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D컵이 내게 집착한다(15)
* * *
그래, 결국 정했구나.
꿈을 포기하는 게 절대 쉽지가 않았을텐데…
계약서를 건네 받은 후 고마움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자,
현아가 부끄러워하며 툴툴거렸다.
“뭐예요 그 표정은! 그렇게 안 미안해도 되거든요? 저도 다 생각이 있어서 결정한 거니까, 안 그러셔도 돼요. 저도 어른이라고요.”
말은 저렇게 해도 한 편으로는 아쉬워하겠지.
그리고 알게 모르게 나한테 열등감도 느꼈을 거다.
자기보다 늦게 헌터가 된 놈이 벌써 C등급이 되어 같이 파티도 못 할 정도로 강해졌으니 억울했을까.
그런데도 이렇게 나를 위해 매니저가 되어주다니…
정말 착한 아이다.
그러니 최대한 그녀를 배려해준 계약을 맺자.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녀가 작성한 계약서를 검토했다.
***
“저기… 현아야?”
“네에?”
“저… 이거랑 이 조항, 필수인 거야?”
“아? 그거요? 당연하죠!”
“그…렇구나…”
배려해줄 생각이었는데…
그래서 웬만하면 딴지 걸 생각은 없었는데…
[제 7조. 헌터는 이동할 경우 항상 목적지를 매니저에게 통보하여야 한다.]
[제 11조. 헌터는 집 주소와 집 비밀번호를 매니저와 공유하여야 한다.]
[① 헌터가 이사할 경우 그 즉시 매니저에게 갱신된 정보를 통보하여야 한다.]
보통 이렇게까지 하나…?
이런 건 감시 아니야?
“무슨 생각 하시는거에요 진짜! 표준 계약서에 다 있는 내용들이거든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이런 조항들은 필수로 들어가는 거라구요!”
“그렇구나…”
으음… 그렇게 얘기를 들으니 또 이해가 아예 안 되는 건 아니다. 갑자기 연락이 안된다든가 잠수를 탄다든가 하면 큰일이니까. 위치 파악은 중요하지.
그렇다 해도 조금 심한 거같긴 하지만… 현아가 거짓말을 할 애도 아니고 표준계약서에도 있다면 그냥 넘어가야지 뭐.
그래 그건 넘어가는데…
[제 13조. 헌터는 만나는 이성에 대해 숨김없이 매니저에게 알려야 한다.]
[제 15조. 헌터가 술자리를 가질 경우 항상 매니저가 동반되어야 한다.]
“이 조항들도 표준 계약서에 있는 거야?”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내가 의아함을 가지고 현아에게 물어보니,
정말 별 거 아니라는 식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 그건 제가 속했던 길드 계약서에 있던 조항인데요. 헌터들이 워낙 사고를 많이 치잖아요, 특히 이성 문제랑 술 문제로. 그래서 조심 좀 하라고 들어가 있던 조항이에요.”
“아하… 그럼 빼도 되겠네?”
“왜요?”
음…? 아니 표준 계약서에 있는 내용도 아니고 이런 조항까지 굳이 넣을 필욘 없잖아… 라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현아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기 때문이다.
아니, 진짜 뭔데. 무섭게 왜 그래…
싱글싱글 웃고 있던 현아가 갑작스럽게 정색을 하자,
쭈구리가 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한층 더 얼굴이 험악해진 현아가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독사처럼 나를 노려보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나를 추궁했다.
“아저씨 여자 있어요? 아니면 앞으로 여자 후리고 다니게요? 그것도 아니면 저한테 비밀로 할 정도로 더러운 술자리 가지려고요?”
“……절대 아니지.”
“후후, 그러면 넣어도 상관 없겠네요.”
완벽한 논파였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서를 넘겼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현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궁금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쉬는 동안 매니저 계약에 대해서 잔뜩 공부했었거든요. 후후.”
어쩐지.
그래보이더라.
꼼꼼한 현아답게 철저하게 준비해 왔겠지.
그러면 믿자.
나를 믿고 꿈까지 포기하고 매니저 일을 시작하는 현아인데 내가 믿어줘야지.
나는 믿을 거야. 현아 믿을 거야.
이상해 보이는 규정도 더 있긴 했지만 더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고마워, 현아야.”
“헤헤, 별 말씀을!”
마지막까지 검토를 끝낸 나는 매니저 계약서 사인을 끝마쳤다.
***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헌터님!”
“잘 부탁해, 매니저.”
“에이, 매니저는 너무 딱딱해요. 그냥 평소처럼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너도 헌터님이라며?”
