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 태극음양지체(3)
“여기서 동쪽으로 걸어가면 큰 마을이 하나 나옵니다. 해가 뜨고 출발하면 될 겁니다. 저는… 반대쪽으로 가서 시선을 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위지혜에게 내일이 없는 사람의 등을 보여주며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떠나는 나를 지켜만 보았다.
‘슬슬… 잡을 때가 됐는데?’
하지만 진짜로 위지혜를 놔두고 떠날 생각은 없었다.
이건 그녀와의 치킨 레이스였다. 여기서 먼저 뒤를 돌아보면 지는 거였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이러면 나가리인데?’
미끼는 모두 뿌려놨다. 낚시대도 던져놨다.
이제 남은 건 위지혜가 떡밥을 물어주는 것뿐이었다.
“잠깐만요!”
‘이거지.’
월척이었다.
***
“지금, 설마 죽으러가시는 건가요?”
“…시선을 끌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거짓말! 아까 분명 곧 따라가겠다고 말했잖아요!”
휴, 듣긴 들었나 보다.
나름 연기한다고 작게 중얼거려서 안들렸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위지혜는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에 대한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곧 죽을 목숨입니다. 조직을 배신한 이상 제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저와 함께 가요…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이잖아요. 분명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거에요!”
역시는 역시 역시군.
예상대로 너무나도 착하고 정의로운 히로인이다.
위지혜는 내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는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주고 있다.
하아… 이렇게 벗겨먹기 쉬운 호구라니…!
“이제와서 살려고 발버둥치기엔 이미 더러워진 몸입니다. 그저 죗값을 치러야겠지요.”
“그렇다고 도망치는 건 비겁한 짓이에요! 죗값을 치르려면 살아서! 끝까지! 반성하며 살아야죠!”
“비겁하다고요? 하하… 맞습니다. 비겁한 놈입니다. 이런 제가 죄의 무게를 견디고 고개를 들 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아니요! 가능해요… 제가, 제가 당신을 도와줄 거니까요!”
이거지… 바로 이거야!
무협 소설 히로인의 특징 중 하나인 쓸데없는 오지랖부리기!
책을 읽다보면 특히 정파 히로인들은 정말 이해가 안가는 행동들을 많이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지금처럼 비중도 없는 조연들을 도와준다고 독자들에게 고구마를 뿌리는 거다.
저렇게 두 주먹 불끈 쥐고 할 수 있다고,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건 독자 입장에선 정말 최악의 전개다.
저러다가 괜히 다치기라도 하면, 진짜 납치되기라도 하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하지만 여기, ‘히로인 네토리’에선 정말 기다렸던 전개다. 믿고 있었다고!
“…어째서 이렇게까지 제게 친절을 베푸는 겁니까…?”
“그야, 제 생명의 은인이시잖아요! 그리고… 당신은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요…!”
“하하… 당신을 납치한 사람인데도 말입니까?”
“그건 저를 구해주기 위해서였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저질렀던 행동들이 사라지진 않습니다.”
“원해서 한 건 아니잖아요! 그 행동을 하면서 괴로워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를 구하신 거잖아요!”
키야… 미쳤다. 잠깐 떡빱을 뿌려줬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확대해석 해준다.
‘정의’로 머리 속이 가득찬 위지혜는 자신을 구해준 나를 이미 나쁜 사람이 아니다! 라고 정해놓은 듯했다.
덕분에 계획의 성공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이게 된다고? 진짜?
“하아… 이렇게 가다간 해가 뜰 때까지 떠나지 못하겠군요. 거듭 말하지만 죽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시선을 끌러 가는겁니다.”
“멈춰요! 저도 거듭 말하지만 이대로 당신을 보내줄 수 없어요!”
내가 그녀를 무시하고 떠나려 하자 위지혜가 오도도 달려오더니 문 앞을 가로막았다.
좋아 여기까지 왔구만. 그럼… 이제 다음 단계를 시작해볼까?
100포인트짜리 랜덤박스에서 최소 몇 만 포인트는 될 사기 아이템이 나왔었다.
너무 좋은 아이템이라 아껴두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지금이 쓰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후우…”
나는 보라는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그러곤 위지혜 앞에서 흔들며 물건의 정체를 밝혔다.
“이건 춘약입니다. 미약이라고도 하지요.”
“……네에에?!”
“계속 저를 막으시면 이걸 마실 겁니다.”
“어, 어어… 어째서죠?!”
내 충격발언에 위지혜는 깜짝 놀라더니 안그래도 큰 눈을 더 동그랗게 키웠다.
그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워 표정이 풀어질 뻔했지만 꾹 참으며 정색을 유지했다.
