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 D컵이 내게 집착한다(10)
자신감이 생긴 감덕배는 혼자서 던전 클리어에 도전했다.
어디까지 할 수 있을 지 스스로의 한계를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감덕배는 D등급 던전을 솔플하는데 성공했다.
클리어 시간은 한 시간 십삼 분으로
이현아와 함께 공략할 때 보다 단축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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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고 눈치가 없는 놈이 아니다.
갑자기 이현아가 저렇게 저기압이 됐는데 설마 내가 그 이유를 모를까?
헌터로서 자기보다 앞서나가는 날 질투하니까 저러는 거다.
거기다 나만큼 강해지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과 자괴감,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느껴져서 우울해진 거겠지.
나 역시 그런 적이 많았기 때문에 지금의 이현아에게 공감이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현아를 배려하기 위해 일부러 약한 척을 할 순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성장할텐데 이현아가 따라오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는 헤어질 관계다.
따라서 한 순간의 감정을 위한 배려는 의미가 없다는 소리다.
안타까웠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그래도… 위로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나는 내 첫 솔플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술자리를 만들었다.
술 한 잔 하면서 이현아의 멘탈을 챙겨줄 생각이었다.
***
“요새 남자친구랑은 어때? 화해했어?”
“…그 새끼…”
“응?”
“그 새끼… 개새끼에요, 완전!”
아 조졌다.
헌터 쪽 말고 일상에서의 얘기를 꺼내려고 하다가 그만 발작버튼을 건드리고 말았다.
안그래도 남친이 헌터 일을 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했었지… 내 실수다.
“아직도 헌터 때려치고 내려오래?”
“그걸 떠나서 바람폈다고요 그 새끼!”
아 개조졌다.
순식간에 병살을 쳐서 찬물을 끼얹은 타자가 된 기분이다.
아니 시발 이런 애를 두고 바람을 펴? 도대체 얼마나 잘난놈인데 그래?
분명 아까까진 싱글벙글 하며 내게 말을 걸던 이현아였는데
지금은 울먹이면서 하소연을 하고 있다.
젠장, 이래가지곤 멘탈만 더 건드리겠는데. 돌겠다 정말.
-꿀꺽꿀꺽
-탁!
“…끄윽. 말해주세요 아저씨이!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에요오? 네에?”
“…그러게 말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현아는 술을 잘 마시는 것도 아니면서 억지로 들이켰다.
그러고는 술의 힘을 빌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얘기를 들어보니 착각이라기엔 너무나 명확했다.
이른 아침부터 여자랑 같은 방에 있으면 끝났지 뭐. 거기다 밥까지 차려줬다며.
여자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데 내가 봐도 바람이 확실해 보였다.
“그새끼… 훌쩍,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오.”
“…뭐?”
“양다리 걸쳤던 새끼라고요오!”
아 개씹조졌다.
투수가 던진 공이 그대로 머리로 날라와 데드볼에 맞은 기분이었다.
상습범이었어? 진짜 어떤 새끼길래 그랬는데도 사귀고 있는 거야?
“흐윽… 나쁜 새끼이… 훌쩍, 개새끼… 흐으아앙.”
이제는 아예 대성통곡을 하는 이현아였다.
안그래도 남친 때문에 멘탈이 터진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동료라는 놈이 재각성을 해서 D등급 던전을 솔플하고, 술자리에선 바람핀 남친 얘기를 꺼낸다?
‘홀리 쉣.’
나라도 저런 반응이었을 거다.
쏟아지는 죄책감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게 사과하면서어… 후으… 앞으로는 잘해줄 거라더니이! 훌쩍.”
“또! 또! 거짓말…! 흐아앙.”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 미안해서 이현아의 옆자리로 가서 달래주었다.
“흐윽… 아저씨… 아저씨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자 이현아가 내 품에 안겨 오열을 했다.
티셔츠가 그녀의 눈물에 젖어 축축해져 갔지만 나는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근데 진짜 남친이 개새끼는 맞구나.’
양다리를 걸쳐서 하나밖에 없던 친구와는 절교하게 만들고
의지할 곳이 사라진 이현아는 자신만 바라보도록 가스라이팅을 했다.
정말 생각보다 더 한 쓰레기였다.
얘기를 듣고 있으니 시우는 정말 착한 놈이었다.
눈치가 없는 호구라서 그렇지 나쁜 놈은 절대 아니었다.
진짜 다음에 만나면 잘해줘야지…
***
이번에도 꽐라가 된 이현아를 업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혹시 또 이런 일이 있을까봐 그녀의 집 근처에서 술자리를 가진 게 정답이었다.
그럼에도 챙길 짐이 많아서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커다랗고 부드러운 감촉에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훌쩍… 아저씨이… 아저씨는 그러지 마세요…”
이현아는 저번이랑은 다르게 오늘은 잠을 자지 않았다.
