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 왕도용사물(28)
메이드의 안내를 받아 간단히 몸을 씻고 선물받은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내심 몸을 씻겨주는 걸 기대했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유감이다. 입고 있던 옷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이즈가 하나 선물해줬다. 역시 귀족이라 그런가 통이 크다.
“와우…”
그 후 다시 메이드를 따라 식당으로 가니 사복으로 갈아입은 루이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옷을 벗은 루이즈를 보는 건 처음인데… 이 좋은 광경을 놓치다니 시우도 참 답이 없다.
루이즈는 푸른 머리칼과 깔맞춤을 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지나치게 큰 흉부 탓에 옷 태가 예쁘진 않았다. 하지만 은근슬쩍 속살이 비쳐보였기에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과연 여기사, 훌륭한 몸매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역시 마르타의 여신… 오늘 눈호강을 하는 군요.”
“흠! 입에 발린 말 따위 그만둬라.”
또 저러네.
내가 진심을 담아 찬사를 보내자 루이즈가 정색을 하고 나를 노려봤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참 알기 쉬운 사람이야.
“시우가 먼저 가길 잘했습니다. 이 자리에 있었다면 오늘 루이즈님 생각에 잠도 못잤을 겁니다.”
“흐흠! 그만 하래도! …그리고 그 사내는 어차피 내게 관심이 없지 않은가.”
삐졌네.
이 여자, 지금 시우가 먼저 가버려서 삐졌다.
왜 이렇게 귀여워?
루이즈는 아랫입술을 내밀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한 손으로 와인잔을 계속 빙글빙글 돌렸다. 누가봐도 ‘나 삐졌어요’ 자세다.
나라도 남기를 잘했지. 둘 사이를 위해서라도 루이즈를 달래줘야겠다.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루이즈님께 관심이 있으니 자리를 피한 거지요.”
“으음…? 그건 모순 아닌가.”
“흐흐, 시우 그 녀석 여자한텐 영 쑥맥이라서 말입니다. 루이즈님 같은 미인과 한 자리에 있는 게 부끄러웠을 겁니다.”
“흐음… 그런가… 그렇구나.”
와, 사람 표정이 저렇게 극단적으로 바뀔 수가 있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껏 우울해하던 루이즈가 빵긋빵긋 웃으면서 와인을 한모금 삼켰다.
시우가 자신을 의식한다는 생각에 즐거운 모양이었다. 역시 히로인 중 하나 답게 시우에게 끌리고 있는 듯했다.
좋아, 그러면 이쯤에서 시우를 위한 어필을 해야지. 루이즈가 시우에 대한 마음을 굳히도록 잔뜩 올려치기를 할 타이밍이 바로 지금이다.
“정말 순수한 놈이거든요. 그 나이까지 여자 한 번 사귀어 보지 않고 항상 수련만 했습니다. 그러니 미인에 대한 내성이 부족한 거지요.”
“……그렇지만 소피아양도 충분히 아름다운 여성 아닌가? 미인이라는 말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네만.”
아하, 그게 걸렸구나? 선남선녀인 두 사람이 함께 있으니까 의식이 됐구나?
하지만 걱정말기를. 소피아는 시우한테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시우는 이미 열린 골대다. 슈팅만 하면 골이라고.
“하하하. 저희들은 가족과 같은 사이입니다. 가족을 이성으로 의식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흐음, 그것도 그렇군.”
내가 확실히 단언해주자 루이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잔뜩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시우에 대한 호감도가 적어도 몇 단계는 올랐을 거다.
시우, 너 인마 나한테 감사해야 해.
“그런데 루이즈님. 시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으음?! 따, 딱히 아무런 생각도 안한다만! 다른 의도를 가지고 얘기를 한 게 아닐세!”
“어… 하하. 검사로서의 시우를 말한 겁니다. 오늘 직접 대련하시지 않았습니까.”
“엣? 아, 아아…! 읏, 콜록콜록…”
사랑에 빠진 사람은 바보가 된다더니, 루이즈는 정말로 귀여운 바보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착각을 들킨 루이즈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급하게 와인을 마시다가 그만 원피스에 흘리고 말았다. 오우, 서비스 타임인가? 그 덕에 옷이 젖어 가슴 부근이 몸에 착 달라붙어버렸다. 그렇게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던 여기사의 이런 추태라니, 정말 보기가 좋다.
“흠흠… 뛰어난 재능일세. 스승없이 성장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야.”
“하하. 그렇습니까? 그래도 아직 부족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맡겨주게… 가 아니라 지도편달이 필요한 건 시우군 혼자가 아닐텐데?”
“하하하……”
에라이, 이게 안통하네.
그래도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결과다.
삐진 루이즈도 달래줬고 시우 대신 대리호감작도 완료했다. 이제 둘이 같이 있는 시간만 만들어 주면 알아서 잘 굴러갈 거다.
