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 태극음양지체(2)
위지혜는 무협 장르의 히로인 답게 긴 머리를 모두 뒤로 넘기고 전신을 덮는 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전혀 촌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 전까지 함께 했던 희라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이거 사기 아니야? 저 모습으로 저렇게 예쁠 수 있다고?’
꾸밈 하나 없는 얼굴이었는데도 눈을 뗄 수가 없는 미모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나 얼굴에 묻은 지푸라기로는 그녀의 미모를 숨기지 못했다.
오히려 그 모습은 순수한 그녀의 매력을 더 부각시켰다.
‘과연 메인 히로인… 미쳤다 진짜.’
은근슬쩍 흐트러진 옷 사이로 보이는 쇄골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 그녀를 덮치고 싶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팜므파탈의 화신이었다.
이런 여자를 네토리할 수 있다니… 오늘도 ‘히로인 네토리’를 찬양하게 된다.
“…나를… 어쩔 셈인가요…”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니 위지혜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노려보았다.
깜짝놀란 아까와는 달리 각오를 한 표정이었다.
마냥 수동적인 히로인은 아니라 이건가? 그녀에게서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꺄악!”
-털썩
하지만 대답해주진 않았다.
대신 그녀를 기절시키고 들어올렸다.
어쨌거나 계획대로 그녀를 납치해야 했다.
-채앵!
-챙!
그런데 그 때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눈 앞에서 칼 두 자루가 떨어졌다.
지금… 설마 나 죽을 뻔 한건가…?
깜짝 놀라 주변을 살피니 혀를 차는 노인과 외팔이 된 대장이 보였다.
“젠장… 이놈아! 그 아이에게서 손 떼거라!”
“잘했다. 6호. 그대로 데려가도록. 여유되는 자들은 6호를 엄호하라!”
“막아! 저 놈을 막아란 말이, 읏, 이 아해가?”
“어서!”
뭔진 모르겠지만 노고수가 날 죽이려 한 걸 대장이 구해준 것 같았다.
여기 세계관 너무 무서운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타앗
당장 이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퇴로를 찾고 있자 조장 하나가 내 앞에 나타났다.
피가 잔뜩 흐르는 걸 보아 몇 번이나 베인 모양이었다.
살벌하다 살벌해 진짜.
“6호! 따라와라!”
“충!”
그래도 조장은 괜히 조장이 아니었는지 부상을 입고도 길을 뚫기 시작했다.
다행히 풍운상단에는 노고수 정도의 실력자는 더 없는 듯했는데
다른 조장들까지 나서서 엄호해주자 우릴 막을 사람이 없어보였다.
-촤아악
“끄아아악!”
“막아! 죽더라도 막아야한다!”
풍운상단은 필사적으로 우릴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애초에 숫자부터 흑풍대가 더 많았던 상황에서 노고수조차 도움을 주지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근데 대체 위지혜가 어떤 여자길래 이렇게 모든 힘을 다해 납치하려는 거고 또 저렇게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려 하는 거지?
무언가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
-채앵!
“끄윽! 덕배 이 자식아! 한눈팔지 말고 달려!”
으헉, 또 죽을 뻔했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 측면에서 달려드는 검을 놓쳐버렸다.
이런 난전은 처음이라 적응이 되질 않았다.
다행히 검에 맞기 전에 맞선임이 나타나 나를 구해주었다.
“고맙습니다!”
“됐으니까 일단 달려!”
그런데 이 녀석은 어째 멀쩡했는데 상처하나 없는 걸 보니 싸우는 척만 한게 아닐까 의심이 되었다.
그래도 덕분에 구해진건가. 거 참…
-타타탁
-타탁
“안돼! 아가씨를 지켜어!”
“끄어어억!”
그 후로도 풍운상단은 우리의 발목을 잡으려 했지만 막아내지 못했다.
처절한 사투 끝에 나와 조장 그리고 맞선임은 전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등 뒤로 울부짖는 노고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연달아 들리는 대장의 괴성으로 보아 당장 쫓아오지는 못할 것 같았다.
“후우…”
계획과 달리 정말 힘들었던 전투였지만 만신창이가 되어서라도 결국 성공시켰다.
