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 D컵이 내게 집착한다(12)
결론부터 말하자면 C등급 헌터 승급시험은 무사히 통과했다.
생각 이상으로 까다로운 시험이긴 했지만 이미 탈 D등급 헌터인 나에게 어려운 시험은 아니었다.
정말 드물게 나온다는 특이 던전? 관측 덕에 전혀 어렵지 않았다.
교관과의 일대일 대련? 고작 C등급 헌터의 공격으로는 성장할 대로 성장한 나의 힐을 뚫어내지 못했다.
다른 헌터들은 역대급 불시험이라고 불평했지만 전혀 공감가지 않는 얘기였고
나는 당당히 최고 기록을 달성하며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크… 지난 달에 F등급 헌터였는데 벌써 C등급 헌터라니!”
‘히로인 네토리’를 각성한 이후로 모든 일이 잘풀렸다.
사람 일은 진짜 모르는 거라니까.
-지이잉!
[감덕배 헌터님 안녕하세요? 투썸길드의 진명운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천국 같은 분위기의 엔젤길드입니다! 안녕하세요? 최근 감덕배 헌터님의…]
[안녕하십니까? 헌터님의 승급시험 소식을 듣고 연락을 드리는 하삼길드입니다…]
방구석 백수였던 나에게 이렇게 러브콜이 쏟아지다니 말이야.
정말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그런데 말이야.
이것 참 어쩌지.
나는 길드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계속 개인번호로 연락이 오는데 솔직히 처음에나 기뻤지
방해가 될 정도가 되니까 짜증만 난다.
-지이잉!
-지이이잉!
아오, 진짜! 그만 좀 하지.
이거 불법 아니야? 개인정보보호법 이런거 없나?
[발신자: 이현아]
아, 현아였구나.
***
딱히 길드가 싫은 건 아니다.
길드에 들어가면 동료도 생기고 정보도 얻기 쉽고 장점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길드에 들어가는 게 옳을까? 답은 아니오다.
‘히로인 네토리’로 마음껏 성장할 수 있는 나는 이레귤러인 존재다.
다른 헌터들과 성장 속도에서부터 차이가 날 거고 쉽사리 얻기 힘든 스킬들 역시 쉬지 않고 늘어날 거다.
이런 상태에서 소속을 가지는 건 옳지 않다.
사람들은 내가 숨기는 게 있다고 의심할 거고 그건 곧 질투와 시기가 되어 날 괴롭힐 거다.
그런데 굳이 길드에 들어간다? 절대 안되지.
길드에 들어가는 건 내겐 장점보다 단점이 더 크다.
-지이잉
[여보세요? 아저씨. 어디쯤이세요?]
[거의 다와가. 나 안 도망가니까 그만 좀 보채.]
[에헤헤… 알겠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욥!]
근데 일단 그런 거 다 됐고!
오늘은 좀 즐기자. 열흘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하루 정도는 쉬어줘야지.
승급 기념으로 현아네 집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기로 했다.
맨날 술에 취한 현아를 집에 데려다 줬더니 오늘은 그냥 처음부터 현아네 집에서 마시기로 했다.
참고로 내가 얘기를 꺼낸 건 아니다. 현아가 나를 초대했다. 이번 기회에 보답을 할 겸 요리를 해준다나?
셰프급으로 성장한 내 요리 실력보단 못하겠지만 그래도 여자가 만들어주는 요리라니 기대가 된다.
-띵동!
“문 열려 있어요! 들어오세요!”
그런데 얘도 참 걱정이다. 뭐 이렇게 무방비야.
물론 그만큼 나를 믿어준다는 거니까 기분은 좋지만 이제는 거의 동생처럼 여기는 현아기 때문에 걱정도 된다.
나쁜 남자한테 잘못 걸려서 면간이라도 당하면 어떡하냐고.
에휴, 나라도 챙겨줘야겠지.
“실례합니다~”
“풉! 뭐에요 그건. 그래요 실례하세요~”
오우… 앞치마 차림을 보는 건 또 처음이네.
역시 몇 번을 봐도 굉장한 파괴력이라니까. 저 정도면 바닥에 흘릴 걱정은 없겠다.
***
“건배!”
“건배…”
“이예이!”
-짠!
빈 소주병이 하나하나 늘어나면서 현아의 목소리가 점차 커져갔다.
불안한데… 저러다가 또 꽐라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이제 대련 얘기해주세요!”
“하아… 벌써 세 번이나 한 거 알아?”
“에헤헤… 그치만 들을 때마다 재밌다구요!”
“…그건 맞지. 내가 생각해도 장난아니었다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그래도 이번엔 이전처럼 씁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아서 분위기가 좋았다.