그 정도로 취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대신 업힌 채로 이리저리 움직여대서 데려가는 게 고생이었다.
“아시겠죠오? 절대! 절대로 그러면 안돼요오?”
이래가지곤 오늘은 못따먹겠네.
성감자극으로 억지를 부리면 못할 것도 없긴 한데…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누가봐도 위태로운 이현아인데 잘못 건드렸다간 깊은 어둠을 볼 거 같았다.
“읏차… 잠깐 들리자.”
“훌쩍, 네에…”
오늘은 그냥 얌전히 재우고 나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이현아를 데리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숙취해소 음료랑 해장용 컵라면을 사기 위해서였다.
비틀거리는 이현아를 곁에 두고 물건을 고르는데 갑자기 그녀가 내게 달라붙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더니 나를 바라보며 애교를 부려댔다.
“아저씨이… 이거 마싰는데에… 훌쩍… 하나 사주시면 안대여?”
“아! 이것도! 이거 엄처엉 마싰어요… 헤헤.”
그녀는 조울증이라도 걸린 건지 감정의 변화가 극과 극이었다.
그래서 어떤 장단에 맞춰야하는 지 헷갈렸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존나 귀엽네…’
애교를 부리는 그 모습이 엄청 매력적이었다는 거다.
따먹고싶을 만큼.
아 안돼. 참아야지.
괜히 건드렸다가 망가뜨릴 거 같아…
그러니 참자.
“알았어. 먹고 싶은 거 다 골라. 전부 사줄게.”
“진짜죠? 헤헤… 대박사건…! 그럼 이거랑, 이거랑…”
이현아는 내 말에 기뻐하며 팔짱을 끼더니 나를 끌고다니며 상품을 하나하나 골라댔고
나는 팔에 닿은 푹신한 촉감을 즐기면서 그녀가 골라준 물건들을 바구니에 담았다.
“계산해주세요.”
카운터로 가자 알바생이 이현아의 가슴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헛기침을 하고 계산을 부탁하자 그가 동경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 그런 거 아닌데. 흠흠…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앗, 이거 빠뜨렸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현아가 카운터 옆에 진열된 물건 하나를 집더니 바구니 제일 위에 올려놓았다.
얘가 진짜 미쳤나? 왜 이러는 거지?
물건을 본 나와 알바생의 동공이 흔들렸다.
술에 취해서 뭔가 착각이라도 했나? 지금을 꿈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그게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건 빼주세요.”
“맞다… 필요없지 참… 헤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오해하잖니?
한숨을 쉬며 알바생을 보자 그가 입을 벌리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노, 노콘…”
“저기요 빨리 계산이나 해주세요.”
“아, 넵!”
미친새낀가? 그걸 입밖으로 내뱉고 있네.
그리고 그런 거 아니거든? 진짜 오늘은 가만히 재울 생각이다.
***
이현아의 집에 도착한 나는 그녀의 양말과 외투만 벗기고 침대에 눕혔다.
오늘은 잠을 안잤겠다 세안은 시켜주고 싶었는데
이현아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안심이 됐는지 그대로 잠을 자고 말았다.
나는 그녀를 내버려둔 채 간단한 청소를 시작했다.
책상 위에 종이가 지저분하게 쌓여있어 척 보기에도 더러워 보였기에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다.
“오, 이 중국집 맛있는데. 현아가 뭘 좀 아네.”
그 중 제일 윗장엔 내 단골 중국집 상호명이 적혀있었는데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서 뭔가 반가웠다.
그렇게 청소를 끝내고, 손을 씻을 겸 설거지도 끝내고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려고 이현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새액새액거리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예쁜 여친을 두고 양다리에 바람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너도 참 불쌍하구나. 어쩌다 그런 놈을 만나서…
안타까운 마음에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헤으응…”
참 고생을 많이 한 아이였다.
혼자서 타지 생활을 하는 것도 쉽지가 않은데 길드에서 잘리고, 인맥관리에 실패해 친구 하나 없고, 장거리 연애중인 남친은 바람피고…
그럼에도 평소엔 내색하나 안하고 밝은 모습만 보여주는 그녀였다.
정말 어떻게 이렇게 착하고 기특할까?
“현아야. 난 언제나 네 편이야. 그러니 너무 혼자서만 힘들어 하지마. 힘들면 언제든지 어리광부려도 돼. 난 네 동료잖아. 알겠지?”
그러니 나라도 챙겨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듣지도 못할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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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원룸방, 감덕배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현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고는 그가 쓰다듬어 주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베시시 미소지었다.
아직도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역시 그날 일은 꿈이 맞구나.”
짙은 어둠 속에서
그녀는 약간은 아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