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 로맨스판타지(17)
따뜻한 주말 오후,
소위 말하면 있는 사람들만 쓸 수 있는 공간에서 그에 어울리는 자태의 세 영애가 모여 다도회를 열었다.
“후훗, 안녕하세요. 루이나 오베르양? 이런 자리에서 만나뵙게 된 건 처음이죠? 다시 인사드릴게요. 세실리아 아실이라고 해요. 잘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희도 초면은 아니죠? 아리아 멜츠에요. 잘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여러분? 조금… 당황스럽네요. 흐음, 루이나 오베르에요. 저도 잘부탁드려요.”
전혀 예상치 못한 두 사람의 모습에 루이나 오베르는 당황한 모양이었지만
세실리아 아실과 아리아 멜츠는 당연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루이나 오베르에게 인사를 건넸다.
“레인 선생님께 일이 생기셨길래 저희가 대신 나오겠다고 했답니다.”
“루이나양과 꼭 이런 자리를 가지고 싶었거든요! 그동안 계속 거절당해서 정말 슬펐어요!”
“어머, 죄송해요. 제가 많이 바빴거든요. 본의 아니게 계속 거절을 하고 있었네요.”
“그래도 괜찮아요! 이렇게 만났으니까요!”
억지로 두 사람과의 자리를 피하고 있었던 루이나였기에 지금 자리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원작 주인공이자 현재 자신의 사랑을 뺏어간, 아니 뺏어간 줄 알았던 아리아 멜츠.
끔찍한 학살극을 벌인 마녀지만 어째선지 지금 세계관에선 조용한 세실리아 아실.
모두 그녀가 상대하기엔 까다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떤 일로 찾아오신 걸까요? 두 분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이런 자리를 가질 만큼 교분이 있었던 건 아니라… 궁금하네요.”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요! 루이나양은 아카데미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잖아요!”
‘주제를 아셔야죠. 하급 귀족이 무작정 찾아와 만나달라고 고집을 부리는 건 도대체 누구한테 배운 예의일까요?’라고 따지고 싶은 루이나였지만
“후훗.”
옆에서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세실리아 아실이 신경쓰여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원작에서의 그녀는 저 웃음과 함께 살인을 하던 마녀였기에 루이나는 움츠려들 수밖에 없었다.
“어머, 하지만 미리 연락을 주셨다면 이렇게 당황하는 일도 없었을텐데… 조금 유감이네요.”
따라서 이렇게 돌려말하는 게 루이나의 최선이었다.
‘으음? 오베르양이 왜 이러는 걸까요…?’
하지만 그렇기에 세실리아의 의심을 산 루이나였다.
세실리아가 알고 있는 루이나는 차갑고 날카로운 사람으로 지금처럼 예의없는 행동을 굉장히 싫어했다.
따라서 당연히 싫은 소리를 내뱉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애써 웃으면서 넘어가셨단 말이죠. 그것도 저를 의식하면서… 과연 오베르양, 뭔가를 눈치채신 걸지도…’
‘…그럼, 한 번 떠볼까요?’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괜히 다른 소문이 생길까 걱정이 되었거든요. 아버지의… 치료에 대해 여쭤보고싶은 게 있어서요.”
“…치료요?”
“딱히 비밀은 아니지요? 양호실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루이나양이 아버지께 치료받는 걸 다 알고 있답니다.”
덕배 아실의 치료 얘기가 나오자 루이나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에게 만져지던 순간이 생각나면서 동시에 과연 세실리아가 어디까지 알고 저렇게 말을 꺼내는 지 걱정이 들었다.
만약 자신의 추태를 알고 있는 거라면 지금의 물음은 무슨 의미이고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건지… 알기가 두려웠다.
“그, 그게 왜요? 이상한… 그래,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요? 아픈 곳이 있어서 치료를 받는 단순한 행위에요.”
“어머? 그렇게까지 당황하시니 오히려 걱정이 되네요. 저는 단지 아버지의 딸로서 치료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는 지 묻고 싶었던 것뿐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그건…”
그러나 그건 루이나의 실책이었다.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태도에 두 사람에게 역으로 의심을 사버린 것이다.
‘차라리 당당하게 되물었어야 했는데…’하고 후회하는 루이나였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후훗, 사실 다 알고 왔답니다.”
“…네에? 그럴수가… 분명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다 아는 방법이 있거든요.”
“세실리아양은 모르는 게 없어요!”
세실리아의 대답과 확신에 찬 아리아의 지원에 루이나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찻잔을 쥐고 있는 손이 덜덜 떨리며 안에 든 차가 이리저리 튀었다.
숨을 쉬고 있는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호흡이 가빠지고 눈 앞의 시야가 흐려졌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수치심에 그녀는 기절할 것 같았다.
그런 루이나를 보고 세실리아가 입을 열었다.
