상황이야. 당당해지자.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온 걸까? 빨리 그이를 만나러 가야하는데…
“오베르 양. 혹시 지금 아버지와 사귀고 있다는 엄청난 착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죠?”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일까나?
***
죽자. 그냥 죽자. 깔끔하게 죽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야. 햐하햐햐햐하하. 하하하. 하…… 부끄러워 죽을 거같아…… 꺄아아아아악!
“그러니까 아버지는 사과만 하셨지 사귀자는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어요. 사랑한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죠. 그러니 두 분이 사귀고 있다는 건 어불성설인 거에요. 아시겠어요?”
“……두 번 설명하지 않으셔도 이미 이해했답니다. 그렇군요. 제 착각이었군요. 아하하… 하아…”
다짜고짜 나를 찾아온 그녀가 꺼낸 말, 나는 아직 그이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그렇다 나는 혼자서 착각을 한 것이다. 최대한 잘 쳐줘도 썸을 타는 사이인 거지 그가 내 남자친구가 된 건 아니었다. 히이잉… 단번에 기분이 나락으로 추락했다.
왜 나는 사귄다고 생각한 걸까? 뭐? 모솔 탈출? 전혀 아니었잖아! 전부 다 상상 연애였잖아! 그이는 그냥 나를 위로해준 거 뿐이었잖아! 암시를 이겨낼 정도로 나를 사랑하고 그런 게 아니었잖아! 아 진짜!
나 어떡해…
다정하게 안아주길래 당연히 이대로 사귀는 건 줄 알았는데 모솔의 착각이었다. 제길! 연애만 해봤어도 이런 창피를 당하진 않았을텐데! 서러움에 눈물이 날 거같았다. 어흐흑…
“따라서 정성스럽게 연애편지를 써서 몰래 책상 위에 둔다든가, 남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거라는 것마냥 당당하게 팔짱을 낀다든가, 치료를 끝내고 수고했다면서 가볍게 키스를 한다든가, 그리고 지금처럼 직접 싸온 도시락을 준비한다든가 하는 애인이 할 법한 행동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에요.”
“……두 번 설명하지 않으셔도 된다니까요?”
“어머. 중요한 얘기라서 그만. 후훗. 그래도 이제라도 아셨으니 다행이네요.”
그만둬… 내 HP는 이미 0이라고… 꼭 그렇게 확인사살을 해야 해? 착각이었지만… 남자친구가 생긴 줄 알고 엄청 설렜었단 말야. 그래서 항상 꿈꿔오던 일을 하려고 했던 거란 말야…
그런데 사실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 그가 나를 보고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 쥐구멍 마렵다. 그때보다 더 한 수치심에 너무나도 괴로웠다.
…잠깐, 근데 생각해보면 이거 이 마녀 탓 아냐? 우리 분위기 되게 좋았단 말야. 얘가 개입만 안 했으면 그대로 사귈 수 있었던 거 아냐?
“혹시 또 착각하실까봐 말씀드리는 건데, 그날 제가 오지 않았어도 아버지와 사귈 수는 없었을 거에요. 설사 마음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간단히 학생과 사귈 분이 아니시니까요.”
칫. 그거야 또 모르는 거잖아. 암시도 완벽한 건 아니더만… 하지만 이렇게 불평해봐도 이제와서 바뀌는 건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지금에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해야지… 그런 점에선 오히려 이 사실을 알려준 마녀가 고마웠다.
“후훗. 오베르 양. 너무 상심하진 마세요. 그래서 제가 찾아온 거거든요. 말했잖아요. 오베르 양의 사랑을 도와드리겠다고요.”
“…도와주시겠다고요?”
“그럼요. 저는 정말 진심이랍니다.”
하긴 너도 네 사랑을 위해선 내가 필요하니까… 어쩔 수 없네. 이번만 임시동맹이다. 마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그의 사랑을 쟁취해봐야겠다.
“그래서 말인데… 얼마 있으면 다가올 여름방학 때 저와 아버지를 오베르 양의 저택으로 초대해주시겠어요?”
“네?! 저희 저택으로요?”
“후훗. 맞아요. 거기서 아버지와 오베르 양의 약혼을 추진할 생각이에요. 오베르 가문의 가주님이 먼저 약혼 얘기를 꺼내시면, 아버지도 거절하지 못하실 거 아니에요.”
“……네에엣?!”
집에 온다고?
사, 상견례는 조금 빠르지 않나?
아니 그리고 약혼이라고?
“그러니 오베르 양은 가주님을 설득해주시겠어요?”
그렇네… 생각해보니 나한테도 장애물이 많았구나. 딸바보인 아버지가 과연 약혼을 허락해주실까? 그것도 내 또래의 딸이 있는 아저씨와의 약혼을 말야…
아, 위장 아파.
뒤늦게 깨닫게 된 현실에 눈앞이 막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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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훗. 오베르 양도 정말 귀엽네요. 어쩜 저렇게 표정이 극단적으로 바뀔까요? 그저 고귀하고 도도한 귀족 영애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께 화를 낼 때도 그렇고 생각보다 되게 재밌으셔요. 오베르 양과 함께 살면 분명 심심하진 않을 거에요.
정말 둘째 부인에 딱 맞는 분이지 않나요? 주제도 모르고 계속 질내사정을 요구하는 아리아 양보다는 훨씬 마음에 든답니다.
그러니 꼭 이번 기회에 오베르 양과 오베르 가문을 확실하게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겠어요. 후후후. 가장 큰 산을 이번 방학 때 넘는 거에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요.
흐음. 실은 저 역시 아버지를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란 말이죠. 아버지의 청혼을 거절해놓고선 오베르 양과의 약혼을 주선해야 하니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해요. 아버지께선 제가 하는 말이면 무슨 말이든 다 들어주시겠지만… 그래도 명분은 확실한 게 좋으니까요.
세간의 시선을 속이기 위해 위장 약혼이 필요하다고 말을 할까요? 으으음… 우선 만나서 슬쩍 언질을 해봐야겠…
“어머?”
이, 이게 무슨 일이죠…?
양호실에 설치해놨던 마법들이 모두 망가져있어요!
타닥타닥
벌컥!
“아버지! …아버지? 어디 계신가요, 아버지!”
사라졌어요… 아버지가 사라졌어요!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지셨다고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몇 겹이나 펼쳐놨던 감시 마법과 알람 마법 전부가 부서져 있어요.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마법들이 제게 거짓 신호를 보내고 있어요. 맙소사… 아카데미에서 이 일이 가능한 사람이 있다고요? 말도 안돼… 대체 아버지께 무슨 일이 생긴 거죠…?
설마 납치라도 당하신 걸까요? 설마… 아니죠? 감히 제 아버지를? 대체 무엇 때문에… 아아,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아버지가 제게서 사라지다니요.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긴 거에요. 그럴 수가. 안돼요. 절대로. 아버지가 없는 세상 따위 인정할 수 없어요.
아아… 아버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