“아시다시피 춘약을 마시면 성욕에 지배당합니다. 눈앞의 여성을 범하고 싶은 욕구가 치솟아 오르죠.
저에게 순결을 빼앗기고 싶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신을 위해서라도 저를 막지 마십쇼.”
“그런… 지금 절 협박하시는 건가요?”
“예, 협박입니다. 혼약을 앞둔 처녀에게 이 보다 더한 협박이 있습니까?”
“아아… 하지만… 이대로 보낼 순 없어요. 삶을 포기하지 말아요! 제발…”
“세상은 제게서 모든 걸 빼앗아 갔습니다.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더 나락으로 가더군요. 그런데 이런 제게서 죽음마저 빼앗으려는 겁니까?”
“그, 그렇지만! 그렇기에 더 밝은 미래가 찾아올 거에요! 분명 방법이… 앗!”
우욱 씹… 오글거려서 더는 못하겠다.
더 이상 연기하다간 내가 내가 아니게 될까봐 참을 수 없었다.
이런 말을 입밖으로 내뱉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시우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강제로 다음 단계를 진행시켰다.
아직도 나를 설득시키려는 위지혜의 눈 앞에서 춘약을 들이켰다.
그녀는 막기 위해 내게 달려왔지만 도착했을 땐 이미 다 마신 후였다.
위지혜는 설마 내가 진짜로 마실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 지 망연자실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그녀의 눈동자에서 온몸을 부들거리는 내가 보였다.
춘약의 효과는 대단했다. 당장 덮치고 싶어서 미칠 것같았다.
하지만 초인 같은 의지로 버티며 마지막으로 위지혜에게 말을 건넸다.
“결…국 이걸 마시게 만드는… 군요… 크윽, 하아… 당장 떠나십쇼… 달빛이 밝으니, 하아… 길을 잃진 않을 겁니다… 큭.”
“아, 안돼요…”
“큭큭… 제 인생다운 비참한 최후입니다… 하아…”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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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의 남자가 그녀 앞에서 춘약을 들이켰다.
막으려했지만 그녀는 막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그에게서 강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하아… 하아…”
아직까진 버티고 있는 듯 보였으나 그가 성욕의 괴물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도망가야 했다. 그의 말대로 떠나야 했다.
이대로 있다간 그에게 범해지게 생겼다.
혼약하는 날까지 지켜야 할 순결을 잃게 생겼다.
“그럴수가… 흑, 흑….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지만 그녀는 쉽사리 떠날 수 없었다.
춘약은 복용자를 성욕의 화신으로 만들어주는데 그 성욕을 풀어주지 못하면 복용자는 죽을 때까지 괴로워하다 추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따라서 그녀가 도망친다면 그는 곧 죽은 목숨이었다.
그 사실에 그녀는 망설였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처음만난 사람,
거기다 저열한 집단의 살수로서 적지 않은 죄를 저질렀을 사람,
그에게 자신의 순결을 바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숨어있던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그의 눈빛…
담담히 자신의 사정을 고백하던 그의 목소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떠나겠다던 그의 뒷모습…
그 하나하나가 그녀의 마음을 아련하고도 아프게 만들었다.
자신에게서 동생을 봤다는 그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가 불쌍했다. 동정이 갔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림세가의 사람으로서 그에게 책임감을 느꼈다.
사파를 뿌리뽑지 못한 정파의 잘못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처음을 줄 순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죽게만들 순 없었다.
“아아… 가가! 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자신의 순결과 사람의 생명을 저울에 두고 결정을 해야 했다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에게는 너무나 고르기 어려운 고민이었다.
거기다 자신은 이미 약혼자도 있는 몸…
뿐만 아니라 천 년에 한 번 나온다는 태극음양지체의 주인 아닌가…
“하아… 아악! 으아아아악!”
-흠칫
그녀의 고민이 깊어갈수록 그의 괴성 또한 커져갔다.
그녀는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벌컥
그녀는 괴로워하는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을 열었다.
당연하게도 순결을 선택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과연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걸 내버려둬야 할만큼 자신의 순결이 가치있는 것일까?
평생을 정의롭게 살기로 한 가가와의 약속은 지금 같은 순간을 위해서가 아닐까?
여기서 그를 죽게 놔두는 건 전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었다.
-탁
그녀가 열었던 문을 닫고는 문고리를 잠갔다.
“미안해요 흑… 훌쩍, 가가… 하지만… 당신은 절 이해해 주실 거죠?”
“훌쩍, 이런 절 사랑해 주실 거죠?”
-스르륵
그녀가 옷을 벗었다.
약혼자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자신의 나신을 남자 앞에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