“루이나 오베르양. 아버지께 치료받는 행위, 그만두세요. 다시 말할게요. 아버지께 치료받는 행위, 그만두세요.”
“맞아요! 그만두세요! 루이나양을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그만두는 게 맞아요. 제가 테라피를 받는 시간이 줄어… 아, 아무튼요!”
“…뭐...라고요?”
루이나는 끔찍한 상상을 했었다.
이번 약점을 빌미로 자신을 장난감으로 만들어 이리저리 휘두르는 마녀의 모습과 자신 주변의 모든 것을 가져가버리는 진주인공의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둘은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더니 그 행위를 멈춰라고 조언해줬다.
기억 속, 원작 속, 두 사람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대체… 왜?’
감사했다. 안도했다. 그러나 동시에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왜?’
치료를 그만두는 건 곧 자살행위였다. 살기 위해선 치료를 받아야 했다. 저 둘의 말은 다시 말하면 자신보고 죽어라는 말과도 같았다.
‘나보고 죽어라고…?’
루이나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반사적으로 거절의 말이 입에서 쏟아져나왔다.
“시, 싫어요! 전 여러분이 무엇을 걱정하는 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은 치료를 해주셨고 저는 치료를 받았어요. 덕분에 몸은 건강해졌고 그게 끝이에요. 두 분이 무슨 권리로 저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것은 혼신의 저항이었다. 어찌보면 호의를 거절하는 무례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미 눈 앞에 두 사람이 나타났을 때부터 그녀는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게 불가능해져 있었다.
“싫다고… 하셨나요?”
“네! 두 분 다 저를 걱정해주시는 건 고맙지만! 선을 넘진 말아주세요. 할 얘기가 그것뿐이라면 전 이만 일어날게요.”
루이나가 할 수 있는 건 억지를 부리는 것과 당장 이 자리를 피하는 것뿐이었다.
항상 우아한 모습만 보여주던 그녀의 어쩔 줄 몰라하는 행동에 아리아는 웃음이 나왔다. 소문과 달리 루이나는 자기만큼이나 쉬운 여자였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웃을 수 없었다.
‘암시가… 안먹혔다고요?’
자신의 자랑거리인 암시마법이 루이나에게 통하지 않은 것이다.
이번 다도회를 기회로 루이나에게 암시를 걸어 그녀의 처녀를 지킬 계획이었는데 실패해버리고 만 것이다.
‘후훗, 후후… 아하하!’
‘설마 암시가 걸리지 않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네요. 역시… 루이나 오베르양이에요! 그야말로 아버지의 배필이군요!’
세실리아에게 있어 자신의 아버지 말고도 암시가 걸리지 않는 사람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쉽지 않음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운명을 느꼈다.
쉽게 가지지 못하기에 오히려 루이나 오베르가 더 소중해보였다.
“자, 잠깐만요! 제가 루시우스 헤세님에게 다 말해버릴 거에요?”
“…뭐라고요?”
“그렇게 당당하시면 문제없는 거잖아요!”
“으으…”
암시가 걸리지 않는다면 계획을 앞당겨야 했다.
언제 덕배 아실이 루이나의 처녀를 가져갈 지 모르니 시간이 촉박했다.
‘조금 억지를 부릴 수밖에 없겠네요. 그래도 레인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충분한 시간을 벌어줄 테니깐요.’
“멜츠양! 오베르양을 괴롭히는 건 그만두세요.”
“넵!”
“무슨…!”
자신을 구석으로 몰아넣는 아리아의 압박에 두 다리를 떨었던 루이나는
세실리아의 한 마디에 곧바로 태세를 전환하는 아리아의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리아는 그야말로 세실리아의 하수인이었다.
“후훗, 오베르양 실례 많았어요. 맞아요. 저희가 오베르양을 이래라저래라할 권리는 없죠.
하지만 부디 자신의 몸을 소중히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또 봐요 루이나양!”
“……”
루이나는 폭풍에 휘말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괴롭고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둘은 그런 루이나를 내버려둔 채 자리를 떠났다.
‘다음 보름달이 뜨는 날이 좋겠네요. 그 뒤로 늦췄다간 위험하겠죠.’
세실리아는 오늘 있었던 일을 곱씹으며 자신의 계획을 조정했다.
기존에 생각했었던 개기일식은 기다리기엔 너무나 먼 시간이었다.
그녀는 계획을 앞당기기 위해 여러가지 변수를 고민했다.
‘충분히… 가능해요. 왕자와 호위기사를 오베르양에게서 떨어뜨려 둔 게 정답이었네요. 헤세님 혼자서는 절대 막지 못하겠죠.’
‘아아… 벌써부터 설레네요. 이제 정말 곧이에요.’
‘오베르양의 몸을 갖게될 순간이…!’