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로맨스 판타지(19)
* * *
“후, 현아 문제도 일단락 됐네.”
이미 싸인이 끝난 매니저 계약서를 다시 한 번 훑어보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첫만남 때 그렇게 틱틱거리던 현아와 이런 사이가 되다니, 역시 사람 일이란 건 참 알 수가 없었다.
관계란 것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니 사람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음, 당장 직전의 ‘히로인 네토리’를 생각하면 내가 할 소리가 아니긴 한데… 적어도 현실에서는 그렇다는 소리다.
“……”
아니, 근데 또 생각해보니까 현실에서도 현아 면간했었네?
“크흠!”
아무튼 이제부터 잘 하면 되는 거 아니겠나!
그러니…
이제 곧 만나러 갈 세실리아한테도 잘 할 거다.
더는 멘탈이 나가서 도망치는 약한 놈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세실리아의 마음을 마주할 거다.
“그럼 이제 세실리아를 만나러 가볼까.”
***
……라고 말을 입밖으로 내뱉긴 했는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 망설여졌다.
아니, 결심은 했다. 결심은 했거든?
그런데 결심 가지고 안되는 문제가 있었다.
‘로맨스 판타지’ 세계관의 기억이 잘 안 났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렇다.
세실리아에 대해선 전부 기억하고 있는데 나머지 것들이 헷갈렸다.
“하아…”
나는 자신의 한심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차가운 커피를 들이켰다.
떠나기 전에 기억의 정리를 한 번 할 필요가 있었다.
***
그러니까… 루이즈? …가 아니지. 루이나구나. 그래, 루이나 오베르였다.
‘로맨스 판타지’ 세계관의 주인공이자 메인 히로인인 루이나 오베르, 나는 그녀를 함락시켜야 한다. 그것이 로판 세계관의 네토리 미션이었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꽤나 성공적으로 함락중이었을 거다. 루이나 오베르가 나만 치료할 수 있는 불치병을 안고 있었거든. 아마 치료를 목적으로 그녀의 몸을 애무하며 조금씩 타락시켰을 거다.
그게… 스마트폰에 있을텐데…
아, 찾았다.
[조아, 어째서… 그치만 조아여어! 거기 할타지는거어어!]
[너무조아서… 이상해져버려어어엇!]
내 기억이 맞구나.
이 정도의 반응이라면 거의 반쯤 넘어왔다고 보면 된다.
뭐야, 나 꽤나 성실했었구나? 괜찮은데?
로판 세계로 돌아가서 며칠만 더 힘을 쓰면 금방……
“…음?”
그런데 꼭 미션을 깨야 하나?
갑자기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어차피 세실리아랑 맺어진 후 또 하나의 현실처럼 살아갈 로판 세계인데 굳이 루이나를 함락시킬 필요가 없었다.
괜히 조교하다가 루이나가 완전타락하게 되면 S등급이 되면서 강제로 복귀하게 된다. 포인트 조금 벌겠다고 설치다가 50만 포인트 짜리 강제 복귀권을 사용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어우, 상상만 해도 소름이네.
그리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세실리아한테 고백해놓고 루이나를 조교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었다. 세실리아에 대한 예의도 아닌 데다가 그… 약간 그, 무서운 속성이 있는 세실리아의 신경을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더는 멘탈이 흔들리기 싫다고.
그러니 루이나를 네토리하는 건 여기서 멈추는 게 맞는 걸지도 모른다.
루이나 조교는 득 보다 실이 많은 선택이잖아.
음, 그래, 역시 그게 맞는 거같다.
함락시키는 건 중지다.
아, 물론 그렇다고 치료를 멈춘다는 건 아니다.
나만 살릴 수 있는 사람인데 죽게 내버려두는 건 좀 아니지.
빠르게 치료를 끝내고 연을 끊을…
“아이고…”
다시 생각해보니 치료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왜냐면 그게…
치료랍시고 루이나를 알몸으로 만들고 성감대를 애무했었거든.
부끄러워해도 억지로 참으라면서 잔뜩 만졌었다고…
그래놓고 이제와서 건전하게 치료하면 무조건 의심을 사지 않을까?
이래서 사람 함부로 대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또 다시 반성의 시간이다.
“에휴…”
그래도 뭐 별 수 없다. 결국 같은 결론이다.
이제부터 잘 하면 되는 거다.
어떻게든 잘 속여 넘기면 잘 풀리지 않겠나.
그리고 정 안되면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는…
“아, 진짜 벌써 몇 번째야!”
또 일차원적으로 생각을 하다가 실수를 할 뻔했다.
이건 정말 중요한 건데, 루이나를 죽게 내버려 둬서는 안된다.
그녀가 주인공인 이상, 그녀가 죽을 경우 세계관이 무너져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괜한 억측도 아니었다. 이런 건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 일이 잘못풀릴 경우 잃을 게 너무 많았다.
따라서… 루이나의 신변을 보호해야 한다.
치료가 끝났다고 연을 끊어선 안된다는 소리다.