“히힛, 아저씨보단 낫지 않아요?”
…듣고보니 맞는 말이었다.
아직 서른도 안됐는데 아저씨라니, 가당치도 않지!
안그래도 호칭 가지고 언제 한 번 말을 꺼내려고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지금이 딱 타이밍이었다. 이번 기회를 놓쳤다간 평생 아저씨 소리를 들을 지도 몰랐다.
“그건 그래. 솔직히 내가 아저씨는 아니잖아.”
그래서 대놓고 말했다. 아저씨 소리 듣기 싫다고.
“아하하핫! 뭐야, 푸흣! 계속 신경쓰고 계셨어요?! 아하하! 아, 완전 웃겨!”
그러자 현아가 배를 잡고 웃더니 겨우 웃음을 그치고는 나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그러면…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
“푸흡! 아, 대박! 입꼬리 올라가는 거 봐! 그렇게 좋아요? 아하하핫, 하하하! 진짜 남자는 다 똑같다니까. 오빠라고 하니까 완전 좋아하는 거 봐! 푸흐흐흐!”
아니, 그, 나름 기대는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들으니까 그게… 주체가 안되네 씁, 아… 돌겠네.
현아의 기습공격으로 광대의 제어권이 사라졌다. 억지로 웃음을 참아보려고 했지만 머릿속에서 자꾸 오빠 소리가 맴돌아서 버틸 수가 없었다.
진짜 불가항력이라고…
“알겠어요 그럼. 이렇게 좋아하니까 미안해서라도 더 이상 아저씨라고 못부르겠어요, 푸흡.”
“……고마워.”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응? 그래 뭐 부탁 하나 정도야.”
“오빠, 라면 먹고 가도 돼요?”
현아의 기습공격은 두 번 쳤다.
***
결론만 말하면, 아무런 일도 없었다.
아니,
뭐,
왜,
딱히 내 잘못은 아니라고…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현아가 먼저 장난이라고 말을 덧붙였다.
나는 거부할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니, 진짜라고.
“저도 알아요. 오빠가 저한테 철벽치는 거. 저도 바보가 아닌 걸요.”
“그치만… 오늘 오빠를 보니까 알겠어요. 그래도 흔들리고는 있는 거죠?”
“후후, 기대해요. 더는 안 흔들리게 제대로 유혹해줄 테니깐요.”
이 말을 끝으로 현아는 집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내 잘못은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떠나는 현아를 잡고도 싶었거든?
그런데 그냥 참았다.
조금 궁금했거든.
현아가 과연 어떤식으로 나를 유혹할 지를 말이다.
저렇게 선언할 정도면 대단한 유혹일 거 아냐.
넘어갈 생각이 가득하긴 한데…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여자의 유혹이 너무 궁금했다.
그러니 현아야 믿는다.
내가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줄 거지?
나는 믿을 거야. 현아 믿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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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아는 뿌듯함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분명 자신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너무나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항상 거리를 두던 그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두껍기만 하던 성벽은 무너져 있었고, 절대 열리지 않던 성문은 자동문이었다.
모른 척 보낸 노출사진의 효과 덕인지,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후후, 당황하는 거 엄청 귀여웠었지.’
만약 그녀가 조금 더 작정하고 밀어붙였다면,
그녀는 오늘 덕배라는 성을 정복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현아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더 확실하게 그의 사랑을 얻고 싶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건 안돼. 진심이 아닐 지도 모르잖아. 단순히 분위기에 휩쓸린 걸 수도 있어.’
해프닝으로 시작되는 연인 같은 건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 내가 원하는 건 그렇게 가벼운 게 아니야.’
그래서 설치했다.
화장실에,
거실에,
침실에,
현관에,
부엌에,
그녀의 손이 닿는 모든 곳에,
그가 요리하는 틈을 타서
몰래카메라와 도청장치를 설치했다.
계약서는 함정이었다.
독소조항들을 추가했지만 어차피 그가 지키지 않으면 끝이었다.
하지만 몰래카메라와 도청장치는 달랐다.
이제 그와 자신에게 비밀이란 것은 없었다.
‘후후, 후후후후…’
이것을 통해 그녀는 착실히 그를 공략해 나갈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인데…
[후, 현아 문제도 일단락 됐네. 그럼 이제 세실리아를 만나러 가볼까.]
시작부터 문제가 생겼다.
‘………세실리아? 그게… 누구에요 오빠?’
그의 입에서 처음 듣는 여자의 이름이 나왔다.
끼이이익!
집으로 돌아가던 그녀의 차가 목적지를 바꿨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