대놓고 소피아랑 꽁냥거릴 시간이 정말 머지않았다.
***
다음 날, 소피아는 또 다시 그 여자들을 만나러 갔다. 어제 만나 보니까 아직도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고 하더니, 오늘부터 그 사람들이 다시 현실에 적응할 때까지 도움을 줄 생각이라고 한다. 정말 성녀라니까.
둘이 남은 시우와 난 오늘도 루이즈네 저택으로 향했다. 당분간은 의뢰를 받는 대신 그 시간에 루이즈와 함께 수련을 하기로 했다.
몬스터를 잡는 게 아니라 스탯이 오르진 않지만 적어도 경험을 쌓고 숙련을 할 수는 있겠지. 안그래도 강해져야 하는데 여러모로 이득이다.
그런데, 시우 이 놈이,
오늘도 수련이 끝나자마자 곧장 창관으로 떠나버렸다.
“하하. 저 놈 저거 부끄러워하기는.”
그리고 그 다음 날도.
“하하. 저 놈 저거.”
그리고 또 그 다음 날도.
“하하. 저 놈.”
그리고 또 그 그 다음 날도,
“하하.”
시우는 창관으로 가버렸다.
“……”
미친새끼가 진짜 정신을 못차리고 있네?
섹스에 익숙해지라고 보낸 건데 이러다가 창관에 돈을 다 대줄 생각이다. 아무리 늦바람이 무섭다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이거 마왕 잡는 거는 때려치고 이대로 마르타에 눌러살자고 하는 거 아니야?
창관에 무슨 출석 보너스라도 있는건지 일주일 넘게 창관에 개근하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0은 아닌 것같아 무서웠다.
아니, 그리고 매일같이 루이즈의 식사초대를 거절하는 게 남자가 할 짓이야? 창녀가 루이즈보다 좋단 소리잖아. 이거 한 번 시우랑 깊은 대화를 할 필요성이 보인다.
“오늘도 가버렸군…”
저것봐. 대놓고 실망하는 거 좀 보라고. 서브 히로인을 이렇게 만드는 주인공이라니! 정말 시우답다면 시우다운 놈이다.
“저는 남아있습니다. 하하…”
에휴, 내가 또 챙겨줘야지. 저러다가 자존감이 팍 떨어지겠다.
***
“저래봬도 숙소에선 항상 루이즈님 이야기만 합니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다거나 오늘도 크게 하나 배웠다거나 하면서 말입니다. 오늘도 출발하기 전에 이 시간만 기다렸다면서 얼마나 흥분하던지 보는 제가 다 민망했습니다.”
“그런가…”
아아, 틀렸다 이건.
이미 이런 칭찬은 통하지 않는 수준까지 와버렸다. 그리고 이젠 정말 더 이상 칭찬할 거리도 없다. 이대로가다간 작전은 실패다.
“그치만… 그렇다기엔 계속… 거절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나랑 함께 있고싶지 않다는 듯이…”
“루이즈님은 시우랑 함께 있고싶으신 겁니까?”
“으음… 나는 그저 그와 친해지고 싶은 것뿐일세…”
그런데 있잖아. 내 생각엔 이건 시우만의 문제가 아니다.
루이즈 이 여자, 시우 못지않은 쑥맥이다. 지금처럼 시우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여자다운 모습을 보여줬으면 시우는 진작에 넘어왔을 거다. 그런데 매번 긴장해서는 지나치게 정색을 하면서 굴리기만 하니까 시우가 철벽을 치는 거다.
아니, 빨간모자를 쓴 조교처럼 사람을 굴려대는데 호감을 가지겠냐고요. 있던 호감도 사라지지!
“…그렇습니까?”
그리고 쑥맥이라는 것도 웃기긴 하다. 가슴골을 대놓고 드러내는 갑옷을 입고 속살이 다 비치는 원피스를 입으면서 정작 호감있는 남자 앞에선 쑥맥이라고?
정말 서브히로인 다운 캐릭터다.
후…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소피아와의 행복한 모험을 위해선 어떻게든 둘을 엮어야 한다. 그렇다면 저 쑥맥인 부분도 내가 해결을 해야 한다는 소리. 내가 그녀를 바꾸어야 한다.
“시우와 친해지고 싶으시다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루이즈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쉬를 해서 시우를 유혹하면, 시우도 정신을 차리고 창관에 가는 대신 루이즈에게 더 신경을 쓰겠지?
그러다가 성욕에 미친 시우를 어떻게든 부추겨서 루이즈와 선을 넘게 하면 그 후로는 일사천리다. 시우가 먹버하는 책임감없는 놈도 아니고 그렇게 되면 루이즈와 연인이 될 거아냐? 해피 엔딩이다.
“흠… 방법이 있는가?”
“물론입니다. 제가 루이즈님을 위해서 개인교습을 해드리겠습니다.”
“으음! 잘 부탁하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