그리고, 세실리아가 루이나의 몸을 뺏으려 하고 있지?
그것 역시 막아야 한다. 자칫하면 모든 게 망해버린다.
후… 신경쓸 게 생각보다 많았다.
돌아가기 전에 한 번 생각을 정리하는 게 정답이었다.
***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더는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미 뇌에 과부하가 왔다.
원래 계획은 다 무너지기 마련 아닌가. 그래서 임기응변이 중요한 법.
가서 잘 하면 된다. 솔직하게 세실리아를 마주한 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해답을 찾으면 되는 거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되게 쉬운 일이었잖아?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세실리아를 만나면 모든 게 다 잘 될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일시정지권 한 장을 챙긴 다음 ‘로맨스 판타지’ 세계로 들어갔다.
***
띠잉…
똑똑똑, 똑똑똑
“오ㅃ……”
***
똑똑똑
“아버지? 무슨 일인가요? 문 열어 주세요!”
아… 그러고보니까 세실리아가 방으로 찾아오는 바람에 현실로 도망친 거였지.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길래 뭔가 했는데 현실이 아니라 이쪽 세계의 소리였다.
똑똑똑
“미안이라니… 무슨 뜻인가요, 아버지!”
이런, 미안하다는 말도 했었지. 큰일이다.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따윈 없었다. 이대로 더 시간을 끌면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몰랐다. 다급해진 나는 당장 달려나가 문을 열었다.
벌컥
그리고 보았다.
걱정이 됐는지 두 손을 모으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세실리아를.
“앗! 아버지! 무슨 일… 어머.”
추억은 미화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오랜만에 보는 세실리아는 기억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반짝거리는 은빛 눈동자와 은하수처럼 은은하게 흘러내리는 은빛 머리카락,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생기를 불어넣는 노을빛 홍조, 마치 거장의 예술작품처럼 애틋한 감정을 주는 나의 딸, 세실리아 아실…
그녀를 보자 더 이상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떼쓰는 아이처럼 손을 뻗어 다시는 놓치기 싫다는 듯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는 욕심부리듯이 그녀를 잡아 당겨 품에 안았다.
“아버지…?”
아아, 세실리아. 어쩜 이렇게 매력적일 수가 있지.
나는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원했다. 단순히 품에 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조금 더 그녀라는 존재를 느끼고 싶었다. 마치 매료에 빠진 순진한 남자처럼 나는 세실리아를 욕구했다.
“앗…”
손을 뻗어 가냘픈 그녀의 허리를 끌어 당긴 다음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서늘한 감촉이 기분이 좋았다. 손을 움직여 귓볼을 만져주자 품 안에서 그녀의 작은 탄식이 터져나왔다.
“흣…”
그 귀여운 소리에 반응하며 고개를 숙이자 나를 올려다 보는 커다란 눈동자가 보였다. 다시는 눈을 뗄 수 없을것 같은 너무나 매혹적인 반짝임이었다. 나는 홀린듯이 점점 그녀에게 끌려갔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녀의 얼굴에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아아…”
흥분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세실리아 역시 나를 원하고 있었다. 그녀가 팔을 뻗어 내 목에 두른 다음 까치발을 들었다. 그러자 그녀와 나의 사이가 더 가까워졌다. 그녀의 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 채 잠시 숨을 멈췄다.
“……”
그리고 잠깐의 정적 끝에 우리는 마치 자석처럼 서로에게 달려들며 서로의 욕망을 채웠다. 처음으로 세실리아와 나누는 사랑의 행위였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는데도 나는 영원을 느꼈다.
“사랑해 리아… 네가 날 사랑하는 만큼, 널 사랑해.”
달콤한 키스가 끝나고 나는 그녀에게 내 사랑을 고백했다. 순서가 바뀌었지만 그건 우리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우린 서로의 감정을 알 수 있었다. 이건 그저 하나의 표현일 뿐이었다.
“아아… 아버지! 저도 사랑해요, 아버지!”
그러나 그 표현조차 세실리아에겐 큰 감동이었는지 그녀가 재차 내게 달려들며 영원의 시간을 이어갔다. 그러자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소리가 우리의 귀를 부드럽게 적셨다. 애정이라는 호수에 빠진 기분이었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꿈을 꾸는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를 해낸 거같으면서도 답답함을 느꼈다. 세실리아에게 더 꺼낼 말이 있었는데… 사랑한다는 고백은 이미 했고… 아, 이거구나.
“그러니 루이나 양의 몸을 뺏지는 말아줘. 응?”
“……엣.”
“나는 리아의 있는 그대로를 가장 사랑하니까 이 모습을 버리진 말아줘.”
“……무슨… 무슨 뜻일까요?…”
“그리고 밤에 찾아와서 나 몰래 내게 봉사하는 것도 그만둬.”
“…………네?”
“그러니까 또, 어… 왜 갑자기 졸리지…”
이참에 할 말이 많았는데… 잔소리할 게 더 있었는데…
나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