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 왕도용사물(18)
“감사합니다, 손님!”
“수고하십쇼.”
운이 좋았다.
설마 오늘부터 재고처리를 위한 할인행사를 시작했을 줄이야!
하루만 일찍 왔어도 제값주고 샀어야 했을텐데 타이밍이 좋았다.
6개입 폭탄박스 2개,
서리폭탄박스 1개,
화염폭탄박스 1개,
섬광탄박스 1개,
오늘 내가 플렉스한 물품들이다.
이렇게까지 많이 살 생각은 없었는데 가격이 지나치게 착해서 질러버렸다.
인벤토리에 넣어두면 어떻게든 쓸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항상 들고다니는 최신형 스마트폰,
왕도용사물에서 득템한 초록빛 단검,
로판세계에서 얻은 조교용 안대,
이렇게 기존의 아이템 3개까지 합치면 총 8슬롯.
한 개는 비워두고 한 개는 폭탄 낱개를 넣어두려고 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제 진짜 왕도용사물로 돌아갈 준비는 모두 끝냈다.
다만…
이왕 얻은 내공인데 테스트는 해보고 들어가야지.
나는 집에 돌아가는 대신 옆 건물에 있는 헌터전용 수련실에 들어갔다.
-띠링
“어서오세요!”
***
[B등급 수련실]
큰맘먹고 B등급짜리 수련실을 선택했다.
조금 비싸긴 했지만 오늘 돈을 아낀 덕분에 여유가 있었다.
C등급 수련실에 가는 게 등급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맞았지만…
그래도 내공이잖아! 뭔가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올 거 같단 말이지.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련용 로봇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긴건 저렇게 허접해도 B등급 헌터의 수준이다 이거지…
대련을 선택하진 않았다. 질 게 뻔하잖아.
대신 B등급 헌터의 방어도와 내구도를 확인해볼 셈이다.
과연 내공을 쓰면 뚫을 수 있을까?
“후우…”
크게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뱉었다.
그리고 기억을 되살려 혈도를 따라 내공을 순환시켰다.
그러자 내공이 몸 속을 돌아다니며 근육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오오…”
에너지가 몸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었다.
순환시키면 시킬수록 몸 안에 있는 에너지가 점점 더 커져갔다.
나는 그 에너지를 주먹에 집중시킨 후 로봇을 향해 정권을 찔렀다.
“하압!”
-콰아아앙!
-끼리릭…
-지이잉… 지이잉…
내가 느끼기에도 엄청난 무언가가 주먹을 통해 터져나갔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형체가 망가진 로봇이 벽에 처박히더니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수련실 전체가 흔들렸다.
“끄아아아아아악!”
동시에 내 팔도 터져나갔다.
오른쪽 어깨부터 주먹 끝까지 팔 한쪽이 완전 넝마가 되었다.
근육 하나하나가 파열되는 고통을 느끼며 나는 바닥을 굴렀다.
“허억… 허억…”
힐이 없었으면 폐인이 될 정도의 상처였다.
내공의 힘은 역시 단순하게 볼 게 아니었다.
“이러니까… 허억… 강제복귀를 당했지… 씨바…”
내 몸이 내공을 버티지 못했다.
이래뵈어도 C등급 헌터의 스탯은 갖춘 나인데도
고작 주먹크기의 단전에서 얼마 뽑지도 않은 내공을 이겨내지 못한 거다.
“하아… 쓸 수는 있겠는데 각오는 하고 써야겠네.”
그래도 B등급 로봇을 저렇게 처참하게 망가뜨릴 정도라면…
가히 필살기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부작용이 있는 기술이긴 하지만 치료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굉장한 조커카드를 얻은 셈이다.
“앗! 잠깐만?!”
근데 이거… 내공 보충이 되나?
위지마망이 없으면 내공 리필이 안되는 거 아냐?
이런 멍청한 새끼! 그것부터 확인했어야 했는데…
당황한 나는 가부좌를 틀고 위지마망이 알려준 태극음양신공을 운용했다.
가능한 지 아닌 지는 미지수였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침착하게 내공을 일주천 시켰다.
“쓰읍… 후우…”
그러자 다행히도 아주 조금씩이지만 내공이 쌓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정말이지… 위지마망을 만난 건 엄청난 기연이었다.
“하… 빨리 강해져야겠네. 보답하려면.”
***
집에 돌아온 나는 처음부터 하나씩 꼼꼼하게 확인을 했다.
인벤토리 슬롯을 다시 정리하고, 일시정지권을 구매하고, 현재 스탯이나 스킬 레벨을 체크해두고… 잊은 거 없지?
“하… 정말 오래 걸렸다.”
