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 왕도용사물(23)
몬스터를 만난다 해도 지능이 높은 몬스터를 만날 줄 알았는데…
오크라니! 지능과 가장 거리가 먼 몬스터가 바로 오크잖아!
단순하고, 힘밖에 모르고, 눈 앞의 목표물을 향해 일직선으로만 달려가는,
좋게 말하면 상남자고 나쁘게 말하면 대가리가 빈 종족이 결계 안에 있었다.
-퀴이익!
-퀴익! 퀴이익!
뭐야, 욕하는 걸 들었나?
결계를 해제하고 나타난 오크는 두 마리였는데, 둘은 갑자기 나타난 우릴 보고 깜짝 놀라 듣기싫은 소리를 내더니, 이내 곧 정신을 차리고는 우릴 적대시했다.
오크라… 뭐, 몇 달 전의 나도 아니고 오크 정도는 혼자서도 잡지.
나는 가볍게 땅을 박차고 오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약점: 목]
[약점: 목]
목이 약점인 걸 보니 역시 생긴 대로 현실의 오크들과 크게 다른 게 없어보였다.
던전에서 오크들을 학살할 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도끼는 방패로 밀쳐내고 칼로는 놈의 목젖을 찔렀다.
-퀴이이이…
-퀴익… 퀵.
“대단합니다! 이 정도로 강하실 줄이야!”
“아핫! 우리 오빠가 좀 강하긴 해요!”
순식간에 오크 두 마리를 해치우자 브루투스가 크게 감탄을 했고
그걸 보고 소피아가 나 대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칭찬받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졌나? 진짜 귀엽다니까.
나는 소피아의 머리를 헝클어뜰이면서 브루투스에게 부탁했다.
“그럼 저흰 이대로 안쪽을 조사해볼 테니 브루투스님은 경비대를 불러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금방 데려오겠습니다!”
가장 안전한 건 이대로 경비대의 지원을 기다렸다가 함께 안으로 들어가는 거지만 그래서는 임팩트가 약하다.
다시 한 번 루이즈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려면 이 정도는 우리 손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본다. 오크 정도면 어려운 상대도 아니고 말이다.
“근데 형 괜찮을까? 우리 셋이서?”
“셋이 아니지. 여신님이 계시잖아. 너를 믿지마, 너를 믿는 여신님을 믿어!”
“…그렇구나! 알겠어!”
시우는 아직도 불안한 듯 보였지만 이번에도 여신님 치트키를 쓰니 단번에 용기를 가졌다.
여신님… 모두 다 대의를 위한 거니까 용서해주시기를!
***
그 후로도 우리는 계속 오크를 잡으며 숲 안쪽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드물게 보이던 오크들은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자주 그리고 더 많이 나타났는데,
아직도 오크들의 본거지를 찾지 못한 걸 보면 결계로 숨겨져 있던 공간이 생각 이상으로 넓은 듯했다.
“우으으, 끝이 없네 정말!”
“소피, 시우. 잠깐 쉬었다 가자.”
금방 해결될 줄 알았는데 이러다가 사건을 해결하기도 전에 경비대가 먼저 도착하게 생겼다.
진짜 뭐가 이렇게 넓냐고…!
씩씩하던 소피아는 벌써 헥헥거리며 힘들어했고 시우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굳어있는 걸 보니 역시나 힘들어하는 게 분명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경험치라도 벌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그만 뒀다.
-빠각
“응? 뭐야.”
휴식을 위해 그늘로 걸어가던 중, 어떤 물건을 밟았다.
에휴, 발 밑을 못볼 정도로 지쳐있단 소리아냐?
이쯤되면 쉬어가는 게 맞았다.
“토끼 인형?”
발을 떼고 아래를 쳐다보니 나무를 깎아 만든 토끼 인형이 있었다.
그리 잘 만든 건 아닌 걸 보니 개인이 직접 만든 장난감 같은데, 결계 안에 있다는 소리는…
애초부터 아셀렌숲에 있던 인형이거나 결계에 갇힌 사람이 떨어뜨린 인형이라는 소리잖아.
전자였으면 좋겠는데 내 직감이 후자라고 말하고 있다.
젠장, 오크새끼들.
“…형! 자, 잠깐 그거 봐도 될까요?”
“자, 여기.”
그런데 시우가 인형을 보더니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창백한 표정으로 내게 인형을 달라고 했다.
갑자기 무섭게 왜 이래? 설마 또 나만 못보는 뭔가가 인형에 있는 거야?
찝찝했던 나는 곧바로 시우에게 인형을 넘기고는 그늘에서 쉬고 있는 소피아에게 다가갔다.
“소피, 저 인형 어떤 거 같아?”
“으음… 몰라? 그냥 인형인데? 근데 별로 안귀여워.”
그래? 그렇다는 건 시우만 아는 뭔가가 있단 소리인데…
쟤 마르타에 온 거 처음 아닌가? 아, 모르겠다. 중요한 거면 얘기해주겠지.
지쳐서 머리가 굴러가질 않는다.
-팡팡!
“오빠, 힘들지? 짜잔! 자, 여기 누워!”
“소피… 넌 최고야.”
“헤헤. 앗, 잠깐만! 엎드리진 말고!”