그 사실에 나와 맞선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 하하! 하하하… 이걸 해냈네.”
“그러게요, 형님.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끝났다는 생각에 온몸이 부들거렸다. 긴장했던 근육이 풀어지면서 힘이 빠지자 몸이 내 몸 같지가 않았다.
그건 나만 그런 게 아니었기에 산 중턱을 넘은 우리는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나는 기절한 위지혜를 내려놓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면서 오늘 있었던 전투를 복기했다.
그 동안 맞선임은 품에 있던 금창약을 꺼내 조장의 상처에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네 덕분이다 6호. 용케 목표가 숨어있는 곳을 찾아냈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운도 실력이다. 하마터면 작전에 실… 윽, 너, 이 새끼가…!”
치료를 받으며 조장은 나를 칭찬했다. 그래서 감사의 의미로 인벤토리에서 초록빛 단검을 꺼내 찔러주었다.
방심했던 조장은 절대 막을 수 없는 기습이었다.
겨우 막아놨던 상처가 터지고 거기에 독이 섞이며 조장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했다.
뒤를 보자 맞선임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 뒤통수는 이렇게 치는 거야.
***
납치는 어디까지나 수단이고 내 진짜 목표는 위지혜를 네토리하는 거다.
따라서 네토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계획이었고 언제든지 배신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흑풍대의 명령대로 행동했던 이유는 그게 네토리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조장, 애초에 상대도 되지 않던 맞선임, 기절한 히로인,
여기서 둘만 배제하면 언제든지 네토리를 할 수 있는데 굳이?
이런 완벽한 상황에서 흑풍대의 말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어차피 배제해야 하는 둘이라면…
조금 더 상황을 재밌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새로운 계획을 세워봤다.
먼저 힐과 정화로 기절한 위지혜를 깨우고 그녀가 일어날 타이밍 즈음에
방심하고 있는 조장을 죽인다.
“너, 이 새끼가…!”
“이런 일을 시킨다는 말씀은 없었잖습니까!”
“쿨럭! 큭, 네 놈… 대체 무슨 소리냐 갑자기…”
“저승에서 뵙겠습니다!”
“으윽! 큭, 크으아악!”
그리고 그와 함께 뭔가 의미있어 보이는 말을 섞는다.
조장 입장에선 뭔 소린가 싶겠지만 듣고 있는 위지혜는 생각이 많아질 거다.
“덕배 너, 너 미쳤냐! 지금 뭐하는 짓이야!”
“형님… 곧 따라 가겠습니다…”
“이, 이이, 이러지마! 이 새끼, 대체 무, 크아악! 히익, 피, 피가! 끼에에엑!”
그 후 따라가겠다는 말과 함께 맞선임도 죽인다.
한 번 살려준 건 고마웠지만 내 뒤통수를 때릴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후우… 형님 이 분만 돌려보내고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위지헤를 살려주려 한다는 말을 은근슬쩍 들려준다.
그러면 나에 대한 경계가 줄어들 거거든.
“당신… 무슨 짓이죠…?”
자, 떡밥은 다 깔아뒀고 이제 제대로 속여볼까?
***
“앗… 일어나셨습니까?”
“이건 대체… 저를 납치하고 또 이렇게 동료들을…”
과연 정의로운 히로인. 내가 조장과 맞선임을 죽이자 질색하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자신을 납치한 적이지만 동료를 죽이는 비열한 짓은 용서할 수 없다 이건가?
잘됐다. 저 정도로 착하면 계획의 성공 가능성이 올라간다.
“동료, 동료라… 하하…! 저 놈들이 제 동료란 말씀입니까?”
“…아닌가요? 그럼 설마 억지로?”
“아니요 동료 맞지요. 동료지요. 동료였지요. 하하…”
“…?”
“날이 춥습니다. 근처에 폐가가 하나 있는데 여기 있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따라오시지요.”
“이, 이봐요!”
나는 뭔가 있어보이는 척을 하면서 그녀를 폐가로 안내했다.
기억 속에 있는 나와 맞선임만 알고 있던 장소 중 하나였다.