눈앞이 암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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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악몽을 꿨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꿈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는 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려지는 꿈을.
억지로 깨어나려고 노력을 해봐도
정신을 차려보면 또 다른 꿈 속이었다.
악몽은 마치 내 사랑을 시험해보는 듯
나를 그 사람과 갈라놓았고
계속해서 나를 비운의 여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외롭고 비참했다. 슬프고 초조했다.
꿈인걸 알면서도 마음에 구멍이 났다.
그를 바랄수록 그에게서 멀어졌다.
오늘 그를 잃을 뻔해서 그럴까?
악몽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싫어… 그러지마…
오빠, 제발…
내게서 멀어지지 마…
듣지 못할 그에게 빌고 또 빌어봐도
변하는 건 없었다.
점점…
절망의 구렁텅이로…
“소피아.”
아아…! 그가 내 외침을 들었을까?
절망에 갇힌 나를 그가 구원해냈다.
”사랑해…”
아아…! 역시 내 사랑!
그의 한 마디로 불안했던 모든 게 다 사라졌다.
지옥 같은 악몽은 떠나가고
천국처럼 따스한 행복이 찾아왔다.
“오빠…!”
눈을 뜨자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가
언제나처럼 애정을 듬뿍 담은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나도… 나도, 오빠 보고 싶었어어!”
오빠도 악몽을 꾼 걸까?
오빠는 연신 보고싶었다 말하며 나를 가득 안아주었다.
나도 그에 질세라 오빠를 꼬옥하고 안아주었다.
역시 오빠의 품 안에 있으면 안심이 돼…
오빠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다시 잠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번엔… 무섭지 않았다.
아까와는 달리 즐거운 꿈을 꿀 수 있을 거같다.
“헤헤… 오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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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다… 돌아왔다고!
정말 긴 시간 끝에 기어코 왕도용사물에 돌아왔다.
왕도용사물에선 단 한 순간도 지나지 않았고
현실로 따지면 몇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로맨스 판타지에서만 해도 거의 5년 가까이 있었으니
체감상 정말 오랜만에 돌아온 거다.
하… 진짜 소피아가 보고싶어서 정말로 힘들었다고!
세실리아라는 귀여운… 아무튼, 귀여웠던… 딸과
내 이상형 그 자체인 위지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소피아를 잊은 날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만나러 가고 싶었던 걸 꾹 참고 있었는데
드디어! 만나게 된 거다!
그런데…
그렇다고 곤히 자고 있는 애를 깨우는 건 좀 그렇지…?
소피아는 지금 알몸인 채로 내 옆에서 자고 있다.
현실로 돌아오기 전에 잔뜩 섹스를 했었거든.
근데 이 상황에서 억지로 깨운 후에 또 섹스를 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좀 아닌 거 같다.
대신 오랜만에 소피아의 얼굴이라도 만끽할 겸 손을 뻗어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줬다.
그나저나 참… 예쁘구나 정말.
위지혜가 성숙한 매력이 있다면 소피아는 풋풋한 매력이 있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의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이런 아이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니 난 정말 행운아다.
“소피아, 사랑해…”
그러니 이번엔 무조건 소피아를 행복하게 해줘야지.
그때처럼 고블린한테 당해서 소피아가 슬퍼하는 일은 절대 만들지 않을 거다.
“오빠…!”
앗, 목소리가 컸던 걸까?
잠에서 깬 소피아가 나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불안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바다가 담긴 소피아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흔들렸다.
“보고 싶었어...”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해주는 소피아에게
이렇게나 늦게 돌아오다니…
나도 모르게 보고 싶었단 말을 꺼내며 소피아를 품에 안았다.
품에 안긴 소피아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나도… 나도, 오빠 보고 싶었어어!”
내가 사라지는 악몽이라도 꿨던 걸까?
소피아도 내가 보고 싶었다고 말하며 내게 달라붙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나는 예전처럼 소피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헤헤… 오빠 사랑해…”
그러자 소피아는 사랑한다는 말을 중얼거리다 다시 잠들었다.
역시 많이 피곤했나 보다.
나는 계속 소피아를 쓰다듬어주다가
그녀가 깊은 잠에 빠지자 메시지를 하나 남기고는
소피아가 일어나지 않게 조심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이제 막 돌아온 참이라 잠이 안왔거든.
아침이 올 때까지 밑에 내려가서 맥주나 마실 생각이었다.
-철컥
그런데 문을 잠그고 돌아서자 복도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형… 안주무셨어요?”
“뭐야, 너야말로 안잤어?”
잘됐다. 안그래도 혹시 일어나있으면 데려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맥주는 됐고 창관이나 가야겠다.
시우야 너도 아다는 떼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