남친이랑 싸운 얘기, 남친이 바람핀 얘기 등등 얼마나 괴로운 시간이었나!
그에 반해 오늘은 내가 활약한 얘기만 이어져서 마음이 편했다.
사실 내 인생에서 오늘처럼 활약한 날이 없었어서 조금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거든…
현아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내 얘기를 듣고 싶다고 졸라대서 덕분에 실컷 자랑할 수 있었다.
“와아! 역시 아저씨 대단해요!”
“그, 그렇지? 내가 봐도 좀…”
“그렇게 낯빛 하나 안 바꾸고 자기자랑하다니 굉장해요!”
“……”
그런데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애가 좀 지나치게 솔직해졌네.
“풉! 뭐에요 그 표정은! 히히. 농담이에요 농담. 자 이거 먹고 기분 푸세요.”
“이때다 싶어서 실패작 처리하지는 말고.”
“실패작이라뇨! 참신한 시도라고 봐주세요…”
안타깝게도 현아의 요리 실력은 기대 이하였다. 자취 경력이 꽤 되었기에 기본은 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덕분에 내가 새로 요리를 했는데 내가 만든 음식은 금방 동이 났고 현아가 만든 음식은 여전히 책상 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쯤 말씀해주실 거에요…?”
“응? 뭐가?”
“뭐가라뇨! 그… 시험에 합격하면 얘기할 게 있으시다면서요…”
“아, 그거?”
“네, 그거요!”
그러고보니 그게 있었지. 깜빡한 건 아니고 며칠 텀을 두고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까지 요구를 하면 바로 얘기를 해줘야겠다.
현아를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현아에게 해주고 싶은 말 그건…
====
그가 집에 찾아오고 나서부터 이현아는 계속 긴장한 상태였다.
그 날 그가 얘기해준 말이 계속해서 신경쓰였기 때문이다.
‘이번 승급시험에 통과하면 네게 할 말이 있어.’
‘너에게 있어 그리고 나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얘기야.’
과연 어떤 말을 하려고 그렇게 정색을 하고 말했는 지 그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짐작가는 건 몇 가지 있었다.
‘설마 나랑 사귀어 달라고? 나, 드디어 해낸 거야?’
하지만 그건 가능성이 낮았다.
아무리 적극적으로 대쉬를 해도 철벽을 치던 그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마음이 바뀌었으니 나랑 사귀어달라라는 말을 꺼낼 거 같진 않았다.
그녀가 가장 원했던 말이었지만 가장 현실성이 낮은 말이었다.
‘아니면…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더 이상 나랑은 같이 못다니겠다고…?’
이건 가능성이 높았다.
열흘 동안 그녀는 버스만 탔었다. 갑작스럽게 성장한 그는 힐러임에도 그녀의 도움 없이 혼자서 D등급 던전을 클리어해냈다.
이런 상태에서 C등급으로 승급한 그가 그녀와 함께 사냥을 하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그녀가 가장 원하지 않던 말이었지만 가장 현실성이 높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혼자가 된 그녀에게 유일한 구원인 그였다.
이제 와서 헤어지기에는 그녀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된 그였다.
이대로 놓치긴 정말 싫었다.
따라서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가 어떤 결론을 내렸든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하게끔 만들 기회 말이다.
그래서 억지로 그를 그녀의 집으로 초대했고 평소보다 과감하게 옷도 입고 하지도 않던 요리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해내지 못했다.
그는 평소의 그였고 둘의 사이는 변하지 않았다.
웃고 있지만 마음이 아팠다.
즐거웠지만 너무나 괴로웠다.
행복했지만 절망스러웠다.
‘결국… 여기까지구나.’
울음이 나왔지만 억지로 참았다.
마지막엔 웃는 얼굴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언제쯤 말씀해주실 거에요…?”
“응? 뭐가?”
“뭐가라뇨! 그… 시험에 합격하면 얘기할 게 있으시다면서요…”
“아, 그거?”
“네, 그거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대체 어떤 말이길래 그런 식으로 얘기를 꺼내는 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를 보자 왠지 생각보다 시시한 얘기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희망이 생겨났다.
‘그래 아저씨가 날 얼마나 의존하시는데! 그럼그럼. 그냥 장난치신 거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맞는 거 같았다.
긴장이 풀렸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때까지 긴장했던 자기만 바보가 된 거 같았다.
‘바보같이 괜히 걱정했잖아! 아저씨도 나빴어. 여자 마음을 가지고 놀아?’
심술이 났지만 그래도 마냥 기분이 좋았다.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눈앞의 그가 미웠지만 그래도 그만큼 좋았다.
이제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받아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녀가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기다리자 그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얘기를 꺼냈다.
“현아야, 너 헌터 그만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