역시 소피아는 성녀라니까!
우리 성녀님은 지친 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여 무릎베개를 해주었다.
아쉽게도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박을 순 없었지만 이렇게 누우면 소피아의 가슴을 로우 앵글로 볼 수 있으니 이건 이거대로 좋다.
거기다 성녀님의 애정이 듬뿍 담긴 머리 쓰다듬기! 아아… 부드럽고 기분좋은 감촉에 피로가 단숨에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슈우우
아,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구나.
정정한다. 성녀님의 힐 덕분에 피로가 사라지고 몸에 활기가 돋았다.
그러고보니 힐에는 이런 기능도 있었는데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었네.
“기분좋다…”
모든 걸 잊고 소피아와 단둘이 꽁냥거릴 수 있는 이곳이 바로 천국이 아닐까?
시원한 그늘, 상쾌한 바람, 사랑스러운 소피아, 그리고…
얼굴을 찌푸린 시우?
“아, 깜짝야.”
그러고보니 단둘이가 아니었지.
무릎베개의 파괴력에 그만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근데 쟨 왜 저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시우는 우리가 이렇게 붙어있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는 아까 내게 받은 토끼 인형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음… 뭔진 모르겠지만 덕분에 눈치 안보고 잘 즐겼다.
고마워 시우야.
***
천국같았던 휴식시간은 끝나고 다시 지옥 같은 수색시간이 돌아왔다.
5분도 쉬지 못했지만 이제 50분은 더 고생해야겠지. 젠장.
그래도 내가 선택한 계획이다. 이악물고 깡으로 버틸 수밖에.
“형. 이거 잠시 맡아줄 수 있어요?”
“맡아달라고?”
“네. 아리아 여신의 공간에 잠시 넣어둘 수 있어요?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만요.”
뭐지? 떠날 준비를 하는데 시우가 우울한 기색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아까까지 눈을 떼질 못하던 인형을 돌려주며 인벤토리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아니, 그 정도로 소중하다고? 이게?
“그래. 뭔진 모르겠지만 걱정말고 넘겨. 확실하게 보관해줄 테니까.”
“고마워요 형…”
뭐, 슬롯에 여유분은 있으니까. 이 정도 부탁을 들어주는 건 어렵지 않다.
인형을 건네받고 인벤토리에 넣어두자 시우가 허리까지 숙이며 내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아니, 존나 중요한 건가 보네. 이쯤되면 내가 더 부담스럽다.
대체 무슨 인형이길래 이러냐고 물어보았지만 시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런 게 있다고 둘러댔다.
존나 때리고 싶네…
용사라서 봐준다.
“자, 이제 다시 출발하자.”
***
아까와는 달리 이번엔 다른 오크들을 마주치지 않았다.
다만 드디어 놈들의 무리를 찾아냈다.
어느 순간부터 숲 안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길래, 자세를 낮추고 주변을 살펴보니 언덕 아래에 오크들의 본거지가 있었다.
“하아… 욕이 절로 나오네.”
왜 갑자기 안보이나 했더니 저 새끼들, 자기들끼리 모여서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엿같게도 그 축제의 중심엔 인간이 있었다.
“오빠… 끔찍해…”
“소피, 고개돌려. 억지로 보지마.”
아니, 화제의 중심이라 해야 정확하려나? 놈들은 인간을 불태워 인간고기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 편 천막 안에선 쉴새없이 여자의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씨발 진짜 이 세계관 너무 하드하다니까?!
“개새끼들…”
던전에 있는 오크들은 본능이 거세되어 헌터들을 죽이려할 뿐 범하려들거나 먹으려들진 않았는데
이 곳의 오크들은 왜 놈들이 몬스터라고 불리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기분나쁠 정도로 말이다.
“형… 저는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너도냐? 나도다 인마.”
시우만큼 숭고한 정신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아리아 여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냥, 그냥 좆같잖아.
내 기분을 위해서 이 놈들을 가만히 놔둘 순 없다.
“나, 나도야!”
“괜찮겠어?”
“이럴 때 도움을 주라고 여신님께 받은 힘이니까!”
역시 괜히 성녀가 아니야. 진짜 착하다니까.
그래, 내 기분뿐만이 아니라 소피아를 위해서라도 오크들을 무찌르고 사람들을 구해내야 한다.
안그러면 소피아가 슬퍼할 테니까. 그 꼴을 볼 수는 없지.
“그럼 시우. 너가 먼저 달려나가. 저 새끼들을 다 죽이면서 시선을 끌어. 그 동안 소피랑 나는 천막에 갇힌 여자들을 구해낼게. 혼자서 가능하지?”
“충분해요.”
“소피. 내가 천막 안에 있는 오크들을 죽이는 동안 여자들을 구하고 숨어 있어. 그러면 나는 시우를 지원하러 갈 테니까.”
“응! 나, 해낼게!”
후우, 좆같은 감정 덕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지만 나쁘진 않다.
‘머리는 뜨겁게 가슴은 차갑게’라는 말도 있잖아.
이 기분을 연료삼아 오크 새끼들을 다 쳐죽야겠다.
“좋아! 그럼 드가자!”
아, 반대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