위지혜는 나를 경계하면서 상황을 주시했지만 내가 멀어지자 겁먹었는지 곧바로 따라왔다.
“이대로 제가 도망가면 어떡하려고 그러나요?”
“찾아야겠지요. 야밤의 산은 위험하니까요.”
“정말 그 이유 때문인가요…?”
“달리 이유가 있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의심과 의아함 안도와 걱정이 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들어오시지요. 바람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해가 뜰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절 놔주실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 놈들을 죽일 이유는 없었지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대체… 왜죠?”
좋아 이제야 미끼를 물었구나.
솔직히 지금부터는 도박이다. 그것도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도박!
현실이었으면 절대 시도하지 않을 도박이지만 지금은 현실이 아니니까.
그러니 도전해본다.
“후우… 얘기하자면 긴 얘기입니다.”
***
“부모없이 자란 제게 여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참 착한 아이였지요.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만이 제 삶의 빛이자 희망이었지요.”
“객잔에서 점소이로 일했던 동생은 객잔을 운영하는 게 꿈이었습니다. 이름도 정해놨었지요. 남매객잔이라고. 자신은 접객을 할 테니 저보곤 요리를 하라며 동생은 매일 밤 미래를 꿈꿔왔습니다.”
“하지만 가난하면 꿈도 못꾸는 걸까요? 어느 날 일을 마친 저를 반긴 건 싸늘한 시체가 된 동생이었습니다…”
“귀엽고 순수했던 동생은 항상 모두에게 사랑받았었지요. 객잔의 손님들 역시 동생을 아껴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무림인은 동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가난했기에 꾸미지도 못하고 자주 씻지도 못한 동생을 더럽고 냄새난다며 발로 찼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씻겨주겠다며 마시던 술을 붓고는 마구 짓밟았다고 합니다. 불쌍한 그 아이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괴롭힘이었지요…”
“결국 그 아이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무림인의 술주정으로 꽃다운 나이에 그렇게 가버렸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전 분노했습니다. 도와주지 않은 객잔 주인과 손님들에게 증오의 말을 내뱉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진짜 원수는 무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부터 복수를 하기 위해 제 인생을 바쳤습니다. 더러운 일, 비겁한 일, 가리지 않고 강해지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습니다. 그러다 흑풍대를 알게되었지요. 무림인들을 대상으로하는 살수집단 말입니다…”
“그걸 알게 된 전 흑풍대에 제가 가진 모든 걸 바쳤습니다. 그리고 의뢰했지요. 그 놈에게 복수해달라고.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 놈은 이미 죽어있더군요… 참 허무했습니다.”
“복수의 칼끝이 사라진 전 삶의 목표가 사라졌습니다. 매일같이 방황하고 다녔지요. 그런데 그런 절 보더니 흑풍대에서 새로운 목표를 주었습니다. 모든 무림인의 척살이라는 말도 안되는 목표 말입니다.”
“그러나 저에겐 참 매혹적인 목표였습니다. 어차피 다 똑같은 무림인들. 제게는 다 죽일 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명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 흑풍대에 들어갔지요.”
“하지만 흑풍대는 제가 생각하던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순간 민간인들을 죽이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그렇게 증오하던 무림인이 되어있었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죽을 수 없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죽여야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눈을 보니 동생이 생각나더군요. 언제 어디서나 꿋꿋히 버티던, 웃음을 잃지 않던 제 동생 말입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도저히 동생을 볼 낯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만두려고 합니다…”
“어째서 당신이 노려지는 진 모르겠지만 부디… 살아주세요.”
나는 즉흥으로 지어낸 말을 모두 다 내뱉었다.
하다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나도 몰랐지만
어떻게든 이때까지 읽은 무협 소설들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말을 끝내고 나서도 내가 무슨 말을 한 지 기억이 잘 안났지만
조용해진 위지혜를 보니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듯했다.
“여기서 동쪽으로 걸어가면 큰 마을이 하나 나옵니다. 해가 뜨고 출발하면 될 겁니다. 저는… 반대쪽으로 가서 시선을 끌겠습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그녀를 낚을 마지막 낚시대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